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엽승덕은 그 말에 웃으며 거절했다.
“아버지께서는 이런 그림을 많이 가지고 계시오! 그리고 내가 허서에게 마음을 쓰는 건 당연한 일이라오.”
그러자 안에 있는 사람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 아이는 나리의 자식도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신경 써 주시면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럼 엽균 공자님께 가져다드리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엽승덕은 이리 대꾸했다.
“균이가 뭘 안다고. 그 아이에게 가져다주면 그림이 제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지. 허서가 내 친자식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소. 당신 자식이면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요.”
안에 있던 사람은 순간 말을 잇지 못하더니 이내 눈물 섞인 목소리로 울먹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신경 쓰잖아요. 심지어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째서 나리께서는…….”
그러자 엽승덕은 앞으로 다가서서 그 사람을 끌어안았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을 해 본 적 없어 그러는 것이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모하면 그 사람의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있소. 그 사람의 용모가 곱든 추하든,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말이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 당시 나이도 어리고 담도 작았던 엽연채는 화가 나 그대로 돌아서서 뛰어가 버렸다.
그러니 허서는 은정랑과 세상을 뜬 그녀의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그런데도 엽승덕은 허서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좋은 건 그에게 주려고 했고 그를 위해 친자식을 해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야만 은정랑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진정으로 증명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연채야…….”
엽연채를 본 엽균은 표정이 굳어 버렸다. 그는 애써 표정을 감추곤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허서를 자신의 뒤로 감췄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정랑과 허서를 지독히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이 허서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허서를 뒤로 감춘 후에야 그는 누이동생이 허서를 못 알아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은 당황한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그를 뒤로 숨겼던 것이다.
그런데 엽연채가 눈알을 굴리더니 허서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그분은 누구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엽균은 순간 당황했다.
“이 사람은…….”
한편, 허서는 그녀의 눈길에 온몸이 나른해졌다. 엽연채를 처음 봤을 때 그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깜짝 놀랐다. 이후 몇 번 더 그녀를 보기는 했으나 매번 멀찍이 떨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바로 눈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엽연채가 눈을 굴리자 그 생동감 넘치는 모습에 허서의 마음이 크게 요동쳤다. 마치 선명한 빛깔을 뽐내는 아리따운 꽃이 짙은 꽃내음을 풍기는 것만 같았다.
“소생은 허서라고 합니다.”
허서가 점잖고 예의 바르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렇군요.”
엽연채가 담담한 어조로 대꾸하더니 다시 엽균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허 공자와는 어떤 사이예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아마 함께 수학하는 학우인지를 물어봤겠지만, 엽연채는 그런 질문 대신 이런 애매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가 실토하도록 유도했다. 엽균은 입은 벌렸지만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아 우물거리기만 했다.
“허, 허 공자는…….”
허서는 눈알을 살짝 굴렸다. 그는 엽연채가 고의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자신이 호기심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훔쳐본 것처럼, 상대방 또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허서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고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동생, 내 어머니는 송화 골목에 살고 계신 은정랑이다.”
그 말에 낯빛이 확 변한 엽균이 엽연채를 쳐다보자 그녀는 비웃듯 입꼬리를 쓱 올리며 말했다.
“아, 그쪽이 바로 아버지 외실이 달고 온 의붓자식이었군!”
엽연채의 말에는 ‘외실’, ‘달고 온’이라는 뾰족한 가시가 박혀 있었다. 듣기 거북할 정도로 노골적인 표현이었다.
허서는 모욕감에 안색이 어두워졌고, 정랑과 허서가 모욕당하는 걸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엽균은 호통을 쳤다.
“연채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그러자 엽연채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오라버니, 제가 뭘 잘못 말했습니까?”
“그건…….”
엽균의 표정이 한층 굳어졌다. 그는 엽연채가 은정랑 모자를 외실과 외실이 달고 온 의붓자식으로 부르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은정랑이 외실이 아니라 하면 더욱 문제가 커졌다. 그럼 그녀는 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 사내와 잠자리를 갖는 창기娼妓(몸을 파는 기녀)나 사창私娼(관청의 허가 없이 비밀리에 매음하는 매춘부)이란 말인가?
엽균은 엽연채의 물음에 말문이 콱 막혔고, 화를 꾹꾹 누르느라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연채야, 네 말이 틀리지 않았다.”
허서가 이를 꽉 물고 웃으며 말했다.
‘이 여인은 고의로 이러는 것이다!’
과연 엽연채의 눈빛에는 교활함이 가득했고, 얇고 부드러운 입술에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녀는 보는 이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허서는 분하지만 그녀의 지금 이 모습이 더욱 눈부셔 보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는 엽연채를 침상 위에서 마구 괴롭혀 주겠다고 다짐했다.
“네.”
