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엽학문은 은정랑을 집안으로 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젠 들이지 않으면 더욱 망신살이 뻗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과부를 첩으로 들이는 경우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래 봤자 첩일 뿐 정실도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큰아들네가 대를 이을 가능성도 없었다. 그 의붓자식은 그 외실이 정안후부로 들어온 뒤에 먼 곳으로 보내 버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이곳에 들어와 봤자 서자에 불과하니 말이다.
엽학문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 뜻밖에도 엽승덕이 반대를 표했다.
“지금 집안에 벌어진 일만으로도 충분하니 두 분은 쓸데없는 일일랑 벌이지 마시지요. 안 그러면 사람들이 저희 가문에 대해 뭐라고 떠들고 다니겠습니까?”
“저런……!”
묘씨의 얼굴이 확 굳었다. 엽학문은 본래 그 과부가 정안후부로 들어오는 걸 마뜩잖게 생각하는 데다 엽승덕도 거절 의사를 보이니 성을 내며 이렇게 소리칠 뿐이었다.
“네가 뱉은 말이니 이후에는 네가 들이고 싶어도 절대 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만 물러가거라!”
그 말에 엽승덕은 두 눈을 살짝 반짝였다.
‘아니, 정랑이 위풍당당하게 정안후부로 들어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는 정랑이 정안후부의 이낭으로 들어오길 원치 않았다. 온씨는 매몰찬 여인이니 정랑이 들어오면 그녀를 어떻게 괴롭힐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정랑이 온씨 앞에서 바짝 엎드려 자신을 낮추고 아첨하는 꼴은 눈에 흙이 들어가도 보고 싶지 않았다.
정랑이 그런 억울함을 겪기를 추호도 원치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일단 이낭으로 정안후부에 들어오면 이후에 정실부인이 된다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며 기를 못 펴고 살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정랑이 이 집에 들어와야 한다면 당연히 정실로서 당당하게 들어와야만 했다.
다행히 허서는 의욕적이고 승부욕도 강한 아이니 내년 향시에 합격하기만 하면 됐다. 아버지는 손자들이 큰 인물이 되길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니 허서가 급제하면 그때 정랑과 허서를 집안에 들이게 해 달라고 부탁해도 늦지 않는다.
엽승덕은 인사를 올린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엽영교의 눈빛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비쳤다. 그녀는 묘씨와 엽학문 곁에 잠시 더 머무르다 인사를 올리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거처에 도착한 엽영교는 엽연채에게 줄 서신 한 장을 쓴 뒤 어린 여종을 통해 전달했다.
* * *
그 시각, 정국백부의 궁명헌.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사월, 졸음이 쏟아지는 선선한 날씨였다. 엽연채는 몸의 반은 나한상에 반은 항탁에 기댄 채 책장을 넘기며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혜연은 항탁을 사이에 두고 앉아 수를 놓는 데 열중했는데, 사용하고 있는 실은 어제 엽영교를 따라가 자수 상점에서 함께 고른 새 자수실이었다. 그녀는 엽연채에게 줄 둥글부채를 만드는 중이었다. 연잎이 수면을 덮은 문양인지라 곧 다가올 여름과도 잘 어울렸다.
그때 추길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미소를 지으며 알렸다.
“아가씨, 영교 아가씨께서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어?”
그 말에 깜짝 놀란 엽연채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더니 생기 가득한 모습으로 화본을 던져 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얼른 가져와 보거라. 그러잖아도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엽영교는 집안에 일이 생기면 엽연채에게 서신을 보내 알려 오는 습관이 생겼다. 이번에 자신이 경인에게 지시한 일 때문에 분명 집안에서는 어떠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추길과 혜연도 서신을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섰다. 엽연채는 서신 봉투를 뜯은 후 안에 적힌 내용을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웃음을 흘렸다.
“하하, 우리 고모는 왜 이렇게 귀여우신 거야?”
그 말에 혜연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추길은 감탄하며 말했다.
