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주운환은 다시 엽연채에게 청반압사를 집어 주었다. 엽이채는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보며 밥 한술을 떠 넣었지만 밥에선 쓰디쓴 맛만 느껴질 뿐이었다. 억울하고 또 억울한 나머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러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힌 채 장박원을 응시했다.
주운환은 자신이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조롱했다. 그러니 엽이채는 더더욱 장박원이 자신에게 반찬을 집어 주며 이쪽 또한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장박원은 그녀를 사랑하긴 해도, 체면을 버려 가면서 그녀에게 반찬을 집어 줄 수는 없었다. 그리하면 스스로 뺨을 때리는 꼴이 되어 버리는 셈이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생각을 품은 채 밥을 먹었다.
잠시 후, 하인들은 먹다 남은 밥과 반찬을 치우더니 소식탕消食湯(소화를 돕는 탕)을 내왔다. 장박원은 두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방금 전 밥상 앞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먼저 가겠다고 이야기를 꺼내면 기가 꺾인 것처럼,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자리를 지켰다.
그런데 엽승덕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이제 사월이구나. 과거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박원아, 이번에 시험을 칠 것이냐?”
학문 이야기가 나오자 장박원은 두 눈을 반짝였다. 순간 그는 체면이 한껏 살아 허리를 곧추세웠다. 어쨌든 그는 유명한 소년수재로 도성 5대 재자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 그래야죠! 올해는 반드시 칠 것입니다. 작년에는 할아버지께서 말리시는 바람에 시험을 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제가 아직 나이가 어린데 만약에 합격하기라도 하면 재능을 믿고 교만해져 향후 벼슬길에 나가서도 득이 될 게 없다고 하셨어요. 그러니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다른 학우들과 발을 맞춰 천천히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흥… 그 늙은…….”
엽학문은 평상시처럼 장찬 그 늙은이를 욕하려다가 장박원이 자리하고 있는지라 하던 말을 멈추고 이렇게 대꾸했다.
“네 할아버지께서 이번에는 옳은 말을 하셨구나.”
엽학문은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을 가장 좋아했다. 그는 공훈이 있는 귀족이지만, 과거에 급제한 진사 출신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이 장찬보다 능력이 뛰어나지만 그처럼 낯가죽이 두껍지 않아 남에게 아첨을 못해 지금껏 서적을 관리하는 한직에 머물러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자연히 글공부에 재주가 없는 자신의 세 아들이 못마땅해 죽을 것 같았다.
그나마 기댈 손자 둘이 있다지만, 하나는 허송세월하는 한량이고 다른 하나는 하루 종일 콧물과 침이나 흘리고 다니는 바보니, 정말 이보다 더 창피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자신에겐 장박원같이 글공부에 재주가 있는 손자가 없단 말인가.
엽승덕은 못마땅해하는 엽학문을 쳐다보며 두 눈을 살짝 끔뻑였다. 그러더니 주운환을 쳐다보며 물었다.
“듣자 하니 주씨 가문도 글공부를 한다던데, 우리 사위도 올해 시험을 치나?”
그 말에 엽연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저것도 친아버지라고!’
모두 장박원이 소년수재인 것을 똑똑히 알고 있으니 엽승덕은 일부러 학문 이야기를 꺼낸 것이 분명했다. 장박원의 난처한 상황을 해결해 주고 그를 추켜세워 주기 위해서. 그것으로도 성에 안 찼는지 이젠 주운환을 끌어들여 짓뭉개려고 했다.
주운환은 담담히 답했다.
“그저 글자를 익히고 도리를 배운 수준입니다.”
그 말인즉슨 학문을 제대로 익힌 게 아니라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엽승덕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우리 사위가 너무 겸손하네. 글공부를 했으면 과거 시험을 치는 게 순리이지. 올해 참가해서 박원이랑 한번 겨뤄 보지 그러나.”
주운환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흘겨봤다.
‘이 사람이 엽연채의 아버지라고 했는데 정말 친아버지가 맞나?’
그러나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응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깜짝 놀랐다.
‘어째서 그러겠다고 대답한 거지?’
분명 전에 글공부는 그저 아버지의 비위를 맞춰드리려고 하는 거라고 했다. 거기다 무장 가문이 무슨 글공부냐며 비웃기까지 했다.
온씨는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마치 심장이 조금씩 도려내지는 느낌이었다. 사위가 글공부를 어찌했는지는 모르지만 장박원이 소년수재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일부러 장박원에게 유리한 주제를 꺼내다니!
‘이 원수 같은 놈!’
과연 지난번 연채의 혼수를 받아 내기 위해 늘어놓은 말들은 전부 다 새빨간 거짓인 모양이었다. 온씨의 마음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사람들이 소식탕을 다 마시자 엽학문은 그만 돌아가 보라고 사람들을 물렸다. 손씨는 할 이야기가 있다며 엽이채를 데리고 돌아갔고, 온씨 또한 엽연채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그녀를 데리고 갔다. 주운환과 장박원은 안녕당에 남아 엽학문과 차를 마셨다.
* * *
영귀원. 온씨와 엽연채가 귀비탑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새언니! 새언니!”
“영교 아가씨께서 수다를 떨러 오셨나 보네!”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엽영교는 그새 안으로 들어와 앞에 놓인 수돈에 앉더니 씩씩거리며 말했다.
“와, 연채, 너 꽃같이 아름다운 부군을 그렇게 꽁꽁 숨겨 두다니! 우리가 빼앗아 가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거야?”
