제79화
“그만들 하거라!”
엽학문은 헛기침을 하며 중재했다. 그는 큰아들이 그 돈에서 일부를 외실에게 가져다줄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분경은 큰아들이 찾아낸 것이니 토사구팽하듯 일을 셋째 아들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거기다 셋째 아들은 말주변도 없고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없는 데다 서자이기까지 했다. 덜떨어진 아들놈에게 일을 맡겼다가는 정안후부의 체면이 뭐가 되겠는가.
둘째 아들은 여식을 좋은 가문에 시집보냈으니 자랑거리가 되긴 하지만, 혼례식 날 혼수 상자에서 돌덩어리가 굴러 나오는 소동을 벌였으니 지금 그 애를 보내면 더 체면이 깎일 게 분명했다.
그래도 큰아들은 적장자이고, 그 귀인과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이니 큰아들이 가는 게 가장 나았다. 그 정도 돈은 아들이 축첩蓄妾하는 데 썼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결국 물품을 구매하는 일을 엽승덕이 맡게 되어 엽영교는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하나 엽영교보다 더 언짢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손씨와 엽승신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얼마 전 엽이채의 혼례식 날에 벌어진 소동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지라, 그들 부부는 감히 허튼짓을 벌이지 못하고 납작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영귀원. 온씨는 엽미채와 수를 놓고 있었고, 채 마마는 그 곁에서 그들에게 실을 나눠 주고 있었다. 그때 염교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안녕당에서 벌어진 일을 온씨에게 전했다.
온씨의 안색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엽승덕이 서둘러 물품 구매권을 다시 넘겨받으려고 하는 것은 보나 마나 그 외실을 먹여 살리기 위함이 분명했다.
채 마마가 자수실을 손에 감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마님, 나리 때문에 화내실 거 없습니다. 그냥 나리께서 밖에서 개 한 마리 더 키운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여인은 나리와 오륙 년을 함께 지냈는데도 자식 하나 낳지 못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들 녀석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남의 씨이지 않습니까. 반면 마님은 아들딸을 낳으셨고 어쨌든 간에 나리의 친자식이고요.”
채 마마의 말에는 은정랑을 향한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달래 주기는 했지만 온씨의 마음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 * *
추길은 온씨에게 초대장과 종자를 전달한 후 곧장 정국백부로 돌아갔다.
엽연채는 궁명헌에서 종자를 감싼 잎을 풀어 헤치고 있었다. 조그만 원탁 위에는 종자를 올려놓은 커다란 접시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엽연채가 종자 하나를 또 깠는데 이번에는 달달한 팥소가 든 종자였다. 그러자 엽연채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짭조름한 계란 노른자와 고기가 들어간 종자는 대체 어디 간 거야?”
이 종자들은 엽연채가 추길, 혜연과 함께 빚은 것이었다. 종자마다 다른 소를 넣었는데, 빚을 때 따로 구분을 해놓지 않은 탓에 짭조름한 종자를 좋아하는 엽연채는 종자를 까고 또 까는 중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까도 원하는 종자가 나오지 않아 심통이 났다.
“아가씨, 이제 그만 까세요. 날이 이렇게 더운데 한 무더기를 까 놓으면 상하기 전에 다 드실 수 있겠어요?”
엽연채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셋째 공자님께 드리면 되지.”
“셋째 공자님은 벌써 여러 날 동안 식사도 하러 오지 않으셨잖아요!”
혜연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교 마마와 향아에게 주면 되지.”
이 종자들은 이미 까 버린 상태라 진씨에게 보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또 무슨 트집이 잡힐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니까.
“오, 추길이가 돌아왔네요.”
그때 혜연이 밖을 내다보며 알려왔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과연 추길이 땀을 닦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차를 따랐다.
“다 전달했느냐?”
엽연채는 찻잔을 추길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예.”
추길은 대답을 하고선 찻잔을 들어 올리더니 단숨에 차를 들이켰다. 그렇게 한 잔을 다 비운 추길이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직 오월도 아닌데 벌써 이리 무덥네요.”
혜연이 추길에게 젓가락을 건네며 권했다.
“종자 좀 먹어봐!”
추길은 젓가락으로 달곰한 팥소가 든 종자를 집어 든 후 베어 물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사월 말이 되자 날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무더워졌다. 하기야 곧 있으면 주묘화의 성년식이니, 단오절도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 * *
오월 초사흗날, 주묘화가 성년식을 치르는 날이 밝았다. 마차 한 대가 장승가에서 정국백부 동쪽 측문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초대장을 건넨 후 안으로 들어가 수화문에서 멈춰 섰다. 염교가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린 후 등받이가 없는 작고 네모난 걸상을 땅에 내려놓았고, 온씨가 그녀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어머니.”
엽연채는 일찌감치 그곳에서 모친을 기다리고 있었다. 온씨는 그녀를 보자마자 미소를 지으며 곁으로 다가갔다.
“연채야.”
온씨는 역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가 딸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화문은 다소 낡은 티가 났으나 주변의 흰색 담장과 검푸른 기와는 깔끔해 보였다. 온씨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엽연채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며 조금 낯부끄러워했다. 이곳은 동쪽 측문이라 진씨와 다른 사람들 모두 이곳에서 가마를 멈추고 내렸고, 또한 진씨의 거처와도 가까운 곳이라 당연히 깔끔하고 보기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주운환이 지내는 서과원으로 가면 아마 어머니의 웃음기가 싹 사라질 것이었다.
