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6화
“아버지.”
장굉과 맹씨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장찬이 날카로운 매의 눈으로 두 사람을 힐끗 훑어봤다.
“밖은 정신없이 바쁘던데 너희들은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신부 맞이 행렬에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장굉이 불안한 눈빛으로 장찬을 쳐다보니 그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버지도 소식을 들으셨을 겁니다.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무슨 결정을 더 내린다는 말이냐? 이제 와서 그 아이를 안 들일 수가 있느냐?”
장찬은 작게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어갔다.
“그 아이를 들이지 않으면 우리를 비웃는 소리만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우리가 더 차릴 체면이라도 아직 남아 있단 말이냐? 그 아이를 들이지 않으면 박원이 꼴이 뭐가 되겠느냐. 게다가 일이 더 시끄러워지면 만만이의 혼사에도 문제가 생긴다!”
딸의 혼사가 언급되자 장굉과 맹씨는 간담이 다 서늘해졌다. 가문의 체면은 구겨져도 괜찮지만 딸의 혼사에 문제가 생겨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장만만은 장씨 가문 적녀로, 삼 개월 후면 열일곱이 되는 다 큰 처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바로 태자의 측비側妃 후보자 중 하나였다. 후보자이기는 하지만 장찬이 엄청 공을 들인 데다, 태자는 물론이고 황후와도 이야기를 해 둔 터라 측비 자리는 장만만이 차지하는 것으로 이미 암암리에 정해져 있었다.
장굉은 작게 한숨을 지었다. 현재 모든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단연 딸의 혼사였다. 딸의 혼사를 생각하자 맹씨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그녀는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에 싸늘한 눈빛을 띠었다.
“아버님, 나리. 어서 밖으로 나가시죠! 신부 맞이 행렬이 도착했을 겁니다!”
장찬은 찬탄하는 눈빛으로 맹씨를 쳐다봤다. 그녀는 감정을 누르고 전체적인 국면을 고려할 줄 아는 여인이었다. 과연 자신이 직접 고른 며느리다웠다.
세 사람이 서재 밖으로 나오니 열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동그란 얼굴의 소녀가 초조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낭하에 서 있었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만만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혼례식은 계속 진행될 것이다.”
맹씨의 말에 장만만은 낯빛이 변하더니 앞으로 다가와 맹씨의 팔뚝을 잡았다. 장찬과 장굉 부자는 앞에서 걸어가고, 맹씨 모녀는 한 발짝 뒤떨어져서 걷게 되었다. 장만만이 눈시울을 붉히더니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엽이채가 싫어요! 이런 낯부끄러운 짓까지 벌이다니……. 전 그런 새언니 필요 없어요! 전 연채 언니가 좋아요. 연채 언니는 용모와 자태뿐만 아니라 출신과 품행 모두 엽이채보다 훨씬 나은데 오라버니가 눈이 삐었나 봐요!”
“됐으니 그만하거라. 그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말자.”
맹씨는 그녀의 말에 다시금 기분이 언짢아졌지만, 그래도 감정을 다스리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채가 우리 집안에 들어오면 이젠 한 가족이 되는 거란다. 난 그 아이를 박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잘해 주기까지 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람들이 우리 가문을 비웃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더 시끄러워지면 네 혼사에도 영향을 줄지 모른다. 내일 그 아이가 친정으로 돌아갈 때 번듯하게 해서 보내야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게다!”
장만만은 똥 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엽이채가 자기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집안이 다시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꼴을 절대로 보고 싶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하던 맹씨는 두 눈을 가볍게 깜빡였다. 아들이 지금 엽이채를 이리 아끼는데 자신이 엽이채에게 트집을 잡으면 아들은 자신을 사랑하는 두 사람을 갈라놓는 훼방꾼쯤으로 여길 것이었다. 그러면 얼마나 앙심을 품겠는가. 장만만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아들의 마음을 붙잡아 놓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한 발짝 물러나 양보해야 했다.
그들이 대청에 도착하자 사람이 와서 신부 맞이 행렬이 당도했다고 알렸다. 장씨 가문은 그렇게 신랑신부를 맞이했고 신랑신부는 웃어른들께 절을 올리며 인사를 드렸다.
* * *
장씨 가문에서 신랑신부가 웃어른들께 절을 올리며 떠들썩한 사이, 정안후부에서는 손님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있었다. 마지막 손님이 대문을 나서자 하인들은 서둘러 대문을 ‘쾅’ 하고 닫은 후 빗장을 걸었다.
문을 닫은 두 하인은 참으로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정안후부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딸을 시집보낼 때마다 손님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대문을 걸어 잠근 후 집안에 틀어박혀 사람들을 만날 엄두도 못 내는 것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다 둘째 나리 내외와 둘째 아가씨가 못된 짓을 벌인 탓이었다. 다른 사람의 혼사를 가로채면서 엽씨 가문 체면에 먹칠을 했고, 자신의 혼사를 치르면서 또다시 가문 이름에 먹칠을 했다. 그야말로 집안에 분란을 일으키는 골칫덩어리들이었다.
엽연채는 일반 손님이 아니니 안녕당을 나선 후 온씨의 손에 이끌려 영귀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엽영교도 차를 얻어 마신다면서 함께 영귀원으로 향했다. 엽미채는 많이 피곤했는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몸을 누였다.
