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엽연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감색 옷을 입은 훤칠한 소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장박원이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 엽이채가 눈시울을 붉힌 채 따라오고 있었다.
엽연채는 짙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냉소를 지어 보였다.
“오, 이거 신랑신부 아니신가요? 이틀 뒤면 혼례식인데 아직도 혼인 전에 밀회를 즐기던 습관을 못 고쳤나 보네요!”
그 말을 들은 장박원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했다. 장박원은 엽연채에게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혼수 문제로 잡음이 계속되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죄책감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참이었다.
엽이채는 아직까지 혼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오늘도 그를 찾아와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엽연채와 마주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성미가 급한 장박원은 그러잖아도 화를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엽이채가 겪은 억울함은 전부 엽연채 때문이라는 생각에 그만 참지 못하고 엽연채에게 다가가 독설을 퍼부었다. 엽이채 대신 화풀이를 한 것이었다.
“엽연채, 이 독살스러운 여인 같으니라고! 우리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을 빼앗아간 것도 모자라 이채의 혼수도 가져가다니. 세상에 당신같이 매몰찬 여인이 어디 있소!”
장박원은 엽이채 부모가 노름으로 혼수를 날려먹은 일은 쏙 빼 버렸다. 이 모든 일이 엽연채가 먼저 혼수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엽연채의 눈빛이 한층 더 싸늘하게 변했다. 그녀는 웃는 듯 마는 듯한 눈으로 엽이채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저 아이는 내 혼사를 가로챘는데 난 저 아이 혼수도 좀 못 가져옵니까? 어디서 그런 개뼈다귀 같은 이중 잣대를 들이미는 겁니까. 나는 되고 너는 안 된다 이겁니까?”
그 말에 장박원과 엽이채의 안색이 확 변했다. 엽이채는 비틀거리더니 눈물을 떨구며 가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저희는 그저 서로를 진심으로 사모했을 뿐이에요…….”
“내 말이 그 말이오. 내가 사모하는 여인은 이채란 말이네.”
장박원이 차가운 목소리로 동조했다.
“난 처음부터 끝까지 이채만을 사모했소. 당신은 어째서 남을 위해 공덕을 쌓을 줄은 모르오? 애초에 내가 정말로 당신을 아내로 맞이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당신에겐 부당한 일이었을 것이오. 혼인한 후에는 나와 당신 그리고 이채 우리 모두 불행한 삶을 살았을 테지. 당신과 내 혼사는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었소. 그런데 굳이 서로 사모하는 연인을 억지로 갈라놓는 악역을 자처해야겠소?
우리 사랑에는 아무 잘못도 없소. 정말로 내가 당신과 혼인을 했다면 그건 당신에게도 우리에게도 해가 되는 일이었을 것이오! 당신은 어릴 때부터 여학女學에 다녔으면서 어떻게 이런 이치도 모른단 말이오? 꼭 이렇게까지 죽자사자 물고 늘어져야 속이 시원하겠소!”
엽이채는 장박원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박원은 엽연채가 사리분별 없이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성격이기에 자신이 이런 거창한 이치를 언급하면 그녀가 분명 분하고 부끄러운 나머지 성을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엽연채는 뜻밖에도 귀밑머리를 만지작거리더니 그를 쳐다보고는 태연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전부터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전생에서는 묻고 싶었지만 그녀가 세상을 뜰 때까지 물어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은 2년 전 서운사에서 감정이 싹튼 거죠? 보통 애틋한 감정이 아니겠어요!”
엽연채의 말에 엽이채와 장박원은 깜짝 놀랐다. 엽연채가 그 일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이제 와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었다.
장박원이 말했다.
“그래서 뭐 어쨌단 거요? 나와 이채는 서로 진심으로 사모한다오.”
“아, 정말 2년이나 되었군요!”
엽연채의 입가에는 조금 전보다 더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럼 두 사람은 이미 서로 사모하는 사이였는데 당신은 왜 더 일찍 나와의 혼사를 물리지 않았나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서 왜 당당하게 함께하지 못했어요? 혼사를 물릴 시간이 무려 2년이나 있었는데!”
그러자 장박원은 낯빛이 확 변하더니 말을 더듬었다.
“그게…….”
“말씀 못 하시겠나 봐요? 그럼 제가 대신 해 드리죠!”
엽연채는 배시시 웃으며 그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당신은 장씨 가문 적장손인데 엽이채는 서자의 딸인 게 문제였죠. 나와의 혼사를 물려도 장씨 가문은 당신과 엽이채의 혼사를 승낙하지 않고 다른 혼처를 구했을 거예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시간을 끌다가 혼례식 당일에 둘이 도망을 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겠죠. 그럼 난 다른 가문으로 시집갈 수밖에 없게 되고, 장씨 가문과 엽씨 가문은 혼사를 중간에 무를 수야 없으니 두 사람을 맺어 주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 내가 당신들의 사랑을 갈라놓는 방해꾼을 자처한 게 아니라 당신들이 그 잘난 사랑을 이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날 붙들어 둔 거죠!”
