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송화 골목을 걸어 나오니 길은 동대가東大街로 이어졌다. 이 거리는 상당히 번화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게다가 마침 점심시간이라 식당마다 정신없이 바빠 보였다.
엽연채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상대적으로 사람들이 많지 않고 깨끗해 보이는 식당을 고른 후, 2층으로 올라가 방을 빌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엽균은 멋쩍어하면서도 얼른 엽연채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그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점원이 차를 내오자 엽균은 직접 엽연채와 주묘화에게 차를 따라 주며 친절하게 물었다.
“말리차茉莉茶(자스민차)인데 마시니? 주 소저께서도 좋아하시나요?”
엽연채가 대답하지 않자 주묘화는 어색한 상황을 피하고자 작은 목소리로 얼른 대답했다.
“네, 좋아합니다.”
엽균이 엽연채를 힐끗 쳐다보니 그녀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연채야, 방금 전에는 네가 은정랑과 허서를 오해한 거다.”
그 말에 엽연채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무슨 오해요?”
뒤에 있던 추길도 더는 참지 못하고 성을 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무슨 오해가 있단 말씀이십니까? 마님과 아가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공자님이 밖에서 학우들과 노느라 집 생각을 안 하시는 줄 알고 계셨죠. 그런데 그 외실과 가까이 지내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네 이년!”
엽균은 준수한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호통쳤다.
“언제부터 일개 여종 따위가 내게 훈계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냐!”
그러나 추길은 두려워하기는커녕 냉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아이고, 지금 상전 티를 내시는 겁니까? 방금 전 그 외실 앞에서는 말끝마다 정랑, 정랑 하시느라 상전 모습은 하나도 안 보이시던데요?”
그 말에 엽균은 말문이 막혔다. 분했지만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확실히 엄밀히 말하자면 외실은 이낭마저도 아니므로 하인에도 비할 바가 못 됐다. 그런데 그녀가 외실이 아니라고 말하면 또 뭐란 말인가.
“공자님 눈이 아주 멀쩡하게 생겨서 멀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그 외실과 의붓자식은 지금 좋은 사람인 척하고 있는 겁니다. 탕을 끓여 놓고 공자님이 와서 드시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감언이설로 공자님의 환심을 사서 친어머니도 못 알아보게 만들고 있잖아요. 그런데도 지금 그 사람들 편을 드시는 겁니까?”
분노한 추길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너같이 미천한 것이 뭘 안다고 떠들어대는 것이냐!”
엽균이 냉소를 짓더니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연채 너는 아랫사람 관리도 제대로 못하는 게냐?”
엽연채가 추길을 힐끗 쳐다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추길이 넌 조용히 하거라.”
그러고는 다시 엽균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째서 추길이를 미천한 것이라고 욕하는지 모르겠네요?”
엽균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전부 알고 있다!”
“네?”
엽연채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가 이어서 말하기를 기다렸다.
“은정랑과 허서는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랬지. 한데 그게 뭐 어쨌다고?”
그러더니 엽균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일어났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알겠더구나. 허서가 나한테 잘 보이려고 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탕을 끓여 놨다고 거짓말을 한 게다. 그러니 탕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거지. 그래서 위자를 시켜 정랑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또 탕을 준비할 시간을 벌려고 날 여기저기 데려가며 돌아다닌 게다. 내가 돌아가면 바로 탕을 먹을 수 있게 말이다.”
추길은 속이 부글거려 더욱 화가 난 목소리로 외쳤다.
“공자님은 알면서도 그 사람들 편을 드시는 겁니까!”
엽균은 추길을 싸늘한 눈빛으로 쏘아보더니, 엽연채를 쳐다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연채야, 너는 정안후부라는 명문가에서 태어난 귀한 여식이라 어릴 때부터 호의호식하며 응석받이로 자랐으니 평범한 백성들의 고통을 어찌 알겠느냐? 밑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살아가는 사람의 고통을 어찌 알겠어? 매일 밥 한술이라도 입에 넣으려고 온갖 고생을 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네가 어찌 알겠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더니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자, 한번 보거라. 길가의 소상인들이 바람을 맞고 햇볕에 타면서 손님들에게 굽실거리고 있단다. 물건 하나 팔려고, 돈 좀 벌어 보겠다고 힘들게 저리하고 있는 게지. 이게 잘못된 것이냐?”
엽연채가 대답하지 않자 엽균이 자신의 물음에 스스로 답했다.
“저들은 잘못한 게 없다! 길모퉁이에 있는 저 거지를 한번 보거라. 행인들을 향해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 않더냐? 밥 한술 먹어 보겠다고 저리하는 게다. 하지만 저렇게 굽실거려도 밥 한술조차도 먹을 수가 없단다.
그런데 너는 그 자리에서 진수성찬을 즐기며, 다 먹지 못한 건 내버리지 않더냐? 그러니 네가 길모퉁이에서 구걸하는 저 늙은 거지의 심정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러곤 다시 돌아와 앉더니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넌 정실부인의 여식으로 태어난 고귀한 신분이니 정랑과 허서의 고통을 이해할 수가 없겠지. 정랑은 그저 평범한 농촌의 아낙네였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자 허서를 데리고 도성에 사는 친척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했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정랑과 허서 이 가난한 친척을 나 몰라라 한 게다.
