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그런데 오늘 물건을 사러 밖에 나간 시동이 갑자기 뜻밖의 소식을 전해 왔다. 엽연채는 혼수를 빌려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송화 골목에서 한바탕 난리가 나 가까스로 눌러 놨던 추문이 또다시 들춰졌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부부는 방에서 속을 까맣게 썩이고 있었다.
특히 손씨는 피를 토하고 죽을 지경이었다.
“밖에서 그 난리가 벌어졌으니 아버님께서 분명 저희를 불러 물어보실 겁니다. 그 김에 저희도 고자질하는 것이죠! 박원 공자가 큰아주버님께 그 계집애에게 도와줄 수 있는지 그저 물어봐 달라고 부탁 좀 드렸을 뿐이잖습니까. 그 계집애는 안 도와주면 그만이지 시동을 시켜 사람들에게 그런 말을 하는 바람에 이채와 정안후부의 평판에 흠집이 갔다고 고해바쳐야겠어요!
그 망할 계집애가 주씨 가문에 있어 벌을 내릴 수 없으니 온씨 그 늙은 여편네라도 사당에 가서 무릎을 꿇게 해야 합니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요! 그리고 이 기회에 아버님께 저희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알려 혼수를 다시 모으는 거죠.”
그렇게 말하면 일거삼득의 효과를 볼 것이었다. 우선 장박원이 엽이채를 중요시한다는 걸 모두에게 과시할 수 있고, 둘째론 고자질을 할 수 있으며, 셋째론 곤란한 사정을 늘어놓을 수 있다.
두 사람은 여설을 안녕당으로 보내 상황을 지켜보게 하고서는 방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돌아온 여설은 전 마마가 유이를 밖으로 보내 세자를 모셔오라고 했으며, 이곳에 사람을 보내올 뜻은 전혀 없는 것 같다고 고했다.
손씨와 엽승신은 엽학문이 자신들을 피하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났으나, 엽학문이 자신들을 부르지 않은 상황에서 일도 보기 좋지 않게 되는 바람에 먼저 찾아갈 면목이 없었다. 부부의 가슴속에 울분만 그득그득 쌓여 갔다.
한편, 온씨는 엽승덕이 돌아와 혼수에 관해 묻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거절할지 이미 생각을 다 해 놓았었다. 이때 염교가 손에 서책을 한가득 들고서는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음이 심란해 실로 구럭을 뜨고 있던 온씨는 여종의 손에 들린 서책을 보고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이 서책들은 무엇이냐?”
염교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옥패가 보내온 것입니다. 그 아이가 말하길 어제 마님께서 일찍 귀가하신 후에 영교 아가씨와 큰아가씨는 함께 책방에 들르셨다고 해요. 이 서책들은 마님께서 기분전환하시라고 큰아가씨께서 직접 고르신 거라고 합니다.
영교 아가씨께서 어제 집으로 돌아온 후 말액 두 개를 마저 완성하느라 그만 깜빡하셨다고 해요. 오늘에서야 생각이 나서 옥패를 시켜 이리 보내오신 것입니다.”
온씨는 엽연채가 자신을 위해 책을 골라 주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가슴이 뭉클했다. 염교는 서책들을 항탁 위에 올려놓았다. 온씨는 본래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엽연채가 보낸 거라 하니 어떤 책인가 궁금해서 책장을 넘겨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매일 이 서책들을 봐야겠구나.”
그러자 염교가 말했다.
“그리고 옥패가 해 준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무슨 일이냐?”
“오늘 송화 골목에서 큰일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온씨는 ‘송화 골목’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안색이 확 변했고, 기분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 엽승덕이 송화 골목에서 그 외실과 살림을 차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옥패가 그러는데 오늘 큰아가씨께서 송화 골목에 경인이를 보냈다고 합니다. 경인이가 거기서 한바탕 난리를 쳤다고 해요.”
