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온씨가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일각이 흘렀다. 염교가 숨을 헐떡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안색이 말이 아니었다. 온씨는 그녀의 낯빛을 보더니 깜짝 놀라 물었다.
“안색이 왜 그러느냐?”
“저, 정말로 알아냈습니다!”
염교가 창백한 얼굴로 급히 말을 이어갔다.
“마차를 몬 사람이 다행히 주씨 가문 마부였습니다. 제가 공자님과 아가씨가 어떻게 지내고 있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 마부가 웃으면서 하는 말이 도도하고 거만한 아가씨가 공자를 쫓아내는 바람에 공자께서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신다고 합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온씨는 대경실색하여 물었으나 사실은 이미 어렴풋이나마 눈치챈 부분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그 마부가 주씨 가문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염교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야기를 마저 전했다.
“공자님이 원래 궁명헌에서 지내셨는데, 아가씨가 들어오시더니 공자님을 옆에 있는 뜰로 쫓아내셨다고 했어요. 함께 식사는 하지만 밤에 공자님이 들어와 자는 걸 허락하지 않으신다고 해요.
다들 아가씨가 신혼 첫날밤 원치 않는 동침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주씨 가문에 몸을 의탁하고 있을 뿐이며, 겉으로는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얼마나 공자님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라고 말하고 있대요.”
“그럴 리가 없다!”
온씨는 즉시 그 말을 부정했다.
“연채가 정말로 그날 밤 그런 일을 겪었다면 내가 주씨 가문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했을 때 그 아이가 말을 안 했을 리가 없다. 가서 연채를 불러오너라.”
그 말에 염교는 즉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엽연채가 돌아왔다.
“어머니, 부르셨어요? 그러잖아도 시간이 늦어 이만 가 보겠다고 인사드리려는 참이었는데.”
온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가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너랑 남편이 따로 잔다고 하더구나. 거기다 네가 남편을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던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엽연채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 일이 언젠가는 온씨의 귀에 들어갈 줄 알았기에 미리 적당한 대답을 준비해 놨었다.
“그 사람이 좀 이상한 게, 다른 사람이랑 한 침상에서 잠을 못 자더라고요.”
온씨는 어안이 벙벙했으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럼 너희들… 잠자리는 했느냐?”
그 말에 귀가 살짝 붉어진 엽연채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어머니가 걱정할까 봐 작은 목소리로 이 말을 덧붙였다.
“가끔은 함께 자기도 해요……. 부부 사이의 일인데 남들이 뭘 알겠어요.”
온씨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엽연채의 배로 향했다. 그러자 엽연채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어머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는 절대로 생겨서는 안 되었다!
다행히 온씨가 화제를 돌렸다.
“나는 네가 주씨 가문으로 시집가는 게 널 욕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만… 그래도 장박원에게 시집간 것보단 낫구나. 그 녀석에게 시집가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장박원 그 녀석은 성품에 문제가 있어!”
엽연채는 그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운환 그 아이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더구나. 적어도 그 외모면 내 체면이 서지 않겠느냐!”
온씨가 주운환을 칭찬했다. 앞으로 사람들이 연채가 몰락한 서자에게 시집갔다고 비웃으면 적어도 자신의 사위가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생겼다고 받아칠 수 있었다.
“운환이랑 잘 지내거라. 자식도 한둘 낳고. 나중에 분가하면 네가 가지고 간 혼수로 풍족하게 살 수 있을 게다.”
온씨의 충고에 엽연채는 뒤가 켕겼다. 좀 있으면 그와 헤어질 텐데, 그때 어머니가 얼마나 화를 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님, 아가씨. 주인나리께서 부르십니다.”
그때 밖에서 염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께서 우릴 부르신다고?”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예.”
“가자꾸나!”
온씨도 의아했으나 일단은 자리를 떨쳤다. 엽학문이 이쪽을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눈 적은 손에 꼽았다.
‘더군다나 지금 할아버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엽이채인데, 우리 모녀와 무슨 할 이야기가 있다는 걸까?’
엽연채와 온씨가 방에서 나가자 염교가 다시 알려 왔다.
“나리께서는 지금 바깥뜰에 있는 서재에 계십니다.”
엽연채는 알겠다고 답했다. 그럼 지금쯤 분명 묘씨가 안녕당에서 장박원과 주운환을 대접하고 있을 것이었다.
온씨 모녀가 바깥뜰에 있는 서재에 당도하니 엽학문은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앉거라!”
엽학문의 말에 온씨 모녀가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엽학문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라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운환이가 참 괜찮은 아이더구나, 용모도 준수하고. 안 그렇더냐?”
그 말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예.”