정랑은 여인의 몸으로 도성에서 죽어라 고생을 했지.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는지 모른다. 그러다 가까스로 아버지를 만나게 된 거다. 정랑을 가엽게 여긴 아버지 덕에 그들은 이제야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고, 허서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된 거지.
정랑은 제대로 된 신분도 부여받지 못한 외실에 불과하다. 자기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뿐인 세상 속에서 아버지는 그들의 유일한 버팀목이야. 그들은 그저 잘살고 싶어 할 뿐인데 그게 잘못된 것이냐?
우린 정실부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부귀영화를 누려 왔다. 그리고 첩들을 하인이나 노비로 여기며 억압하고 괴롭혔지. 그런데 그들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는 걸 왜 생각하지 않은 걸까? 그들이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을까?”
엽균은 주묘화에게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외람되지만 소저께서는 서출이십니까? 적출이십니까?”
주묘화의 낯빛이 새파래지더니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저, 저는 서출입니다.”
그러자 엽균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한 말씀만 더 여쭙겠습니다. 아가씨의 어머니도 적모嫡母 앞에서 굽신거리며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지 않습니까?”
그러자 주묘화는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엽균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걸 알고는 이렇게 말했다.
“정실부인과 그 자식들 앞에선 하등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지. 정랑은 심지어 이낭도 아니라 우리 앞에서 비굴하게 굽실거리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봐 가며 우리의 비위를 맞추려고 한다. 오늘 허서가 정랑이 탕을 끓였다고 말한 건 내 비위를 맞춰 내가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저 좀 더 잘살고 싶은 것뿐이야.
나한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그게 잘못된 것이냐? 길가의 소상인이 손님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데 그들이 잘못한 것이냐? 우리가 조금의 호의라도 베풀어 이쪽의 비위를 맞추려는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잘 대해 주면 안 된다는 말이냐?”
마지막 말은 따지는 듯한 투였다.
“연채야, 자신의 입장과 시각으로만 문제를 고려해서는 안 된다.”
엽균은 두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어 갔고, 그의 감정은 점점 더 격양되었다.
“너와 어머니는 너무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전통적 사상과 관념에 속박되어 있어. 그리고 너무 이기적이라 지금껏 자신만 생각해 왔지, 다른 사람은 고려하지 않았어. 다 아버지를 모시는 사람들이다. 그저 신분과 지위만 다를 뿐이지. 그런데 굳이 그들을 이렇게 난처하게 만들어야겠어? 내 말이 틀렸느냐?”
뒤에 서 있던 추길은 그 말을 듣고는 화가 나 뒤로 넘어갈 뻔했다.
“공… 공자께서는 어찌……!”
“그 입 다물거라! 내가 언제 너한테 대답하라고 했느냐!”
엽균이 호통을 치기 무섭게 엽연채도 소리를 쳤다.
“오라버니야말로 그 입 다물어요!”
그러면서 엽연채는 잔을 집어 던졌다. 그 잔이 엽균의 어깨로 날아들자 그가 손으로 잔을 막더니 벌컥 성을 냈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뭐가요! 오라버니 훈계를 열심히 듣고 있었죠.”
엽연채가 웃으며 말했다.
“한창 재미있게 듣고 있었는데요! 방금 전 신분과 지위만 다를 뿐 다 같은 사람인데 굳이 난처하게 만들어야겠냐고 했죠? 그럼 추길이도 같은 사람이고 역시 낳아 주고 길러 준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데 그렇게 큰 소리로 호통을 치면 안 되죠.”
그러자 순간 말문이 막힌 엽균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쟤한테 호통친 적 없다. 도리를 이야기했을 뿐이야.”
“좋아요. 그 도리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해 보세요.”
엽연채는 그의 말에 웃으며 대꾸한 후 추길을 내보냈다.
“그건 그렇고 왜 음식이 나오지 않는 것이냐? 추길아, 가서 재촉 좀 하거라.”
추길은 이를 갈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엽균을 쏘아보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엽균은 어깨에 묻은 찻물을 닦으며 말했다.
“연채야, 너도 서자에게 시집갔으니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 게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 눈을 번쩍이며 다소 자책하는 듯한 투로 말을 이어갔다.
“너도 생각이 트인 게지! 안 그랬으면 길에서 나와 허서와 마주쳤을 때 바로 큰 소리로 나를 꾸짖으며 난리를 부렸겠지.”
엽연채는 입을 씰룩였으나 별말은 하지 않았다.
“사람이라면 입장을 바꿔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전통적인 사상과 관념에 얽매이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엽균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자 엽연채가 하하 웃으며 동조했다.
“오라버니 말씀이 다 맞아요.”
엽균은 그녀가 아직도 받아들이지는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도 이렇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한 모습으로 마주 앉아 자신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보며 전보다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도 생각이 좀 트인 게로구나.”
이때 점원이 음식을 들고 들어왔다. 내 온 음식은 찬 다섯 개에 탕 하나였다. 엽균은 엽연채에게 탕을 떠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권했다.
“연채야, 이 탕 좀 먹어 보렴.”
“네.”
엽연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듣자 하니 허 공자가 모시는 스승이 그 유명한 요 선생이라면서요. 아버지는 그렇게 좋은 스승을 왜 오라버니께는 소개해 주지 않는 거래요? 편애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