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손씨가 웃으며 대답했다.
“백스물여덟 개입니다!”
“아유, 정말 많네요! 우리 딸은 시집갈 때 겨우 예순여덟 개밖에 못 해 갔는데.”
물어본 귀부인은 깜짝 놀라며 감탄했다.
“저번에 큰아가씨께서 혼례를 올릴 때도 이렇게 많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요!”
손씨는 더욱 환히 웃어 보였다.
“저번에 연채가 혼례를 올릴 땐 예순여덟 개를 준비했지요! 연채가 주씨 가문 서자에게 시집을 가긴 했지만 편애하면 안 되니까 예순여덟 개를 준비해 주었죠. 우리 이채도 예순여덟 개를 준비했는데, 장씨 가문에서 우리 이채를 예쁘게 보셨는지 정혼 성립의 증표로 무려 은화 이만 냥을 보낸 거예요. 그래서 그 돈으로 혼수를 배로 더 준비했죠.”
“장씨 가문에서 이채 아가씨를 정말 예쁘게 보셨나 보네요. 호호호.”
다른 귀부인 몇 명이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쳤고 두 귀부인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주위에 있던 손님들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밖에서 떠도는 소문을 못 들어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엽이채가 형부 될 사내를 꾀어 자신의 남편으로 만들었다는 소문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성대한 혼례식과 산더미처럼 쌓인 혼수와 예물을 보니 어찌 됐든 간에 두 사람이 불미스러운 관계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설마 정말로 청첩장이 잘못 쓰였던 걸까? 원래 엽이채가 혼약을 맺었던 상대가 정말로 장씨 가문이었던 걸까? 설령 정말로 혼사를 가로챈 거라 하더라도 시댁에선 엽이채를 조금도 미워하지 않는 듯 이렇게 과시하고 있으니, 설마 엽이채가 정말로 엽연채보다 더 낫기 때문인 걸까?
손씨가 원했던 게 바로 이런 반응이었다. 손씨는 손님들의 눈빛을 쳐다보며 얼굴에 득의양양한 기색을 비쳤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다 엽연채가 귀족 아가씨들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순간 당황했다.
‘저 빌어먹을 계집애가 또 소란을 피우러 온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손씨는 되레 자신이 먼저 계단으로 내려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고, 연채가 이채에게 선물을 주러 왔나 보네요! 아 참! 요 이틀 동안 집안에선 혼례식 준비로 정신이 없었는데 형님께서는 고뿔에 걸려 도와주러 오시지 못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버님은 형님이 게으름을 피우느라 꾀병을 부리는 거라고 하시면서 엄청 언짢아하셨죠. 하지만 나중에 의원을 보냈더니 정말로 고뿔에 걸리신 게 맞더라고요. 모두 오해를 했던 거죠. 하하하! 오늘은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형님을 뵈러 갈 짬이 나지 않았는데 괜찮아지셨는지 모르겠네요?”
이건 괜한 허튼소리로 엽이채의 혼례식을 망치지 말라고 엽연채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엽연채를 직접 벌할 수는 없어도 엽학문이 온씨에게 앙심을 품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엽연채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보며 대꾸했다.
“여기 와서 어머니부터 뵈러 갔어요. 좋아 보이시던데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엽씨 가문 둘째 부인, 신부를 보러 왔어요.”
그때 포기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아이구, 어서 들어와요!”
그녀를 맞이하는 손씨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어서 이채를 보러 갑시다!”
“그래, 연채야. 어서 들어가자!”
포기가 고개를 돌려 엽연채에게 권하자 손씨도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손씨는 엽연채가 엽이채의 떵떵거리는 모습을 보러 오지 않으면 어쩌나 했다.
엽연채는 조롱 어린 눈빛을 띠며 응했다.
“그러죠!”
그렇게 여성 손님들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엽이채가 머무르는 규방은 더더욱 화려했다. 창문에는 쌍희문 무늬으로 오린 전지를 가득 붙여 놓았고, 붉은 명주로 만든 갖가지 꽃등과 장식용 망태기도 걸어 두었다. 그녀가 좋은 가문에 시집간다는 걸 혹여나 다른 사람들이 모를까 봐 알려 주려고 안달이 난 듯한 모습이었다.
