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그녀의 말에 손씨는 안면 근육을 파르르 떨었다. 그 서자가 장박원과 비교당하는 꼴을 볼 수 없게 되자 영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들이 다투는 모습에 엽학문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했다. 다른 일가친척들이 오지 않은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 우둔한 두 며느리가 굳이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것인지. 어제 창피를 당한 것만으로는 아직 부족하다는 뜻인가? 지금 이곳에는 장씨 가문에서 보낸 두 하인도 있는데 말이다.
묘씨도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는지 미소 띤 얼굴로 장씨 가문의 두 하인을 쳐다보며 말했다.
“공교롭게도 이채의 외숙부 댁은 일이 생겨 오지 못 했다네……. 시집간 내 두 여식도 먼 곳에 살고 있어 어제 오지 못했지. 그래서 아예 간소화해서 큰손녀만 부르기로 했다네.”
묘씨는 이렇게 핑계를 대며 치부를 감추려고 했다.
“예! 알겠습니다.”
두 하인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박원도 이 상황이 못내 어색했던지 헛기침을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시간이 되면 이채와 함께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박원이가 아주 효성이 지극하구나!”
손씨가 호들갑을 떨며 그를 칭찬했다. 그러곤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이채야, 그 머리 장신구는 못 보던 거구나?”
엽이채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진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대신 대답했다.
“오늘 아침 마님께서 차를 권하면서 며느님께 하사하신 첫인사 선물입니다. 저희 마님께서 젊은 시절 가장 좋아하셨던 머리 장신구이지요. 전에 큰아가씨께서 이 장신구가 마음에 드신다며 마님께 달라고 한동안 조르셨는데도 마님은 며느리에게 줄 거라면서 거절하셨어요! 이래서야 마님께서 편애를 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말이 우스워서 엽학문과 묘씨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시어머니가 딸의 편을 들며 며느리를 못살게 굴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할 일이지만,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편을 드는 건 미담이 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자 엽이채가 비단 손수건으로 입술을 살짝 가리며 얌전을 빼더니 부끄러운 듯 말했다.
“제가 아가씨께서 마음에 두고 있던 걸 가지게 된 거네요. 돌아가서 산호와 대모玳瑁(바다거북이의 등딱지)로 만든 제 머리 장신구를 선물로 드려야겠어요.”
이 말로써 자신이 장씨 가문의 일원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엽승신 부부는 기뻐서 이를 다 드러내며 활짝 웃었고, 엽학문과 묘씨도 그 모습을 보며 기뻐해 마지않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니 태양이 점점 높이 솟아올라 어느덧 사시巳時(오전 9시~11시) 삼각이 되었다. 곧 있으면 오시午時가 되는데도 엽연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온씨는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다.
‘오기 싫어서 그러는 걸까? 하기야 오기 싫으면 오지 않아도 되지.’
어차피 오늘 왔어야 했던 다른 일가친척들도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가 빠진대도 문제 될 게 없었다.
그러나 손씨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딸이 환골탈태하여 지체 높은 장씨 가문에서 입지를 굳히며 적장자의 부인이 되었다. 이 모습을 엽연채도 잘 봐 둬야 할 거 아닌가.
“아니, 시간이 이렇게 됐는데 연채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겁니까?”
온씨는 속으로 노여워하며 손씨를 싸늘한 눈빛으로 흘겨봤고 손씨는 그런 그녀의 눈빛을 못 본 척했다. 그러자 엽영교가 입을 열어 상황을 정리했다.
“무슨 일이 생겨서 못 오나 보네요. 둘째 새언니 친정 식구들도 못 오셨고 큰언니와 둘째 언니도 못 왔잖아요. 오늘은 우리 식구끼리 식사해야겠네요. 유월에 어머니 생신이 있으니 그때 작게 축하연을 열어 모두 인사를 나누며 얼굴을 익히는 걸로 해요.”
손씨는 또다시 자신의 친정 식구들이 불참했음을 언급하는 엽영교를 속으로 원망했다. 그러나 다시 엽연채를 들먹이지는 못했다.
묘씨는 슬그머니 엽영교를 꼬집었다. 이제 엽이채는 별 탈 없이 장씨 가문에 들어간 셈이고 엽학문도 장씨 가문에 부탁할 일이 있으니, 묘씨는 엽영교가 둘째 아들 내외에게 밉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묘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밖을 향해 소리쳤다.
“옥향아, 가서 연채가 왔는지 보고 오너라.”
밖에서 알겠다는 대답이 들려오더니 노란 옷을 입은 어린 여종이 뛰어나갔다. 잠시 후, 옥향이라 불리는 그 어린 여종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소인이 방금 전 수화문으로 가 보니 큰아가씨께서 마차에서 내리고 계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손씨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하하하, 드디어 오셨네요.”
“마침 잘 왔구나.”
묘씨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게…….”
그런데 옥향이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큰아가씨와 같이 오신 일행 중에 부군도 계셨습니다.”
“엥?”
손씨가 흥분 가득한 얼굴로 가장 먼저 반응을 보였다.
“정말 천신만고 끝에 조카사위를 보게 되네요! 전 연채가 효심이 지극한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니까요! 저번에 친정으로 인사를 드리러 왔을 때 함께 오지 못했으니 오늘 데려와서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려나 보네요.”
온씨는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제 분명 데려오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어째서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걸까?’
