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정랑…….”
소식을 전해 들은 엽승덕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정랑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 엽연채를 속으로 원망했다.
“요즘 정안후부로 거의 발걸음하지 않으셨잖아요…….”
그 말과 함께 은정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떨구었다.
“제가 넓은 마음으로 나리께 집에 가 보시라고 해야 하는데……. 하지만 전 나리를 속이고 싶지 않아요……. 전 지체 높은 가문의 법도 같은 걸 배우지 못해 마음이 넓은 척, 부덕婦德이 있는 척 행동하는 법을 몰라요. 나리께서 가시면, 나리께서 그분과 함께 있는 걸 생각하면 전…….”
“정랑… 난…….”
엽승덕은 마음이 아팠다. 자신이 어찌 그녀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현실이 이러하니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들 사이에 놓인 장애물을 전부 제거해 버리는 것뿐이었다.
“내일 집으로 돌아가 보세요. 집에 돈도 다 떨어졌고……. 요 선생에게 선물도 해야 해요. 요즘 선생이 허서를 홀대하고 있어요.”
그러더니 은정랑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 참 못됐죠? 그깟 돈 때문에 미련 없이 나리를 집으로 돌려보내잖아요. 그게 아니었다면 보내지 않으려고 했을 텐데.”
“당신이 아무리 못된 사람이어도 난 당신을 사모하오.”
엽승덕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니 자신이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옹졸하게 구는 건 자신이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걸 용납할 수 없고 자신을 전부 차지하고 싶기 때문이 분명했다. 자신과 정랑은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감정을 서로에게 품었을 뿐인데, 장애물이 너무도 많았다.
‘왜 우리 두 사람은 혼인 전에 만나지 못했을까?’
자신은 정랑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다. 하지만 여인은 마음이 약한 존재였고, 더군다나 허서는 그녀가 열 달 동안 품어 낳은 자식이었다. 그러니 정랑이 그를 내버려 둘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그럼 자신이 그녀와 그녀의 모든 걸 품어 주면 된다. 정랑의 자식이 바로 자신의 자식이었다.
허서가 분발해서 과거 시험에 합격만 하면 이 사랑도 이루어질 것이며, 그때부턴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함께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이 세상에서 정랑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으니 자신은 세상에서 제일 좋은 건 다 그녀에게 주려고 했다.
“돈을 받기가 쉽지 않을 테니 제 장신구를 좀 가져다 파는 건 어떨까요?”
은정랑이 말했다.
“괜찮소. 당신 장신구는 이미 너무 많이 팔지 않았소.”
엽승덕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그녀의 조그만 귓불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작년에 내가 직접 만들어 준 금에 옥을 상감한 귀걸이도 팔지 않았소.”
그러자 은정랑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를 쳐다보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더니 화장대 앞으로 걸어가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잠시 후 옥을 상감한,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은 금귀걸이를 꺼내며 말했다.
“여기 있죠? 나리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건데 아까워서 어떻게 팔아요? 다만 고리 부분이 망가져 나리가 고쳐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엽승덕은 기뻐하더니 귀걸이를 가져오며 말했다.
“내가 내일 고쳐 주겠소. 반짝거리지 않아 차기에는 좀 그렇구려. 그리고 내게 방법이 다 있으니 당신 장신구는 이제 그만 파시오.”
“정말요?”
엽승덕은 웃으며 장담했다.
“내가 집안의 물품 구매권을 다시 넘겨받을 것이니 기다리고 있어 보시오. 그리고 거기서 오래 머물지도 않을 거고 그 사람을 보지도 않을 것이오. 그랬다간 당신이 날 가만두지 않을 거 아니오.”
그제야 은정랑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주묘화의 성년식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씨 가문은 서두르는 기색 없이 여유롭게 주묘화의 성년식을 준비했다. 진씨는 강심설의 친정 식구와 주종과의 정혼녀만 초대했을 뿐, 자신의 친정 식구조차 부르지 않았다.
사월 스무날, 엽연채는 추길을 시켜 온씨에게 초대장을 보냈고, 그러는 김에 친정에 종자粽子(단오절에 먹는 명절 음식으로 댓잎이나 연잎 따위에 찹쌀과 대추 등을 넣어서 찐 것)도 함께 보냈다. 온씨가 초대장을 받았을 때 그녀는 엽미채, 엽영교와 함께 수를 놓고 있었다.
염교가 초대장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큰아가씨께서 초대장을 보내셨어요!”
“어서 가져와 보너라.”
온씨는 수틀을 내려놓고 초대장을 건네받아 안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어머니, 큰언니가 뭐라고 썼어요?”
엽미채가 물었다. 그녀와 엽영교도 수틀을 내려놓은 후 온씨 곁으로 다가갔다.
“오월 초사흗날이 주씨 가문 둘째 아가씨의 성년식이니 참석해 달라고 하는구나.”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내용을 전했다.
“주씨 가문 둘째 아가씨가 날 한번 참 잘 잡았구나. 곧 단오절이니 종자도 먹을 수 있겠어.”
“저도 갈래요.”
엽미채는 엽연채의 시댁이 어떠한 곳인지 보고 싶었다.
“그리하자꾸나.”
온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도 진작부터 주씨 가문에 가 보고 싶었다. 가서 딸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딸의 시어머니는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고 싶었다. 이제 그 기회가 생겼으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엽영교도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요즘 일이 너무 많아 시간을 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초대장 아래에 따로 서신도 있네요.”
“어디 보자꾸나.”