침실로 걸어 들어가니 엽이채가 가자상架子床(침상의 한 종류로 네 개의 기둥과 난간, 뚜껑 등으로 이루어짐)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구슬 알과 물총새의 깃으로 장식한, 날개를 편 봉황 문양이 수놓아진 진홍색 혼례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마찬가지로 봉황 모양의 장식이 드리워진 묵직한 관을 머리에 얹은 채였다. 금빛 찬란한 관에는 홍옥이 상감되어 있었고, 목에는 영락瓔珞(구슬을 꿰어 만든 목걸이 형태의 장신구)을 드리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화장을 해 주는 사람들도 모두 밖에서 데려온 사람들이라 하나같이 최고의 솜씨를 자랑했다. 거기다 엽이채 자체도 미인인지라, 진하게 화장을 하고 화려한 관冠과 예복을 갖춰 입으니 부티가 흐르고 위엄이 있어 보였다. 들어와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귀부인과 귀족 아가씨들은 경탄해 마지않았다.
한 귀부인이 웃으며 엽이채를 추켜세웠다.
“엽씨 가문이 딸을 시집보내는 데 전 재산을 쏟아부었나 봐요! 혼수도 어마어마하고 혼례복과 관도 정말 귀해 보이네요!”
그러자 포기가 얼른 호응했다.
“정말 아름답네요. 혼례복과 관이 딱 봐도 저번에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이 입었던 것보다 훨씬 귀해 보여요! 확실히 장씨 가문 적자에게 시집가는 것이랑 주씨 가문 서자에게 시집가는 건 차이가 나네요!”
그 말이 순식간에 엽연채의 체면을 구겨 버렸다. 엽연채의 혼례식이 엽이채만큼 성대하지 않았다고 깔보는 것이었다. 왜 적장녀인 엽연채의 혼례식이 서녀의 혼례식보다 성대하지 않았던 걸까? 그건 바로 엽연채가 서자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이다. 즉, 엽연채는 원래 서자에게 시집가기로 되어 있었고, 엽이채가 혼사를 가로챈 일은 없었다는 소리였다.
침상에 앉아 있던 엽이채는 엽연채를 흘끗 쳐다보더니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입을 오므리고 웃었다. 포기의 말에 온남아는 굳은 표정으로 음흉하게 말했다.
“치장하고 장식하는 데 돈을 다 써 버렸나 보죠.”
그 말에 엽이채와 손씨의 안색이 확 변했다. 손씨는 헛웃음을 짓더니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남아 아가씨는 농담도 참 잘하시네요. 밖에 혼수가 한가득 있잖아요!”
그러자 이번에는 엽연채가 입꼬리를 당겼다.
“숙모, 능력이 참 대단하시네요. 이 많은 혼수는 대체 어떻게 준비하셨는지 모르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손씨는 당연히 알아들었다. 그저께만 해도 엽연채의 혼수를 빼앗아 가려고 궁리를 하던 손씨네가 지금 백스물여덟 개의 혼수를 준비해 놓고 혼례식도 이리 성대하게 치르고 있었다. 엽연채보다 훨씬 더 번듯하게 혼사를 치르는 셈인데 대체 어디서 이만한 돈을 구했다는 말인가.
손씨가 이를 악물고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채 너는 잘 모르겠지만, 우리 박원 공자가 이채를 대단히 애지중지한단다. 장씨 가문에서 정혼 성립의 증표로 돈도 많이 보내셨고 말이야. 그리고 아버님도 손녀를 귀하게 여기시니 이렇게 혼수를 많이 준비할 수 있었지!”
즉, 그저께만 해도 엽이채의 혼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지만 장박원이 엽이채를 아끼니 그녀가 혼수를 준비할 수 없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고, 도리어 장박원이 생각을 짜내 자기 집안에서 다시 상당한 양의 돈을 보내게 해 혼수품을 준비했다는 소리였다. 다르게 말하면 장박원이 혼수품을 대 주면서라도 엽이채를 신부로 맞이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이야기였다.
