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혜연의 논리정연한 말에도 추길은 입을 삐죽거렸다. 혜연의 한마디 한마디가 이치에 맞았으나 불쾌한 마음을 여전히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때,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웃어대는 가운데 대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진홍색 옷을 입고 머리에는 커다란 붉은 꽃을 꽂은 동그란 얼굴의 부인이 손에 부채를 쥔 채 안으로 들어왔다. 매파였다.
그리고 장박원이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아 들어왔다. 금실로 수놓은 진홍색 신랑 예복을 입은 그는 몸에 커다란 붉은 꽃을 달고, 머리에는 꽃을 꽂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아유, 신랑이 직접 신부를 맞이하러 왔네!”
사람들이 야유하며 그를 놀려 대기 시작했다.
“신부를 데리러 왔습니다!”
매파가 큰 부채를 흔들며 사람들을 데리고 신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엽영도 신방으로 들어가 엽이채를 업고 밖으로 나왔다. 장박원은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른 엽이채를 보자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신랑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네, 바보같이 실실거리며 웃는 것 좀 봐.’ 하고 입을 모아 그를 놀려 댔다!
주위에서 신랑을 놀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자 추길과 온남아는 속이 뒤틀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엽연채와의 혼사를 피하려고 도망까지 친 주제에 얼마나 됐다고 다른 여인이 좋아서 헤벌쭉 웃어대고 있다니, 덕분에 정말 먹은 것을 다 게워 내기 일보 직전이었다.
“연채야!”
그때 엽영교가 엽미채와 함께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말했다.
“어서 정청正廳으로 가자. 고별 의식이 남았거든!”
“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신부가 출가하기 전 고별 의식을 치를 때 육친들은 전부 그 자리에 있어야만 했다.
엽연채 일행은 지름길을 따라 바깥뜰의 정청으로 향했다. 엽학문과 묘씨는 이미 상석에 놓인 태사의에 앉아 있었고 온씨와 나씨, 그리고 엽승덕 형제 셋과 엽영도 기러기가 날개를 쭉 편 것처럼 일렬로 앉아 있었다. 정청에 모인 사람들 중 상당수가 엽씨 가문 방계 친척들과 일가친척들이었다.
“연채야, 미채야.”
온씨의 손짓을 따라 엽연채와 엽미채가 그녀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고, 엽영교는 묘씨 옆에 앉았다. 손씨와 엽승신도 서둘러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둘째 숙모께서 오셨네요. 다들 기다리고 있었어요!”
주변에 있던 엽씨 가문의 손아래 방계 친척 중 여식솔들이 미소를 지으며 손짓으로 손씨를 불렀다. 그중 한 사람이 듣기 좋은 소리를 했다.
“방금 전 신부를 맞이하러 온 신랑의 표정을 봤는데, 와, 정말로 아내를 아끼나 봐요.”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얼른 말을 받았다.
“사위가 보통 인재가 아니더라고요. 그 인물에 뛰어난 재능까지 겸비한 사내는 도성 전체를 통틀어도 몇 안 될 거예요.”
손씨와 엽승신은 그들의 아첨을 들으며 기뻐서 우쭐거렸고, 엽학문도 허허 웃으며 얼굴에 희색을 가득 띠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간에 이 혼사가 그들의 체면을 톡톡히 세워 준 것이다.
반면 온씨의 낯빛은 어둡기만 했다. 그녀는 마음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두루두루 훌륭한 이 사위는 원래 자신의 사위였는데 이젠…….
득의양양한 손씨는 엽연채를 다시 한번 짓밟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주위를 휘둘러보더니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참, 우리 조카사위께서 안 보이시네? 연채야, 어서 가서 데려오렴! 다 한 가족인데 밖에 서 있으면 되겠니?”
그러자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 부군은 오늘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에 손씨는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일은 무슨, 창피하니까 못 데려온 거겠지. 체면 깎이기 싫어서 안 데려온 거지?’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겉으로는 대단히 아쉬운 척했다.
“아이고, 왜 안 오신 거래? 친척이고 거기다 형부인데. 처제가 혼례를 치르는데 아무리 큰일이 있어도 와야 하는 거 아니니. 어떻게 참석을 안 할 수가 있담!”
그 말에 온씨는 낯빛이 확 변하더니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씨는 그 모습을 보고도 못 본 척하며 이리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내일 처갓집에 와서 인사를 나누기로 하지요, 뭐. 연채야, 꼭 오려무나! 아니면 친척 간에 길에서 마주쳐도 서로 못 알아볼 거 아니니.”
엽연채가 차가운 눈빛을 한 채 짧게 대꾸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뭘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 꼭 와야지!”
손씨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더니 온씨에게로 화살을 돌렸다.
“안 그래요, 형님?”
온씨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몰락한 가문의 서자인 자신의 사위는 당연히 장박원에 비할 바가 못 됐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응하지 않기도 어려웠다. 그러나 정말로 사위를 데려오게 하면 엽연채의 체면이 더더욱 구겨질 게 뻔한데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온씨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손씨가 재차 입을 놀렸다.
“저번에 연채가 친정에 들렀을 때도 사위가 함께 오지 않았잖아요. 우리 엽씨 가문에서는 아직도 큰아가씨 사위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있어요! 그러니 내일 이채가 친정으로 인사를 오는 김에 조카사위도 와서 함께 인사를 나누는 게 좋겠죠?”
온씨는 차마 그러겠다고 말할 수는 없어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위에 있던 손아래 방계 친척의 부인들은 그 모습을 보며 탄식을 금치 못했다. 엽연채는 적장녀이니 당연히 으뜸가는 가문에 시집을 갈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런 한미한 가문에 시집을 가 버리다니, 그것도 서자에게.