엽미채의 말에 온씨는 서신을 건네받아 열어 보더니 안에 든 내용을 꼼꼼히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읽어 내려갈수록 표정도 점점 더 고민스러워 보였다.
“왜 그러세요?”
엽미채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연채의 시어머니가 주 소저의 혼처를 구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 성년식을 핑계로 나를 부르는 거라고 적어 놓았구나. 그리고 그 큰아가씨가 설레발을 치는 성격이니 나보고 수락하지 말라고도 했다.”
온씨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서신 내용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승낙하지 않으시면 주 부인이 언니를 괴롭힐지도 모르잖아요.”
엽미채는 조심스러운 눈길로 온씨를 쳐다봤다.
“그렇게 설레발을 친다는 말이냐?”
이에 온씨는 고민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보통 설레발을 치는 게 아니에요.”
이리 말하며 엽영교는 깔깔 웃었다.
“미채야, 저번에 적성대에 갔을 때 기억나지?”
“아……! 기억나요. 금계金鷄!”
엽미채도 킥킥 웃으며 대꾸했다.
“금계?”
온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엽영교는 적성대에서 주묘서가 금琴을 연주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온씨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들어 보니 정말 보통 설레발을 치는 게 아니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도와주지 않으면 진씨가 딸을 괴롭힐 게 분명했다. 게다가 굳이 따지자면 딸은 진씨에게 ‘제대로 된’ 며느리도 아니었다.
“영교 아가씨.”
이때 밖에 달린 문발이 걷히더니 채 마마가 안으로 들어왔다.
“주인마님께서 안녕당으로 오시랍니다.”
“무슨 일로 부르시는 거예요?”
엽영교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큰나리께서 돈을 타러 오셨습니다.”
엽이채의 혼사가 정해진 후, 엽학문은 가사 관리권과 물품 구매권을 둘째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노름으로 엽이채의 혼수를 싹 날려 버린 뒤로, 엽학문은 집안의 돈을 두 사람에게 맡기는 게 불안했던 나머지 이번에는 묘씨에게 넘겨 주었던 것이다.
묘씨는 엽영교가 장자에게 시집가는 건 아니더라도 나중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딸에게 그 권한을 넘겨주었다. 이 기회에 출가를 앞둔 딸에게 돈을 관리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한 것이었다.
“큰오라버니께서 돈을 타러 왔다고요?”
엽영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가 볼게요.”
온씨는 낯빛이 어두워지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도 가서 그가 대체 무엇을 하려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결국 참고 말았다. 볼 게 뭐가 있겠는가. 채 마마가 말했듯이 그냥 남편이 죽고 없는 셈 치면 됐다.
“새언니, 저 먼저 가 볼게요.”
엽영교는 미소를 짓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영귀원을 나온 엽영교는 곧장 안녕당으로 걸어갔다. 서차간으로 들어서니 엽학문과 묘씨는 침상 위에 앉아 있었고, 엽승덕은 오른쪽 하좌에 놓인 권의에 앉아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엽학문은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큰오라버니.”
엽영교가 인사를 건넸다.
“영교야, 네 큰오라버니에게 은화 오백 냥을 내주거라.”
엽학문의 말에 엽영교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버지, 지금 집에 남아 있는 현금이 몇백 냥밖에 안 됩니다. 지세와 소작료도 유월이나 돼야 들어오고요. 그리고 곧 단오절인데 친척들과 벗들에게는 선물 안 하실 겁니까?”
그러자 엽학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네가 선물을 하면 상대방도 선물을 할 게다. 우리 가문이 그 정도 돈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건 아니지 않더냐?”
그의 대답에 엽영교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돈을 내줄 수 없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어디다 쓰실지는 알아야겠죠? 장부에도 기록해야 하니까요.”
“며칠 뒤면 귀인의 생신이다. 네 큰오라버니가 팔수혈옥분경八壽血玉盆景을 찾아내 지금 예약하러 가려는 거고. 돈이 좀 모이면 그때 사 가지고 와 선물하려고 한다.”
엽학문이 설명하자 엽영교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 귀인이 누구인데요?”
“여인네가 물어서 뭐 하려고?”
엽학문은 어두운 표정으로 힐책하듯 되물었다. 그 말에 놀란 엽영교는 입술을 삐죽거렸으나 어쨌든 그 돈이 관료 사회에서 접대에 필요한 것이란 사실은 알게 되었다.
“어쨌든 넌 돈이나 내주면 된다.”
엽학문이 말했다.
“물품 구매권은… 둘째 오라버니에게 넘겨드렸잖아요?”
엽영교는 그 말을 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큰오라버니가 외실을 부양하느라 전에 돈을 떼어먹고 그 돈을 외실 입에 집어넣어 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엽영교는 그 외실이 역겹고 혐오스러웠다. 큰오라버니를 꾀어 친자식마저 사람 취급하지 않게 만든 악독한 인간이었다.
엽승덕의 눈에 순간 싸늘한 기색이 어렸다. 이놈이든 저놈이든 다 자신의 정랑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가 차디찬 눈빛으로 엽영교를 흘겨보며 호통쳤다.
“둘째는 얼마 전에 이채의 혼수를 날려먹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녀석한테 그 일을 맡기고 싶은 게냐? 다 잃어 봐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거기다 이채가 혼례식을 올리는 날 그런 소동까지 벌였는데 아직 구길 체면이 더 남아 있기나 해?”
분한 엽영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둘째 새언니가 저번에 큰오라버니가 선물을 할 때도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멀쩡한 성교오채 자기병이 매화병이 되어 버렸죠! 그럴 바엔 차라리 셋째 오라버니에게 맡기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