“영교 아가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말 몇 마디로 나리를 도발해 마님을 보호하고 아가씨도 곤경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어요. 그리고 모든 잘못은 둘째네와 세자께 돌렸네요. 덕분에 둘째 나리 내외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 말도 못 하게 됐고, 세자께서도 나리와 마님께 꾸지람을 들으셨고요!”
‘과연 계모가 낳은 자식답게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모해하는 데 아주 능해!’
하지만 추길은 이 말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어 그저 말없이 감탄만 하고 있었다. 어쨌든 영교 아가씨가 이쪽 편에 섰으니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권세나 이득을 좇는 사람이었으면 둘째 오라비 편에 섰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됐다면 아가씨는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게 분명했다.
혜연이 서간지를 가져가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여기 보세요. 영교 아가씨께서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전할 건지 여쭤 보시는데요?”
그러면서 그녀는 끝부분을 가리켰다. 엽연채는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저번에 적성대에서 고모가 내기에서 엽이채에게 지는 바람에 팔찌 하나를 빼앗겼잖아. 그래서 머리 장신구를 선물할까 하는데.”
“영교 아가씨는 흑옥을 좋아하세요. 음… 제 기억으로는 아가씨 혼수품 중에 남전藍田 지역 흑옥으로 만든 머리 장신구가 있었어요. 꽃이 두 겹으로 겹쳐진 형태인데 아주 고와요. 그걸 선물하는 건 어떨까요?”
“오, 그거 괜찮구나. 그걸로 하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길아, 네가 머리 장신구를 가져오면서 경인이도 좀 불러오너라.”
“예.”
추길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 동쪽 행랑채로 걸어갔고 그곳에서 머리 장신구를 꺼내 와 엽연채에게 보여 준 후 다시 문밖을 나섰다. 잠시 후, 경인이 폴짝거리며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또 뭐 무슨 속이 뻥 뚫리는 짜릿한 일을 분부하시려고요?”
경인은 흥분으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오늘 송화 골목에서 한바탕 소동을 벌였던 경인은 아직 그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엽연채는 피식 웃었고 혜연이 그를 쏘아보며 타박했다.
“으이구, 이 모자란 놈.”
그러자 경인이 배시시 웃으며 반박했다.
“아가씨께서 다른 사람들은 다 돌려보내고 나만 남겨 놓으신 건 내가 아주 영리하다는 걸 아시기 때문이야. 아가씨, 이번에는 또 무엇을 하면 됩니까?”
경인이 옷소매를 걷어붙이며 말했다.
“내 소유인 마을에 가서 오씨 아저씨와 그 아내에게 말을 전하거라. 상주常州 오수현烏水縣으로 가서 은정랑의 과거를 조사하라고.”
오씨 내외는 온씨가 엽연채에게 골라 준, 시집갈 때 데려가는 종들로, 현재 엽연채가 혼수로 받은 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다.
“예.”
경인이 대답하고 밖으로 나가자 혜연이 엽연채에게 물었다.
“아가씨께서는 그 외실이 상주 오수현 출신이라는 것밖에 모르시잖아요. 그 넓은 오수현에서 대체 어떻게 찾으시려는 거예요? 그리고 찾으면 어쩌시려고요?”
“어쨌든 찾아낼 게다. 지피지기이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더냐!”
전생의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는 은정랑 이 외실을 그저 미워하고 증오하기만 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어떻게 해야 엽승덕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만 생각했었다. 결국 되돌리지 못하자 온씨는 그저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온씨는 자존심 센 사람이었다. 은정랑은 그저 외실에 불과하며 엽승덕에게 자식 하나 못 낳아 준 여인이니 진정한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 자신은 아들딸도 낳아 준 정실부인이라는 데에 자부심이 있었다. 비록 아들이 변변찮은 인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딸이 좋은 가문과 혼약을 맺었으니 은정랑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은정랑이 날뛰면 그냥 날뛰게 내버려 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를 정식으로 상대하는 게 되레 자신의 값어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정체를 제대로 알아볼 생각을 아예 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엽승덕의 치정을 너무 얕잡아 본 것이었다.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외실과 친아버지의 꼬드김에 자신의 일가가 그런 비참한 결말을 맞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전생에서는 자신의 오만함과 과도한 승부욕, 지나친 집요함을 책망하기만 했고, 그 결과 처절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 * *
시간은 천천히 앞을 향해 흘러갔다. 어느덧 엽이채의 혼례식 이틀 전이 되었다. 가문마다 장씨 가문과 정안후부에서 보낸 청첩장을 받았고, 당연히 주씨 가문 또한 청첩장을 받았다.
