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엽연채 일행은 남쪽 거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걸어가던 허서와 엽균은 엽연채 뒤에서 한 아가씨가 자신들을 따라오고 있는 걸 발견했다.
엽균이 먼저 물었다.
“연채야, 이 아가씨는 누구시냐?”
“제 시누이인 주씨 가문 둘째 아가씨입니다. 오늘 저와 함께 외출했어요.”
엽연채가 소개하자 주묘화가 붉어진 얼굴로 그를 흘끗 쳐다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엽 공자님.”
“아, 안녕하세요.”
엽균이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으며 답례했다.
“안녕하세요, 허 공자님.”
주묘화는 엽연채가 허서를 싫어한다는 걸 눈치챘지만, 그래도 예의상 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하하, 안녕하세요.”
허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그들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청묵재가 눈에 들어왔다. 허서는 엽연채와 추길이 계속해서 위자를 눈여겨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그는 인파로 북적이는 청묵재로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몸으로 엽연채와 추길을 막아서며 그들의 시선을 가렸고 위자는 이 틈을 타 몰래 달아나 버렸다.
“엥? 그 시동이 안 보이는데요?”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주위를 살폈다.
“청묵재 안으로 들어갔어.”
허서의 대꾸에 엽균은 그런 모양이라고 넘겼다.
“우리도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그러나 엽연채는 그리할 생각이 전연 없었다.
“그러지 말고 그 시동을 찾으러 가요. 그 시동은 분명…….”
“찾아서 뭐 하려고? 응?”
허서가 두 눈을 가볍게 슴벅거리며 묻자 엽연채는 어두워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뜻대로 되자 허서는 득의양양했다.
그는 어머니가 탕을 끓여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엽연채가 눈치챘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이 아가씨는 훗날을 위해 한 발짝 물러서고 적의 내부로 들어와 자신의 오라버니부터 천천히 끄집어내려는 속셈이었다.
“형님, 연채가 왜 이러는 겁니까?”
허서가 웃으며 말했다.
“왜 계속 제 시동을 찾으려는 걸까요?”
“연채야, 왜 그러느냐?”
엽균도 미심쩍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엽연채는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물건을 사러 가죠!”
이에 만족한 허서가 웃으며 앞장섰다. 일행은 청묵재 안으로 들어갔고, 허서는 붓과 먹을 고른 후 선지宣紙도 골랐다.
“다 산 거예요? 붓과 먹만 살 건 아니겠죠?”
엽연채가 말했다.
“마침 집에 종이도 다 떨어졌어.”
허서는 점잖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연채, 너 시간이 급한가 보구나?”
너야 당연히 서둘러 송화 골목으로 가고 싶겠지. 그래야 우리 어머니가 탕을 준비하지 못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몰아갈 수 있다고 여기고 있을 테니까.
“천천히 고르자. 난 벼루도 사야 된단다.”
엽균이 끼어들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진열대에서 흑옥으로 만든 벼루를 꺼냈다. 그러자 허서가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형님, 이건 별로예요. 벼루를 사실 거면 보묵방寶墨坊에 가서 사시죠. 그곳 벼루가 품질이 아주 그만입니다. 어제 그곳을 지나가다가 새로운 벼루가 나온 걸 보았는데 아직 시간이 이르니 가서 한번 보시는 게 어때요?”
“그러자꾸나.”
엽균이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
허서가 엽연채를 슬쩍 쳐다보니 그녀는 차가운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의 눈에 웃음이 어렸다.
‘그래. 포기했구나!’
그들은 청묵재 밖으로 나와 보묵방으로 가서 반 시진이나 물건을 구경했다. 그리고 마침내 엽균은 마음에 드는 벼루 하나를 골랐다. 그는 학문에는 흥미가 없었지만, 사람이 살면서 글자는 써야 하니 나온 김에 좋은 벼루를 하나 골랐던 것이다.
“이제 송화 골목으로 가자꾸나!”
엽균이 말했다.
보묵방은 송화 골목에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지역이라, 일각을 걸어가니 송화 골목에 도착했다.
작은 집의 문 앞에 선 엽연채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푸른 벽돌과 검은 기와로 지어진 아담한 이진원二進院(‘口’ 자 형 전통 주택인 사합원四合院은 그 규모에 따라 일진원, 이진원, 삼진원 식으로 부름)으로, 어딘지 독특한 분위기를 풍겼다. 붉게 칠해진 문 앞에는 ‘영존거永存居’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었다.
허서가 일행을 이끌고 집 안으로 들어서자 회색 옷을 입은 어멈이 허서를 보고는 안쪽을 향해 외쳤다.
“마님, 공자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큰공자님도 함께 오셨어요!”
그렇게 외치던 어멈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엽균 뒤에서 걸어 나오는 두 아가씨와 여종 하나를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녀는 엽연채의 용모에 깜짝 놀랐다. 그녀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이분들은……?”
“진 마마, 이쪽은 내 누이동생 연채야. 이쪽은 주씨 가문 아가씨이시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함께 오게 됐어.”
엽균이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차례로 소개해 주었다. 그가 ‘진 마마’라며 어멈을 친근하게 부르자(* 원문에선 ‘진 마’라며 ‘마마’를 ‘마’ 한 글자로 줄여서 부름.) 엽연채의 눈에선 비웃는 기색이 비쳤다.
