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그 말에 엽균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연채야, 그건 말이다. 내가 학문을 익히고 싶지 않아서다. 학문을 익혀서 좋을 게 뭐가 있느냐?”
“좋을 게 없는데 허서는 왜 학문을 익히려고 한대요? 왜 과거 시험을 치르려고 한대요? 아버지가 편애하는 거죠!”
그러자 엽균이 자신만의 명언을 날렸다.
“우리는 작위를 세습할 수 있는 공훈이 있는 귀족이잖니. 학문을 익히는 건 그저 글자나 알아보고 도리를 아는 정도면 충분하다. 이 말은 저번에 네 부군도 하지 않았더냐?”
그 말에 엽연채는 말문이 막혔다. 이 말은 주운환이 저번에 가족들과 인사를 나눌 때 분명 했던 말이었다.
“허서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 죽기 살기로 학문을 익혀야 한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우월감이 섞인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같이 공훈이 있는 귀족들은 학문을 익힐 수 있으면 익히면 되는 거고, 그럴 수 없으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된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면 되지. 안 그렇더냐? 어차피 세습봉작世襲封爵을 계승할 테니 명목상의 관직이나 얻어 체면치레나 하는 거지, 뭐.”
“그럼 오라버니는 뭘 하고 싶어요?”
엽연채가 짙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묻자 엽균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직 뭘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할아버지 강요로 학문을 익히고는 있는데, 정말이지 시간 낭비란다.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어. 아무튼 아버지는 절대로 편애하는 게 아니야!”
엽연채는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밥이나 먹죠!”
“그래, 연채야 너도 많이 먹어라.”
엽균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일은 어머니께 말씀드리면 안 된다. 어머니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 입장을 바꾸어 상대방을 생각하실 줄 모른다.”
엽연채가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네.”
엽균은 엽연채가 교화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이제는 서자에게 시집을 갔으니, 정랑과 허서의 고통을 십분 이해할 수 있을 터였다.
“연채야, 앞으로 자주 보고 식사도 같이 하자꾸나. 우리는 한 핏줄이고 친남매인데 서먹하게 지내면 되겠느냐?”
엽연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네.”
이에 엽균은 싱글벙글 웃으며 주묘화에게 탕을 떠 주었다.
“소저, 드셔 보세요.”
“감사합니다. 공자님.”
주묘화는 붉어진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어려 있었는데 꽤나 감동한 눈치였다. 주묘화가 보기에 엽균은 아주 별나면서도 위대한 사람이었고, 보통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다.
서녀인 자신과 이낭인 어머니는 적모와 적출 언니 앞에서 비굴하게 몸을 낮추고 굽실거리며 지냈고, 모두들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지금껏 자신들을 가엽게 여기고 그 처지를 생각해 주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직 이 공자만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생각을 하며 평등한 시선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묘화는 그렇게 생각하며 엽균을 슬쩍 쳐다봤다. 그는 수려한 얼굴로 따뜻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더니, 얼굴이 한층 붉게 달아올랐다.
반 시진쯤 지나자 모두 식사를 마쳤고, 엽균이 엽연채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제 어디를 갈 거니?”
“면포를 고르러 갈 거예요.”
“그럼… 난 이만 가야겠구나.”
엽균이 해죽해죽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오라버니, 계산 안 해요? 오라버니가 사 줘야죠!”
엽연채가 그를 붙잡자 엽균이 굳은 표정으로 변명했다.
“내 이번 달 용돈이 이미 바닥이 나서…….”
“오라버니는 이렇게 장성할 때까지 저에게 밥 한 끼, 떡 하나 사 준 적이 없잖아요.”
엽연채가 곱고 커다란 두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볼멘소리를 했다. 그러자 엽균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버지는 요즘 돈에 쪼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랑에게는 살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돈이 필요하니, 그는 전에 모아두었던 돈을 전부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방금 전 벼루를 샀던 돈은 같이 공부하는 벗에게서 빌린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수중에 남은 거라곤 은화 세 냥이 전부였다.
엽연채는 그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며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그녀는 방금 전 엽균이 품서재品書齋에서 벼루를 사면서 은표 한 장을 꺼냈고 주인이 잔돈을 거슬러 주었음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제, 제가 사겠습니다!”
주묘화는 돈이 없어 곤란한 엽균의 상황을 해결해 주고자 얼른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제가 새언니께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어요.”
엽균이 고마워하며 주묘화를 쳐다보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불그스름해졌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먼저 아래로 내려가 계산을 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며 못마땅한 나머지 입술을 씰룩거렸다. 이 식당은 특별히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밥값이 그리 비싸지 않았다. 또한 방금 전 주문했던 음식도 평범한 것들이라 몇 푼이면 충분했다.
남매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헤어졌다. 주묘화는 엽연채를 끌고 면포를 사러 갔고, 엽균은 객락재 앞으로 향했다. 그는 품 안의 은화 한 냥을 만지작거리며 조금 망설였다. 방금 전 엽연채가 밥을 사달라고 했을 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남겨둔 이 돈으로 떡을 사서 정랑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송화 골목에서 엽연채가 사람들 앞에서 허서의 거짓말을 들춰내는 바람에 정랑은 상심하고 난처했을 텐데, 자신마저 여동생을 따라왔으니 그녀는 분명 자신이 화가 났으리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하니 지금 떡을 사 간다면…….