일상원의 진씨는 금박을 붙인 청첩장을 쳐다보더니 표정이 확 굳었다. 그녀는 녹지에게 청첩장을 팩 던지며 신경질을 냈다.
“엽연채를 보내면 그만이지! 걔네 친정 혼사가 아니더냐?”
진씨는 엽이채가 밉살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엽이채가 사랑의 도피만 하지 않았다면 셋째 그 비천한 놈이 후부의 적녀를 아내로 맞이했겠는가. 그랬다면 자신이 이리 꺼림칙한 기분이 들 일도 없었을 터였다.
그래도 이번 기회에 엽연채의 속을 뒤집어 놓을 수 있었다. 이 혼사는 전 정혼자와 그녀의 혼사를 가로챈 사촌 여동생의 혼사가 아니던가.
‘쯧쯧, 가면 속이 꽤나 쓰릴 테지!’
녹지는 청첩장을 들고선 궁명헌으로 가서 말을 전했다.
“열사흘에 엽씨 가문 둘째 아가씨의 혼례식이 있다고 합니다. 마님께서는 어젯밤 불었던 바람으로 고뿔에 걸리시는 바람에 가실 수 없다고 하십니다. 셋째 마님 친정의 혼사이니 셋째 마님과 셋째 도련님께서 주씨 가문을 대표해 참석하시면 되겠네요.”
다른 사람들의 불참 이유는 설명조차 하지 않고 엽연채와 주운환이 가문을 대표해 참석하면 그만이라는 것이었다. 진씨의 반응은 엽연채가 예상한 그대로였다.
“그럼 마님께서 혼례식 선물로 무엇을 준비해 주시더냐?”
이 말에 녹지의 표정이 다소 굳었다.
“셋째 마님께서도 집안 형편을 잘 아실 겁니다. 곳간도 텅텅 비어 있고요. 은화 이십 냥이면 밖에서 괜찮은 걸 사실 수 있겠어요?”
녹지는 이 돈을 엽연채에게 주는 게 너무나 아까웠다. 하지만 엽연채의 성격을 볼 때 주지 않으면 또 한바탕 난리를 칠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마님도 체면을 중시하는 사람이기에 어쩔 수 없이 이십 냥을 준 것이었다. 만약 이보다 더 바란다면, 우리 주씨 가문은 가난하기로 소문난 집안인지라 한 푼도 더 못 내줄 것이라고 재차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엽연채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녹지가 돌아서서 나가자 혜연이 안색이 어두워졌다.
“이십 냥으로 대체 뭘 삽니까? 분명 아가씨 돈을 따로 보태라는 뜻이겠죠.”
“그럼 팔십 냥을 더 보태자꾸나.”
백 냥짜리 선물이면 주씨 가문 수준에선 그런대로 구색을 맞춘 셈이었다. 엽연채는 엽이채에게 축하 선물을 주고픈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지만, 이건 주운환의 체면과 관련된 일이었다. 게다가 이 선물은 둘째 숙부 일가의 개인 재산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정안후부 공동 재산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아직 시간이 늦지 않은 터라 엽연채는 혜연에게 이십 냥을 들려 보내 마차 한 대를 빌려 오게 했다. 엽연채는 성 중심에 위치한 진보루珍寶樓에 가서 두루미가 새겨진 청자기 한 쌍을 고른 후 은화 백십 냥을 지불했다.
그녀가 진보루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