‘어머니를 곁에서 모시는 채 마마의 성이 채씨인 것은 기억하려나!’
엽균의 소개에 진 마마의 표정이 한층 굳었다. 이 사람은 정안후부 정실부인 쪽 사람이 분명했다. 그녀는 정실부인과 정랑이 물과 기름의 관계인 걸 알고 있었다.
“내 누이동생이 정랑을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어!”
엽균이 진 마마에게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그래도 안심할 수 없었던 진 마마는 당장에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녀가 낭하에 도착하자 본채의 발이 걷히더니 안에서 삼십 대로 보이는 갸름한 얼굴의 부인이 걸어 나왔다.
엽연채는 그 부인의 모습을 보고는 순간 멍해졌다. 그녀는 엽승덕의 몸과 마음을 전부 차지해 버린 여인이 분명 따뜻하고 다정하며, 현명하고 정숙하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해 왔다. 한데 마침내 보게 된 은정랑은… 충분히 아름답긴 했으나 엽연채가 상상했던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조그맣고 갸름한 얼굴에 버들잎 모양의 고운 눈썹을 가지고 있었으나, 눈매가 요염했고 키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몸매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꽤 곱상하게 생긴 편이었다. 하지만 엽연채의 어머니보다 미모가 뛰어난 건 절대 아니었다.
“서가 왔구나. 균이 공자님도 함께 오셨군요.”
은정랑이 낭하에 서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곤 엽연채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알은체했다.
“이분은… 큰아가씨이시군요!”
“날 안단 말입니까?”
엽연채는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알아보는지 알 수 없었다.
“뵌 적이 있습니다.”
은정랑이 어색함과 당황스러움이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승덕 나리의 여식분…….”
그러고는 무슨 말을 더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엽균은 난처해하는 은정랑의 모습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정랑, 내 누이동생이 정랑이 만든 탕을 먹고 싶다고 했어요.”
“아……! 그럼 어서 가서 만들어 오겠습니다.”
정랑은 놀랍고도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 끓여 놓은 것 아니었나요?”
엽연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 공자가 정랑이 오라버니가 오길 손꼽아 기다리며 매일같이 산약배골탕을 끓인다고 했는데!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정랑이 탕을 끓이는 모습을 봤다고도요.”
은정랑의 얼굴이 단박에 굳어졌으나, 엽연채는 개의치 않고 쐐기를 박았다.
“설마 허 공자가 우리 오라버니를 속인 건 아니겠죠?”
그러자 엽균도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안 끓여… 놨다고요?”
허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분명 위자에게 집으로 돌아가서 어머니께 탕을 준비해 놓으라고 전달하라고 했는데 어째서 아직도 탕이 준비되지 않았단 말인가.
엽연채의 눈빛에 냉소가 어렸다.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달하는 걸 너만 할 수 있는 줄 아나 보지? 이쪽이라고 왜 못 하겠어?’
위자가 자리를 뜨자 추길도 따라서 자리를 떴고, 그녀는 노점 앞에서 건장한 장골들을 모아 돈을 쥐여 주며, 그들에게 위자를 쫓아가 흠씬 두들겨 패라고 시켰던 것이다.
엽균은 미간을 구겼고, 은정랑도 눈살을 찌푸리며 영문을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엽균이 기다렸다는 듯 그 말에 답했다.
“내가 길에서 우연히 허서를 만났는데 정랑이 날 위해 산약배골탕을 끓여 놓았으니 와서 드시라고 했다더군요!”
“오늘은 탕을 끓이지 않았어요.”
은정랑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허서를 쏘아보며 말했다.
“넌 어째서 큰형님을 속인 것이냐?”
허서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은정랑이 이어서 말했다.
“어제 제가 탕을 끓이면서 정말 맛있게 끓여졌는데 균이 공자님이 드시러 오지 않아 안타깝다고 했죠. 제가 정성을 쏟아 탕을 끓이는 모습을 보고는 이 아이가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균이 공자님을 데려와 저를 기쁘게 해 주려고 했나 보네요.”
허서는 입술을 오므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가 금방 가서 탕을 끓여 올게요.”
은정랑이 작은 목소리로 덧붙이더니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엽균은 엽연채를 쳐다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연채야, 뭐가 먹고 싶니?”
긴장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던 엽연채가 시선을 살짝 돌리고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됐어요. 배가 고파서 기다리고 싶지는 않거든요.”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주묘화를 쳐다보며 말했다.
“둘째 아가씨, 우리 밖에 나가서 먹어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주묘화가 이 상황에서 감히 뭐라고 말을 하겠는가.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나섰다.
“그래요, 새언니.”
엽연채는 엽균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먼저 가 볼게요.”
그녀는 그대로 돌아서더니 주묘화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주방에 있던 은정랑이 밖으로 나오더니,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낭하에 서서 엽연채가 떠나가는 모습을 쳐다봤다. 조심스러워하는 은정랑을 쳐다보던 엽균이 미간을 찌푸리곤 엽연채의 뒤를 쫓아갔다.
“연채야, 기다리거라!”
엽연채는 ‘하’ 하고 한숨을 짓더니 더욱 차가운 표정을 지으며 마저 걸음을 옮겼다. 그녀와 주묘화가 집 밖을 나서자, 엽균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