“가자. 일단 네 시어머니부터 뵈러 가자꾸나.”
엽연채는 온씨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낀 채 수화문을 넘어서며 말했다.
“제가 초대장을 통해 저희 시어머니가 두 시누이의 혼처를 알아봐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할 거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죠. 절대로 수락하시면 안 돼요.”
온씨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 사람은 네 시어머니인데 내가 거절하면 널 곤란하게 하겠지! 내게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 말거라.”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어쩌시려고요?”
“셋째 마님.”
이때, 근처에서 엽연채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청석판이 깔린 길을 따라 걸어오는 녹지의 모습이 보였다. 녹지는 온씨와 엽미채를 훑어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두 분께서 엽씨 가문 마님과 셋째 아가씨이시죠. 처음 뵙겠습니다.”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되네.”
그녀의 인사에 온씨가 얼른 화답했다.
“저희 마님께서 지금쯤이면 엽 부인께서 도착하셨을 거라며 소인에게 마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셋째 마님께서 먼저 와 계셨네요.”
“아유, 부인께서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지 않아도 되는데.”
녹지의 말에 온씨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님, 이쪽입니다.”
녹지가 앞에서 길을 안내하자 엽연채는 온씨와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어 기분이 언짢았다. 그런데 이때 엽미채가 다가와 엽연채를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큰언니. 두 가지 말씀드릴 일이 있어요.”
“무슨 일인데? 그것도 두 가지나?”
엽연채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온씨와 녹지는 앞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엽연채는 엽미채를 잡아당기더니 몇 발자국 뒤에서 그녀와 속닥거리며 걸어갔다.
“얼마 전에 할아버지께서 아버지로부터 물품 구매 권한을 회수해 가셨잖아요. 그런데 그저께 다시 돌려주셨어요.”
엽미채의 말에 엽연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또 돌려준 거래? 이유를 알고 있니?”
“고모한테 들었는데요.”
엽미채가 미간을 찌푸리며 사정을 설명했다.
“곧 어떤 귀인의 생신이신가 봐요. 그건 좋은 일이긴 한데, 아무튼 그래서 아버지가 어디서 아주 귀한 분경 하나를 구하셨대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경조사를 챙기는 물품 구매 권한을 도로 아버지에게 돌려주셨어요.”
이야기를 들을수록 엽연채의 아리따운 얼굴이 점점 싸늘하게 변해 갔다.
“저번에 할머니께서 아버지를 꾸중하셨잖아요. 그 외실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이죠……. 그런데 할머니 말씀을 귓등으로 흘리시고, 오늘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물품 구매 권한을 가져가셨어요. 보나 마나 그 외실을 데리고 사는 데 쓰시려는 거겠죠. 할아버지도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요.”
그러자 엽연채는 입을 삐죽 내밀며 생각했다.
‘무슨 생각이겠니? 외실을 데리고 살든 정실부인을 어떻게 대하든 간에 할아버지에겐 그저 아녀자들의 일에 불과한 것이다. 밖에서 관리들을 만나며 교분을 쌓는 것이야말로 할아버지에겐 큰일인 게지. 외실을 데리고 사는 게 품위가 크게 손상되는 일도 아니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고모는 오늘 왜 안 오셨어?”
엽연채는 화제를 돌렸다.
“그게 바로 제가 말씀드릴 두 번째 일이에요!”
“아, 종자를 너무 많이 먹어서 못 오신 건가?”
엽미채는 엽연채의 농담에 따라 웃기는커녕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이 목소리를 더 낮추어 소곤거렸다.
“그런 게 아니에요. 고모가 할머니한테 삐지셨거든요.”
“그랬구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이후를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언니, 고모가 왜 토라지셨는지부터 물어봐야죠.”
그러더니 엽미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날 할머니께 문안을 드리러 갔다가 고모가 이렇게 일찍 혼인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요.”
“일찍이라고? 몇 달 후면 열일곱인데!”
엽연채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든 고모가 그렇게 이야기하셨어요. 당연히 할머니는 받아들이지 않으셨죠. 그래서 고모가 기분이 상하신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더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이미 일상원 문 앞에 다다른 후였다.
“연채야, 미채야.”
온씨가 고개를 돌아보니 두 자매가 뒤에서 속닥거리고 있었다.
“어머니.”
엽연채는 엽미채를 끌어당기더니 배시시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부인, 아가씨, 셋째 마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앞에 있던 녹지가 미소를 지으며 청했다.
엽연채 일행이 일상원 안으로 들어서자 녹엽이 낭하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문발을 걷어 올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안을 향해 고했다.
“사돈 마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엽연채가 앞장서서 서차간으로 걸어갔다. 곧 온씨와 엽미채의 시야에 방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들어왔다. 널찍하고 기다란 홍목 침상 위에는 활짝 핀 형태의 꽃문양이 들어간 상등품 모포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약간 야위어 보이지만 아름답게 생긴 부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온씨는 그녀가 앉은 자리를 보고는 분명 엽연채의 시어머니 진씨일 거라고 추측했다.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진씨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다. 하좌 양쪽에 놓인 권의들에는 마치 기러기가 날개를 쫙 펼친 것처럼 젊은 부인들과 나이가 좀 있는 부인들이 죽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