거기다 손씨는 일부는 엽학문이 보태 준 거라고도 말했다. 둘째 아들 내외가 큰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엽학문이 결국에는 그들이 자초한 손실을 메워 준 것이다.
으스대는 손씨를 보는 엽연채의 눈빛에 비웃는 기색이 살짝 돌았다. 친정의 형편이 어떠한지 그녀가 모르겠는가? 그리고 장찬은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받는 고관이긴 해도 한미한 출신이라 집안에서 먹고 입는 데 지출하는 비용이 공훈이 있는 귀족들에게는 못 미쳤다.
또 장박원의 누이동생인 장만만도 나이가 꽉 차 있었다. 그녀의 혼사는 장씨 가문에서 대사 중의 대사였으니 당연히 혼수를 바리바리 준비해 가야 했다. 거기다 저번에 장박원이 엽연채에게 정혼 성립의 증표로 보낸 금품도 있으니, 두 남매의 혼사로 장씨 가문의 재산은 거의 바닥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엽이채에게 이만 냥의 돈을 또 보냈다고 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장박원이 준비해 주었다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자기 방에 있는 물건들을 가져다 헐값에 팔고 친구들에게 빌려 일천 냥만 모을 수 있어도 꽤 수완이 좋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어마어마한 양의 혼수품을 마련해 주었다니, 그리고 엽학문이 나서서 손실분을 메워주었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백스물여덟 개의 혼수 중 열려 있는 상자는 여섯 개밖에 없었다. 위에 쌓여 있는 혼수품들을 슬쩍 쳐다보니 꽤 괜찮아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마 눈치 못 챘겠지만 엽연채는 쳐다보자마자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은 엽이채의 방에 놓여 있던 오래된 물건들이었고 일부는 손씨 내외 방에 놓여 있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중 몇 개는 엽미채의 다층 진열장에 있던 물건인데, 그것도 자신이 몇 년 전에 엽미채에게 선물했던 것이니 못 알아볼 수가 있겠는가.
이 여섯 개의 상자 밑에 꽁꽁 묶인 채 깔려 있는 나머지 백여 개의 붉은 상자 안에는 대체 무엇이 들어 있을까? 같은 것을 보고 있지만 엽연채와 사람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신부를 맞이하러 왔어요!”
이때 밖에 있던 여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자리에 계신 모든 부인들과 노부인들 그리고 소저들께서는 문밖으로 나가 앉아 주세요.”
손씨가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을 밖으로 보냈다. 그러자 사람들은 속속 방 밖으로 나가더니 낭하에 서거나 앉아서 신부 맞이 행렬을 기다렸다. 이때 엽영교와 엽미채 그리고 엽씨 가문 방계 아가씨들 몇 명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옥리원의 대문을 ‘쾅’ 하고 걸어 잠갔다.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옥리원 밖에서는 웃음소리와 농담이 들려왔다. 엽미채가 쪽지 한 장을 들고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를 읊고 대구對句를 만들게 하고 술을 권하기도 했다. 안팎으로 시끌벅적하며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엽연채 뒤에 서 있던 추길은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그 모습을 노려보았다. 이건 본래 전부 다 큰아가씨의 것이었다. 하지만 큰아가씨께서는 이렇게 흥겹고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신부 맞이 행렬을 기다리지 못했다. 가슴 가득 억울함을 품은 채 초라한 꽃가마를 기다렸을 뿐이었다.
“엽이채의 혼사를 돕다니 셋째 아가씨와 영교 아가씨도 참 너무 하시네요.”
잔뜩 성이 난 추길이 투덜대자 혜연이 그녀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실제 사이야 어떻든 밖에서 보면 다 엽씨 가문 사람들이니 셋째 아가씨와 영교 아가씨도 어쩔 수 없이 저리하시는 거지. 어쨌든 육친이니까 말이야. 나서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사람들은 엽씨 가문이 화목하지 않다고 생각할 거고, 그럼 노태야께서 셋째 아가씨와 영교 아가씨를 어떻게 보시겠니! 특히 셋째 아가씨는 서녀인데 어떻게 거역할 수 있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