온씨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어쨌든 대답은 대답이니 엽학문이 가슴 벅차오르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전에 운환이를 봤을 때 나는 그 아이가 연채와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아이는 이채와 혼약을 맺게 되었었지. 그런데 네 혼례식 날 박원이가 이채와 혼약을 맺겠다며 그 소동을 벌이는 걸 보며 난 이게 하늘의 뜻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널 주씨 가문으로 보낸 거고.”
엽연채는 기가 막혔다. 다 지난 일인데 왜 또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엽학문은 자신이 손녀를 불구덩이로 밀어넣은 것이 아니라 주운환과 엽연채가 잘 어울리는 한 쌍이기 때문에 그리 했다는 말이 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이 늙은이는 염치도 없나 보네? 아니지, 염치를 따지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이렇게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을 테지!’
애초에 그는 주운환이 키가 큰지 작은지, 뚱뚱한지 말랐는지 아무것도 모르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 와서 주운환이 잘생겼으니 자신이 꽤나 현명한 선택을 했다는 듯이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다.
기똥찬 변명에 엽연채는 그저 어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저러니 진사 출신에 성적도 장찬보다 한 등수 높았는데도 여태 서적이나 관리하고 있지. 공부만 잘하면 뭐 하나, 머리가 저 모양 저 꼴인데!’
온씨 역시 얼토당토않은 엽학문의 말에 울화가 치밀었지만, 그가 저런 핑계를 대며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것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일단 저리해 두면 엽학문은 엽연채를 볼 면목이 서니 나중에 엽연채가 주씨 가문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면 그가 앞에 나서 줄 것이었다.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동조했다.
“그런 것이었군요. 저도 사위가 마음에 듭니다.”
엽학문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명을 하고 나니 스스로 좋은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어제 백성들이 했던 칭송을 들어도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싶어 뿌듯하기도 했다.
* * *
온씨 모녀가 서재에서 나와 안녕당에 당도했을 무렵 엽이채와 손씨도 마침 안녕당으로 돌아왔다. 주운환 내외와 장박원 내외는 묘씨, 나씨 등과 작별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올라 정안후부를 떠났다.
마차 안. 엽이채는 고개를 숙인 채 손수건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선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 이채야……. 울지 말거라.”
장박원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녀를 위로했다.
“제가 귀한 사람이 아니라… 저에게 반찬을 집어 주는 것조차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하신 거죠…….”
엽이채는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마치 배꽃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모습인지라 처연미가 넘쳐흘렀다.
장박원은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혼인 전에는 엽이채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으면 지위와 명예를 전부 잃는다 하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아내로 맞이하고 나니 명예가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흑, 흑흑… 역시 제가 부끄러우신 거죠……. 흑흑…….”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엽이채는 조금 전보다 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장박원은 눈물 흘리는 그녀의 아리따운 모습을 보자 순간 마음이 아려와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네가 부끄러울 리 있더냐. 그저… 그 서자 놈 때문에 화가 나 그런 것이다.”
엽이채가 그의 위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쏟아내자 장박원은 거듭해서 그녀에게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장박원이 자신을 달래느라 진이 다 빠질 때쯤에야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엽이채는 조그만 입을 삐죽거리더니 훌쩍거리며 말했다.
“이번만, 이번만 용서해 줄게요. 흑, 앞으로 또 저를 홀대하면 그땐, 그땐… 저도 부군을 상대하지 않을 거예요.”
“안 그럴 거다! 절대로 안 그럴 거야.”
장박원은 ‘후’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창 좋을 신혼인지라 엽이채가 눈물을 그치고 웃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입맞춤을 했다. 우쭐해진 엽이채는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오늘 체면이 좀 구겨지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어제 그런 소동이 벌어졌으니 장씨 가문에서 자신을 집안으로 들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무 탈 없이 장씨 가문으로 들어가 웃어른들께 인사를 드리고 신방으로 보내지리라곤,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혼수 사건이 밖으로 퍼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신방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사실 신방 안에서도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모른다. 혼수 사건이 퍼져 장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쫓아낼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갑자기 안으로 사람이 들어왔다.
엽이채는 영락없이 장씨 가문 사람들이 자신을 쫓아내러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장박원이 이렇게 빨리 올 리가 없었다. 엽이채가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며 머리에 덮어쓴 붉은 수건 너머로 쳐다보니 구름 문양이 수놓인 분홍색 치맛자락이 보였다. 그 사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널 쫓아내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니.”
엽이채는 맹씨의 목소리임을 알아채고는 긴장과 공포에 휩싸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무릎 위에 올려놓은 두 손으로 금색 봉황이 수놓아진 혼례복을 꽉 쥐었다. 그렇게 그녀가 숨죽이고 있는 사이 맹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그녀를 쏘아붙였다.
“혼수 일은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어떻게 그런 어리석은 짓을 벌일 수가 있느냐!”
맹씨가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을 치자 엽이채는 깜짝 놀라 몸을 떨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