그 말에 엽연채가 ‘풉’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하마터면 입에 든 차를 뿜어낼 뻔했다.
‘꽃같이 아름답다고? 아니, 그건 표현이 좀…….’
“누가 아니래요!”
온씨가 엽연채를 나무라듯 그녀를 흘겨보며 그 말에 동조했다.
“네가 몇 번이나 데려오지 않겠다고 하기에 나는 네가 흉물스러운 추남에게 시집간 줄 알았잖니!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매일 밤 악몽을 꾸었단 말이다.”
그들의 반응에 엽연채는 겸연쩍어했다.
‘이게 그렇게 심각한 일인가?’
엽연채가 대꾸할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온씨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 잘생긴 사람을 어째서 빨리 데려오지 않은 게냐? 그랬으면 나도 마음을 푹 놓았을 텐데.”
엽연채는 혼자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 저 삐뚤어진 성격 때문 아니겠는가? 모반을 꾀하는 일로 매일 정신이 없는데, 만약 그쪽 일에 차질이 생기면 이 하찮은 목숨도 부지할 수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어디 감히 그를 번거롭게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얼마 안 있으면 그와 합의하에 헤어질 텐데, 어머니가 사위를 인정해 버리면 나중에 헤어질 때 또 무슨 소동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연채야, 우리가 묻고 있잖니? 혼자서 뭘 그리 중얼대는 거야?”
엽영교가 손에 든 연꽃 둥글부채로 그녀의 정수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그러자 엽연채가 ‘아얏’ 소리를 내며 머리를 문질렀다.
“아파요!”
“흥, 아픈 줄은 아나 보네!”
엽영교는 입을 삐죽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널 얼마나 걱정하는지는 모르면서.”
엽연채는 어쩔 도리가 없어 그녀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럼… 제가 머리 장신구를 하나 선물로 드리는 건 어때요?”
“너 지금 혼수 많다고 자랑하니? 말 돌리지 마. 너 아직 우리가 물어본 질문에 대답 안 했어. 왜 안 데려왔던 거야?”
엽연채는 고민을 하며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손수건을 빙빙 돌리더니 고개를 들어 궁금증으로 가득한 온씨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곤 한참을 더 생각하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에… 말했잖아요. 그 사람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라…….”
‘그게 수줍어하는 성격이라고?’
온씨와 엽영교는 놀라서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이보다 어이없는 핑곗거리가 또 있을까.
“오늘 본 그 사람은 아무리 봐도 부끄러움을 타는 성격은 아닐 것 같던데? 사람들 말문을 막히게 하는 거 너도 봤잖아!”
“그 사람이… 평소에는 안 그래요. 오늘은 무슨 자극을 받아 그런 건지 모르겠네요.”
엽영교가 타박하는데도 엽연채는 꿋꿋이 자기 주장을 고집했다. 그러나 말을 하면 할수록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엽영교가 다시금 받아치려는 순간 온씨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엽영교가 눈치껏 입을 다물자 온씨는 진지한 표정으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연채야, 이 어미에게는 솔직하게 털어놓아라. 네가 혼인하고 이튿날 친정에 인사 왔을 때 말이다. 어미 앞에서 장박원의 죄를 조목조목 따져 밝히면서 다시 장씨 가문으로 시집가지 않겠다고 했지.
이 어미도 거기에는 동의했지만, 널 주씨 가문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으려고 했다. 방계 아가씨 하나를 너 대신 들여보내려고 했지. 그런데 네가 극구 반대했지……. 사위의 수려한 외모 때문에 그쪽에 시집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거니?”
엽연채는 어이가 없었다.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으셨다.
‘내가 얼굴만 따지는 사람처럼 보이나?’
한편, 온씨는 딸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가 자신의 말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미 시집을 가 버렸으니 말이다.
다만 부부관계를 경험해 본 그녀의 눈에는 딸과 사위가 겉으로는 사이가 좋아 보여도 실제로는 소원할 것처럼 느껴져 내심 걸렸다.
“어머니, 전 이만 미채를 보러 갈게요.”
엽연채는 어머니와 고모가 협심해서 꼬치꼬치 캐묻는 걸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저번에 미채에게 손수건에 새로운 꽃문양을 본떠서 그려 주겠다고 했거든요.”
온씨는 한곳에 오래 붙어 있지 못하는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 보거라!”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엽영교가 바로 자신도 가겠다고 했다.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나서 온씨가 염교를 불렀다.
“오늘 연채가 오던 중에 마차가 고장 나서 밖에서 마차를 빌렸다고 했다. 마차를 몬 사람이 마필을 파는 상점 사람이니, 아니면 주씨 가문 사람이니? 주씨 가문 마부이면 가서 연채 부부가 주씨 가문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어보거라.”
“설령 마차를 몬 사람이 주씨 가문 마부라고 해도 부부간의 일을 마부 한 명에게 묻는다고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러나 걱정이 돼 죽겠구나. 그러니 가서 일단은 물어보거라. 물어서 알아낼 수 있으면 좋은 거고 못 알아내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 봐야지. 가서 은화 좀 꺼내 오거라.”
“마님이 걱정이 너무 많으신 거예요. 제가 보기에는 공자께서 아가씨께 정말 잘하시던데요!”
염교는 웃으며 대꾸했으나, 말과는 달리 쏜살같이 침실로 가서 은화를 꺼내더니 밖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