장박원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이봐, 당신……!”
“말씀 함부로 하지 마세요!”
엽연채가 웃으며 말허리를 똑 잘랐다.
“혼인 전에 나와의 혼사를 물리고 족쇄 따위는 때려 부수고 함께했어야죠! 집안에서 승낙하지 않는다고요? 그럼 있는 힘껏 소란을 피우고 고집을 부렸어야죠! 가문의 반대에도 끝까지 맞섰어야죠! 그럴 배짱조차 없으면서 어디 서로 사모한다는 말을 입에 올립니까? 겁쟁이 주제에!
고작해야 도망갈 생각밖에 안 났나 본데, 왜 하필 내 혼례식 날에 도망가기로 한 거죠? 당신들이 서로 사모하는 건 잘못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럼 나는 뭐 잘못했나요? 당신들이 서로 사랑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을 짓밟고 희생시켜 가며 그 잘난 사랑을 이룰 자격 따윈 없습니다!”
장박원은 엽연채에 대한 증오심으로 사고 회로가 정지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화를 꾹꾹 눌러 참고 그녀에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마땅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엽이채는 계속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정말 고의로 그런 게 아니에요……. 흑, 흑흑……. 박원 공자님이 혼사를 물리지 않은 건… 언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으셨기 때문이에요! 저희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모해 온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언니를 힘들게 할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저희도 순간적인 충동으로 도망쳤던 거예요……. 저희도 수습하고 싶었지만… 흑흑…….”
“수습하고 싶었지만 뭐? 그만 울고 계속 말해 보렴. 이 언니가 다 들어 줄 테니까 이참에 어디 한번 제대로 설명해 봐.”
엽연채는 혀를 끌끌 차더니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엽이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 이렇게 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칠 수가 있지? 믿을 수 없다면서 욕을 퍼부어야 하지 않나?’
막상 설명해 보라고 하자 엽이채는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적절한 말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엽연채가 웃으며 말했다.
“그때 분명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어. 장씨 가문 마님께서 우리 어머니 처소에 오셔서 신부를 다시 맞이하러 오겠다고 하셨거든. 날 다시 데리러 온다고 말이야. 그런데 너랑 박원 공자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안 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댈 줄 누가 알았겠니.”
엽이채의 뺨은 몇 대씩 얻어맞은 것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괜히 상황만 더욱 난처해져 버렸다.
“언니의 형부가 될 사람을 가로챈 주제에 열녀문이라도 세워 달라는 거니? 그 열녀문이 무너져 두 사람이 압사당한다 해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게다!”
엽연채는 ‘하’ 하고 소리를 내며 경멸의 눈초리로 두 사람을 쳐다본 뒤 돌아서서 가 버렸다. 장박원은 떠나가기 직전 그녀가 보인 눈빛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반박할 면이 서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정혼녀였던 엽연채가 아름답기는 하지만 너무 화려한 미인형이라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엽이채는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이 들었고 그 후 서운사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에게 더욱 빠져들고 말았다.
엽이채는 우아하고 가녀린 여인이었다. 그런 그녀가 상처를 입고 바닥에 주저앉았으니 당장 달려가 그녀를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리고 혼사를 물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장박원은 한없이 부끄럽고 분했으며, 무력감이 들었다. 그리고 가슴속에 가득 찼던 무력감이 이내 원한과 증오로 바뀌었다. 방법이 틀렸으면 또 어떠한가. 어쨌든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설령 또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가자. 가서 백야께 감사 인사를 드리자.”
장박원은 이리 말하며 엽이채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 올라타서 송화 골목으로 향했다. 장박원이 은정랑의 집 대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한 여종이 나와 문을 열었다. 저번에 나왔던 그 여종이었다. 여종은 손님들이 도착했음을 고하러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후 엽승덕이 밖으로 나왔다.
“박원이가 왔구나.”
그러더니 엽승덕이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 일은 도움이 되지 못해 정말 미안하구나.”
“백야, 그런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백야 마음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성사 여부에 상관없이 백야께서 마음 써 주신 것 아닙니까.”
장박원은 그렇게 말하더니 시동에게서 상자 두 개를 받아 들었다. 그는 그 상자를 엽승덕에게 내밀었다.
“이건 제가 쓰던 부채입니다. 별로 값이 나가는 건 아니지만 드리고 싶어 가져왔습니다.”
“녀석.”
엽승덕은 보면 볼수록 장박원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엽이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혼례식을 치르고 나면 앞으로 더 많은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박원아, 너는 이미 가정을 꾸린 사내다. 그러니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고 이채를 두고 변심해서는 안 된다. 이채가 네가 죽을 때까지 사랑할 여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채가 너희 가문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해야 하고. 알겠느냐?”
“예. 반드시 그렇게 할 겁니다.”
장박원은 결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엽승덕이 은표 한 장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게 전부구나.”
장박원이 흘끗 쳐다보니 이백 냥짜리 은표였다. 그는 감동해 마지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정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너희들이 혼례식을 성대하게 치러 그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 주는 것이 나에겐 가장 큰 보답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