그러나 또 한편으론 자신에게 밥을 사달라고 하던 엽연채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결국 떡을 사지 않고 송화 골목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은정랑의 거처에 도착한 엽균이 대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회색 옷을 입은 어멈이 나와 문을 열더니 그의 모습을 보고는 안색이 변했다.
“큰공자, 오, 오셨군요?”
“그래.”
엽균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최대한 상냥하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엽균이 안으로 들어서자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겼다. 산약배골탕 냄새였다.
그가 본채로 들어섰을 때 은정랑과 허서는 한창 밥을 먹는 중이었다. 상 위에는 간소하게 반찬 세 가지와 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청증즉어清蒸鯽魚(붕어찜)와 백청초채심白靑炒菜心(채소의 연한 심을 볶은 것), 산약배골탕 따위였다. 엽균이 다가오자 은정랑이 어리둥절해하더니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말했다.
“전 공자께서 큰아가씨와 함께 식사하시는 줄 알고……. 오시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기다리지 않고 먹고 있었어요.”
엽균은 자신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면 그들이 편하게 식사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얼른 미소를 지으며 사양했다.
“난 이미 먹었어요. 딱히 돌아다닐 만한 데가 없어서 이렇게 온 거예요.”
은정랑은 그의 말에 대꾸하고는 밖을 향해 말했다.
“진 마마, 그릇을 내오시게.”
진 마마가 그릇을 내오자 은정랑이 탕을 떠 주며 말했다.
“균이 공자님, 드셔 보세요.”
권하는 은정랑의 눈에는 얼핏 눈물이 맺힌 것도 같았다. 조심스러워하는 은정랑의 모습을 보니 엽균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어서 위축되어 있는 허서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은정랑과 허서는 분명 자신이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떡을 사 오지 않은 게 내심 후회됐고, 또 이 순간 어떻게 자신의 호의를 표현해야 할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난처했다. 자신의 비위를 맞추려고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고 있고 신경 쓰지 않는다고 그들에게 말하면 도리어 자존심을 상하게 할지도 몰랐다.
어찌하든 간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으니 엽균은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탕을 한 사발 들이킨 후 어색해하며 자리를 떴다. 집 밖으로 나온 엽균은 골목길을 걸으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세상에는 불평등한 일이 너무 많고 가여운 사람들도 넘치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 * *
한편, 주묘화는 엽연채의 기분이 별로인 것을 알아챘다. 면포 상점에 가서도 면포를 고를 기분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반나절을 고르다가 결국 분홍색 복숭아 꽃잎 문양이 들어간 장화粧花 비단 한 필을 대충 골라 구매한 후, 엽연채 일행과 함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궁명현에 도착하자 추길은 나한상에 옆으로 누워 ‘아이고’ 소리를 냈다.
“추길아, 너 왜 그래?”
혜연은 녹초가 되어 나한상에 누운 추길을 보며 핀잔투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가 서책을 보시는 자리에 떡하니 누워 있고 말이야.”
“크, 큰공자님 때문에… 열받아 죽을 것만 같아……!”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추길이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엽균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또다시 화가 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큰공자님을 만났어?”
혜연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이에 추길은 몸을 돌려 일으킨 후 오늘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늘어놓더니 다시금 이를 윽물고 성토했다.
“그렇게 팔이 바깥으로 굽는 불효막심한 사람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마님 생각은 조금도 안 하고 어떻게 그 외실 편을 들 수가 있어!”
엽연채가 여유로운 모습으로 탁자 곁에 앉더니 찻잔에 차를 따르며 말했다.
“오라버니 말씀도 일리가 있어.”
“아가씨!”
추길이 낯빛이 새파랗게 변하더니 크게 외쳤다.
“다만 오라버니는 그 사람들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데, 그 사람들도 과연 오라버니께 그런 마음일까?”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전생에서의 일을 겪지 않았다면 자신도 아마 엽균의 말에 감화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맞아요. 제 말이 바로 그거예요!”
추길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열렬히 동조했다.
“공자님은 어째서 그 외실만 가엽게 생각하시고 마님은 가엽게 여기시지 않는 걸까요?”
“됐다. 화낼 거 없어. 차나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히자.”
엽연채의 대꾸에 혜연은 웃으면서 물 한 잔을 가져오더니 그녀가 마실 수 있게 입가에 대주었다.
* * *
저녁이 되자 하늘에서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어휴’ 소리와 함께 송화 골목에 위치한 영존거의 문이 열리더니, 비에 젖은 엽승덕이 우산을 들고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은정랑은 방 안 창가 옆에 놓인 귀비탑에 누워 떨어지는 비를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매화 문양이 들어간 우아한 긴 배자를 입고 있는 그녀는 방금 전 목욕을 마친 터라 머리를 풀어 헤친 상태였는데, 칠흑처럼 까만 머리칼이 그녀의 갸름한 얼굴을 더욱 작아 보이게 했다.
그녀는 엽승덕이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곤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그는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운 표정이었다.
“정랑…….”
엽승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곤 그녀의 곁으로 걸어가 자리에 앉았다.
“…오늘 큰아가씨가 오셨어요.”
은정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마지못해 짓는 미소였다.
“마님의 명을 받고 절 관찰하러 오신 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