어제도 동행하지 않은 것을 보면 변변치 않은 사람일 게 분명했다. 온씨뿐 아니라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씨는 연민 어린 눈빛으로 온씨를 쳐다보더니 작게 한숨을 지었다.
엽이채는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지더니 저도 모르게 머리에 꽂은 홍옥과 마노로 만든 보요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비웃는 기색이 비쳤다.
‘네 출신이 나보다 고귀하면 뭐 하니? 나보다 아름답게 생겼으면 또 뭐 하니? 우악스럽게 혼수를 다 차지했으면 뭐 하니? 결국 승리를 거머쥔 것은 난데!’
장박원 또한 엽이채처럼 속으로 엽연채에게 경쟁 아닌 경쟁 심리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엽연채에게 아주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엽이채와 잘 지내고 있을 때는 자신들 사이에 끼어 있는 엽연채에게 분개했고, 이후 사랑의 도피를 했을 때는 엽연채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후 엽연채가 엽이채의 혼수를 빼앗아 가 자신들을 곤경에 빠뜨렸을 때는 그녀를 한없이 원망하며 역시 엽이채와 도망가길 잘했다고,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어제 막상 혼례식을 치른 후, 자신과 엽이채처럼 엽연채가 다른 사내와 친밀하게 지낼 것을 떠올리자 왜인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자신과 정혼까지 했던 여인이 이렇게 아무 미련 없이 다른 사내의 품으로 달려가니 장박원은 기분이 영 언짢고 거북했다.
그러니 출신이든 집안이든 재주든 학식이든, 여하튼 모든 부분에서 그 서자를 이겨야만 했다. 물론 용모 또한 그 서자보다 훨씬 뛰어나야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장박원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금박을 입힌 자수가 들어간, 옷깃이 둥근 암홍색 금포와 허리에 두른 옥대, 머리에 쓴 금관 덕에 그의 온몸에서 귀티가 흘러넘쳤다. 게다가 그는 본래 타고난 용모 또한 아주 준수했다. 그야말로 품위가 넘치는 귀공자의 모습이었다.
그는 국화 꽃잎 문양이 새겨진 청자 찻잔을 들어 뚜껑을 열고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우아하고 멋있어 보이는 자세를 취했다.
한편 손씨는 주운환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주렴이 걷어 올려지자 손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이하러 다가갔다.
“아이고, 왔네, 왔어! 드디어 큰아가씨 부군을 보게 되네요.”
그런데 두 발짝도 채 떼기 전에 손씨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버렸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남녀 한 쌍이 손을 맞잡고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오른쪽 소녀는 요염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고, 왼쪽 소년도 수려한 용모를 뽐내고 있었다.
엽연채는 어릴 적부터 출중한 미모로 유명했는데, 사내든 여인이든 그녀 곁에만 서면 그녀가 뿜어내는 광채에 압도되어 초라해 보이기 일쑤였다. 그런데 지금 그녀 곁에 서 있는 이 소년은 그녀가 뿜어내는 빛과 색채에 묻히기는커녕 잘 어우러져 서로를 더욱 아름답게 빛내 주고 있었다.
사람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사이 두 젊은 부부는 엽학문과 묘씨 앞에 섰다.
“할아버지,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오늘 아침 날이 밝자마자 출발했는데 오던 도중 마차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밖에서 마차를 빌리느라 늦고 말았습니다.”
엽연채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경위를 설명했다.
“아, 그랬구나.”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묘씨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시종일관 엽연채 곁에 서 있는 사내에게 꽂혀 있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주운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수한 연청색 비단 도포를 입은 그는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는데, 그 모습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한미한 가문의 서자가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인데도, 그는 긴장한 기색 없이 담담한 모습으로 청렴해 보이는 눈빛과 화려한 외모를 뽐내고 있었다. 평온한 표정에선 고귀함마저 느껴졌다.
그의 기백은 떠들썩했던 방 안을 순식간에 고요하게 만들었다. 마치 수묵단청화水墨丹靑畵의 청신함과 풍아한 운치에 물든 것처럼 말이다.
엽연채는 아리따운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의기양양하게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그녀는 주운환을 데리고 오면 자신의 체면이 크게 서리란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난번에 친정에 인사를 드리러 올 때는 부군께서 일이 있어서 함께 오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이채가 친정으로 인사를 드리러 오니 저도 부군과 일가친척들을 인사시키고자 이렇게 함께 왔습니다.”
엽연채가 주운환의 소매를 당기더니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고 말했다.
“부군, 이분들이 저희 조부모님입니다.”
“할아버님, 할머님. 처음 뵙겠습니다. 주운환이라고 합니다.”
주운환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가 예를 갖추자 엽학문과 묘씨는 왠지 모르게 몸이 경직되어 자세를 꼿꼿이 했다. 엽학문이 ‘아이고’ 하며 인사를 받았다.
“얘야,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된다.”
“이쪽은 어머니와…….”
엽연채는 주운환을 잡아당기며 몸을 돌려 온씨를 쳐다봤다. 부모님을 소개하는 자리니 엽승덕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다른 부부들은 모두 짝을 지어 함께 앉아 있는 반면 엽승덕은 온씨의 맞은편에 놓인 권의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속이 부글거렸지만 지금은 욱해서 성질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주운환을 잡아당기더니 몸을 돌려 엽승덕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런 후에 다시 돌아서서 온씨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