세 사람이 영귀원 소청으로 가 앉자 염교가 차와 간식거리를 내왔다. 상쾌한 향기를 풍기는 철관음차였는데 엽연채가 제일 좋아하는 차였다. 엽연채가 차를 마시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온씨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엽영교가 먼저 말문을 뗐다.
“연채야, 오늘 네 부군과 함께 오지 않았는데 네가 원하지 않아서 그런 거니?”
온씨는 긴장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엽연채는 그들이 이 질문을 할 거라고 이미 예상했던 터라 적당한 말을 이미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네. 제가 원하지 않아서 그런 거예요.”
온씨와 엽영교는 가슴이 뜨끔했다. 온씨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금방이라도 눈물을 닦을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이에 엽연채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부군이 부끄러움을 잘 타는 성격이거든요. 데려왔다가는 숙모 앞에서 어떻게 조롱을 당할지 모를 일이잖아요.”
그 말에 온씨는 멍해 있다가 이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확실히 딸이 망신을 당할 뿐이니 차라리 사위가 오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내일 엽이채가 친정에 오는데 네 남편은 내일도 안 오니?”
엽영교에 물음에 엽연채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네.”
그러곤 미안한 얼굴로 온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죄송해요, 어머니. 혼인한 지 3개월이 다 되어가는데 어머니가 아직 사위 얼굴도 못 보셨네요.”
“그게 뭐 대수라고. 최근에 많은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자연히 늦어진 것일 뿐이지.”
온씨는 사위를 정말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한번 보고 싶기야 했으나 보고 나면 속이 뒤숭숭할까 봐 걱정되는 마음이 더 컸다.
“좀 기다리시면… 음.”
엽연채는 뭔가를 말하고 싶었으나 결국 그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자리를 떨쳤다.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 볼게요.”
“그래, 그만 돌아가 보거라!”
엽연채는 모친의 배웅을 받고 작별 인사를 한 후 작은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섰다.
* * *
마차는 흔들거리며 대로를 지나갔다. 이각쯤 지난 후 그녀는 정국백부에 도착했다. 궁명헌으로 들어가자 수화문 아래에 서 있는 주운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살짝 낡은 연자줏빛 도포를 입었고, 칠흑처럼 새까만 머리칼은 풀어 헤친 상태였다. 그는 몸을 살짝 옆으로 향한 채로 고개를 돌려 엽연채를 쳐다봤다.
정말 특출난 자태였다. 기다란 속눈썹과 눈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간 가늘고 긴 눈매, 붉고 탐스러운 입술, 거기에 무심한 표정까지. 마치 그림 속 미남이 고개를 돌려 이편을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엽연채는 넋을 잃고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왠지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못 본 보름 동안 더 멋있어진 것 같았다. 엽연채가 그의 곁으로 걸어가며 먼저 알은체를 했다.
“공자, 오늘은 엄청 일찍 돌아오셨네요!”
그 말에 주운환은 눈알을 굴리며 생각했다.
‘어쩐지 말에서 불만스러운 기색이 좀 느껴지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야말로 지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기분이 완전 엉망이었다.
그가 말했다.
“오늘 엽이채의 혼례식이 있었다지요?”
“맞아요.”
엽연채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운환은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자 참으로 기가 막혔다. 친정에 가는데 자신을 데려가지 않다니.
“밖에서 정안후부에서 딸을 시집보낸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오늘 엽이채의 혼례식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엽연채가 기가 막혀 했다. 그녀는 잠시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가슴 졸여 봤자 소용없어요. 이미 시집간 걸요. 설마 미리 알았으면 가서 원래 신부를 강제로 데려오기라도 할 생각이었어요?”
그러자 주운환은 입을 씰룩이며 반박했다.
“누가 강제로 데려온답니까?”
“강제로 데려올 것도 아니면서 그럼 왜 묻는 건데요?”
엽연채가 입을 삐죽거리더니 아래턱을 추켜올렸다. 그러자 주운환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오늘 소저의 친정에서 혼례식을 치르니 남편인 제가 당연히 동행했어야지요.”
어리둥절해하던 엽연채가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그녀는 신발 끝을 쳐다보며 대꾸했다.
“아, 그것 때문이었군요. 요즘 공자께서 계속 바빠 얼굴도 보지 못 했잖아요. 그리고 제 일은 제가 스스로 해결한다고 말씀드렸고요.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가 잘 처리할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주운환은 괜스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절차대로라면 내일 엽이채가 친정에 와서 일가친척들과 인사를 나눌 겁니다. 그때 저도 소저와 같이 가겠습니다.”
“그게…….”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응했다.
“좋아요.”
알겠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주운환은 기분이 좀 풀렸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식사는 하셨나요?”
“점심에 좀 먹었어요.”
지금은 신시申時(오후 3시~5시) 삼각이라 저녁 끼니까지 아직 시간이 좀 남아 있었다.
“들어와서 간식이라도 좀 드시지요.”
주운환은 그리 말하고선 회랑回廊으로 걸어갔고 엽연채는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부부는 소청 안으로 들어갔는데, 내부를 본 엽연채의 표정이 이내 굳어 버렸다. 조그마한 식탁 위에 압자고鴨子糕가 한가득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압자고는 크기가 손바닥 반 정도 되는 선명한 노란빛을 띠는 작은 오리 모양 떡이었다. 조그맣고 노란 오리들은 꼬리를 쳐들고 똥글똥글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식탁 위에 단체로 모여 있는 오리들이 말이다.
“드시지요.”
주운환이 젓가락을 건네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