‘출신이 좋고 아무리 예쁘면 뭐 하나, 결국 저런 팔자인 것을!’
손씨가 기고만장해서 자신을 폄훼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에게까지 모욕을 주는 모습에 엽연채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추길을 쳐다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추길은 어리둥절해하다가 얼른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엽연채는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더니 추길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소곤거렸다. 그러자 추길은 흥분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물러났다.
“신랑신부가 작별을 고하러 왔습니다!”
매파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신랑신부가 자신들을 겹겹이 에워싼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들어오고 있었다. 엽이채는 올해 열세 살인 엽영에게 업혀 들어오고 있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볼품없는 외모에 키까지 작은 엽영은 숨을 헐떡거리며 버거워했다.
매파가 커다랗고 두툼한 부들방석 두 개를 땅에 내려놓자 장박원이 먼저 무릎을 꿇고 앉았고 엽영의 등에서 내린 엽이채도 방석 위에 무릎을 꿇었다.
“신부께서 부모님과 조상님의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오늘 출가한 이후로는 남편만을 따르고 정조를 지키며 장씨 가문의 며느리로서 본분을 다해, 엽씨 가문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으므로 매파가 그녀 대신 말해 주었다.
“장인어른, 장모님, 그리고 할아버님, 할머님. 이채를 잘 키워 주시고 이리 고운 이채를 저에게 시집보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장박원이 감격에 겨운 얼굴로 말했다.
“앞으로 이채를 아끼고 사랑하며 한평생 행복하게 해 주겠습니다!”
“그래그래! 어서 일어나거라!”
엽학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엽승덕은 진홍색 예복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두 사람이 바라던 바를 성취한 모습을 보며 자신과 정랑도 이리될 수 있다고 한층 결의를 불태웠다.
신랑신부가 일어나자 엽영도 마지못해 일어서더니 끙끙거리며 엽이채를 다시 업었다. 그렇게 세 사람과 그 일행이 정청을 나섰다. 온씨는 그 모습을 쳐다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뒤틀리고 괴로웠다.
신랑신부는 자신들을 에워싼 사람들을 뒤로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장박원은 말에 오르고, 엽이채는 꽃가마에 올라탔다. 정안후부 대문 밖에 모인 구경꾼들은 그들을 보며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혼수가 밖으로 옮겨지자 그제야 가마꾼들이 가마를 메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엽연채와 엽영교, 포기 등을 비롯해 친척들과 손님들도 모두 밖으로 걸어 나와 대문 옆의 돌사자 근처에 서서 신랑신부를 배웅했다. 그 주변은 혼례식을 치를 때 하인들에게 던져 주는 사례금을 줍거나 신랑신부를 구경하려는 백성들로 바글바글했다.
“신랑 인물이 정말 훤하네. 엽씨 가문 둘째 아가씨가 복도 참 많구려.”
“장 공자도 복이 많은 건 마찬가지야! 방금 전에 못 봤어? 신부가 입고 있는 혼례복이 얼마나 귀한 건데! 더군다나 듣자 하니 혼수를 무려 백스물여덟 상자나 준비했다더라! 재산을 몽땅 털어 딸을 시집보내는 거 아니겠어?”
“엽씨 가문에서는 원래 예순여덟 개를 준비했는데 장씨 가문에서 며느리를 어여삐 여겨 은화 이만 냥을 보냈다고 하더라! 엽씨 가문도 딸을 정말 아끼는지 그걸 혼수 마련하는 데 전부 써서 백스물여덟 개가 준비됐다는 거야!”
“아무튼 장씨 가문과 엽씨 가문 모두 신부를 애지중지한다는 거지!”
“와! 저기 봐, 혼수가 나오고 있어!”
백성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쳐들고 두리번거리자 붉은 옷을 입은 하인들이 혼수를 들고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앞에서 들고 오는 세 상자는 열려 있는 상태로, 그 안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도자기 병과 아름다운 보석, 머리 장신구, 구름무늬를 수놓은 진홍색 고급 비단 등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와, 정말 아름답다!”
“대체 몇 개야! 하나, 둘, 셋……. 총 백스물여덟 개!”
그렇게 한참을 세는 동안 혼수 상자는 전부 밖으로 옮겨졌다. 하인들은 혼수를 들고 가지런히 서서 붉은 대열을 이루며, 거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꽃가마에 타고 있는 엽이채는 혼수를 세고 있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마조마해하는 한편, 생각한 대로 되어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장박원은 고개를 돌려 길게 늘어선 혼수 행렬을 바라봤다. 그야말로 십리홍장十里紅粧,(십 리에 걸친 붉은 혼수품. 즉 바리바리 싣고 가는 혼수품을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며 장박원은 이만하면 더없이 으리으리한 행렬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체면이 한껏 사는 기분도 들었다.
마지막 혼수품을 든 하인이 뒤에 서자 집 안에 서 있던 어멈이 손짓을 했다. 그러자 매파가 부채를 흔들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신부를 맞이했으니 꽃가마는 출발하시오!”
매파의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진홍색 꽃가마가 들리고, 장박원도 말고삐를 잡았다. 붉고 커다란 꽃을 묶은 말이 ‘히히힝’ 콧소리를 냈다. 곧 길게 늘어선 신부 맞이 행렬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혼수를 보며 사람들이 감탄해 마지않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맨 뒤에서 혼수를 들고 가던 하인이 미끄러지더니 들고 있던 혼수와 함께 앞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하인이 넘어지면서 앞에 있던 사람을 덮치자, 앞사람도 자신의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기 앞에서 걸어가던 사람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