엽연채는 그렇게 말하고선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흘겨봤다. 허서의 음흉한 눈길에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엽균은 엽연채가 악을 쓰며 소란을 피우지 않자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는 누이동생이나 어머니가 눈앞에 있는 자가 정랑의 자식이라는 걸 알게 되면 사달이 벌어지리라고 믿었다. 그 자리에서 욕지거리를 퍼붓지는 않더라도 어두운 표정으로 당장 허서를 보낸 후 자신을 집으로 끌고 가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어떻게 그 모자와 함께 있을 수 있냐며 심하게 나무랄 것이라고 상상했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엽연채가 이렇게 뜨뜻미지근하게 대답하니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누이동생을 너무 나쁘게 봤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머쓱하기도 했다.
“그보다 방금 전 탕을 먹으러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엽연채가 웃으며 대화의 흐름을 바꾸었다.
“그, 그래…….”
엽균은 조금 전보다 더욱 난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허서와 같이 있는 장면을 들키긴 했으나 이건 우연히 마주쳤을 뿐이라고 둘러대면 됐다. 하지만 송화 골목으로 탕을 먹으러 간다고 말하면… 어머니와 누이동생에게 맞아 죽지 않을까 고민했다.
“탕을 먹으러 가는 거면 저도 같이 가요.”
엽연채의 갑작스러운 말에 엽균과 허서 모두 깜짝 놀랐다.
“뭐, 뭐라고?”
엽균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요? 오라버니도 가는데 저는 왜 가면 안 돼요?”
엽연채가 새까만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했다.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저도 같이 가요!”
엽연채는 깔깔거리며 웃었다.
엽균은 그녀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꽃처럼 활짝 웃으며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자 ‘시집을 가더니 도량이 넓어진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그는 떠보듯 물었다.
“정랑이 탕을 참 맛있게 끓인단다. 어머니는 무슨 탕을 좋아하시더라……. 네가 가서 한번 여쭤 보렴. 나중에 정랑이 정안후부로 들, 들어오면 어머니께 맛있는 탕을 끓여 드리게.”
엽연채는 속으로 엽균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부으며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무슨 탕을 좋아하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엽균이 지금 자신을 떠보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좋아요! 이따가 어머니께 여쭤 볼게요. 나중에 정랑이 정안후부로 들어오면 어머니를 잘 보필해야 하니 미리 연습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이 말은 엽연채가 온씨를 대신해 정랑이 정안후부로 들어와 이낭이 되는 걸 허락했다는 뜻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엽균은 기쁜 나머지 이 모든 게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누이동생이 자신들 편에 서다니, 누이동생이 이렇게 나오면 어머니가 정랑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과정이 한결 수월해질 것이었다.
기뻐하는 엽균의 얼굴을 쳐다보는 엽연채의 눈빛에 비웃는 기색이 언뜻 비쳤다.
‘네가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어도 상대방이 네 호의를 받아들여야 가능한 거란다! 이낭? 엽승덕이 받아들일지 말지는 생각도 안 하지?’
“허서야.”
엽균은 고개를 돌리더니 기쁘고 안심이 된다는 얼굴로 허서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허서는 눈꺼풀을 떨며 헛웃음을 지었다.
“하하.”
“탕을 먹으러 가자꾸나. 오늘 너에게 정랑의 음식 솜씨를 맛보게 해 주마.”
엽균이 웃으며 말했다.
“허서야, 가자!”
허서는 표정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가긴 뭘 간다는 말인가?’
집에서는 엽균이 가장 좋아하는 배골산약탕을 끓인 적이 없었다. 자신이 아까 어머니가 매일같이 탕을 끓여 놓는다고 말한 건 엽균에 대한 그녀의 정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었다.
허서는 일단 엽균에게 탕 이야기를 꺼낸 후 그가 응하면 몰래 시동을 집으로 돌려보내 어머니께 탕을 준비하시라고 전할 생각이었다. 그다음 자신이 엽균을 데리고 물건을 좀 사다가 집으로 돌아가면 탕이 준비되어 있을 테니, 완벽한 계획이었다.
허서가 ‘하하’ 하고 웃으며 말했다.
“예.”
허서의 시동은 알겠다고 대답하는 허서를 보더니 눈알을 대굴대굴 굴리다가 몸을 돌렸다. 송화 골목으로 가서 은정랑에게 탕을 끓여야 한다고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한데 엽연채가 그를 불러 세웠다.
“어머, 얘, 넌 어디 가는 거니?”
그 소리를 들은 엽균이 허서의 시동을 쳐다보며 말했다.
“위자야, 어디 가는 게냐?”
“그게…….”
위자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더니 이내 웃으며 말했다.
“공자님께서 쓰실 붓과 먹을 사러 갑니다.”
“어디 가서 사려고?”
엽연채가 물었다.
“그게… 청묵재青墨齋로 가려고요.”
위자의 대답에 엽연채가 반색했다.
“나도 마침 살 게 있단다. 오라버니, 함께 사러 가지 않으실래요?”
“그러자꾸나.”
기분이 좋은 엽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위자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리자 허서가 그에게 눈짓을 한 뒤 말했다.
“좋아요. 함께 갑시다!”
위자는 잠시 후 기회를 봐서 몰래 빠져나가라는 허서의 뜻을 알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