염교는 이어서 오늘 벌어졌던 일을 소상히 고했다. 그 말을 들은 온씨는 깜짝 놀라더니 기뻐하면서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녀석도 참. 그렇게 소란을 피우면 어쩌자고 그랬대.”
“마님, 아가씨께서는 마님을 보호하고 싶어 그리하신 겁니다.”
채 마마가 끼어들어 엽연채의 편을 들었다. 그 말에 온씨는 마음이 따뜻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염려스러웠다.
“이 일을 아버님과 어머님도 알게 되실 텐데, 그땐 어찌하려고?”
“마님, 걱정 마세요. 옥패가 그러는데 영교 아가씨께서 이미 안녕당에 가셨다고 해요. 그러니 큰아가씨가 불리해지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을 들은 온씨는 감동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영교 아가씨께서도 참!”
염교의 말에 채 마마도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영교 아가씨에게 맡겨 두시면 좋은 결과가 날 겁니다.”
* * *
유이는 밖으로 나간 지 대략 이각二刻(30분)쯤 지나서야 엽승덕을 정안후부로 데려왔다. 걸어가는 내내 엽승덕의 눈빛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왜 집으로 불려 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필시 그 불효녀가 송화 골목에서 벌인 소동을 집안에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소동을 벌인 장본인은 그 불효녀이니 잘못이 있다면 그 불효녀에게 있었다.
안녕당으로 들어간 엽승덕이 엽학문과 묘씨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엽승덕은 엽학문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기다란 침상에 앉아 있는 엽학문은 고민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의젓하고 태연한 엽승덕을 보자 순간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들더니, 어떻게 혼을 내야 좋을지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묘씨가 ‘탁’ 소리를 내며 옆에 있는 항탁 위에 청화자기 찻잔을 내려놓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엽승덕을 쳐다보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큰애야, 외실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겠느냐?”
이 말 한마디로 모든 잘못이 그가 외실을 데리고 살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 되어 버렸다. 엽승덕은 그 말에 분통이 터져 저도 모르게 버럭 성을 냈다.
‘분명 그 불효녀가 벌인 소동인데 어째서 정랑을 탓한다는 말인가?’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일은 정랑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오늘 일은 다 연채가 벌인 짓이지요. 박원이와 이채가 얼마나 불쌍한지 아십니까. 그 불효막심한 것에게 된통 당해 차마 눈 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저는 자매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생각했고, 또 가족 간의 화목을 위해 그 아이를 설득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녀석이 이런 짓을 벌일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말할수록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엽학문도 아들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엽영교가 한발 빠르게 고자질하면서 엽승덕에 대한 험담을 한참 한 뒤라, 그는 엽승덕이 먼저 그 난리를 쳤으리라고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문제가 이래저래 뒤엉켜 분명치 않으니, 짜증은 극에 달한 상황에서 이 언짢은 기분을 풀 데가 없었다. 그러니 엽승덕이 외실을 데리고 사는 데 화살을 돌릴 수밖에.
한편 엽승덕의 말을 들은 묘씨는 자신의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계모였고, 큰아들을 포함해 세 아들 모두 자신이 낳은 친자식이 아니었다.
묘씨가 제삼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엽승덕의 눈과 마음속에는 그 외실밖에 없었고, 딸에게는 조금의 자리도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엽승덕과 그 외실이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이라 그 금수만도 못한 장박원과 엽이채를 돕고 친딸에게 화를 입히는 것이었다.
묘씨는 후처로서 흠 잡힐 부분도 없고 영리한 사람이라 늘 자신과 관련 없는 일에는 나서지 않았다. 즉 이익은 좇고 해가 되는 건 피해야 한다는 이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후처와 계모이기 이전에 여인이었고, 또한 남편과 딸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실부인의 입장에서 봤으면 첩을 총애하고 정실부인을 박대하는 이런 인간을 죽도록 미워하고 증오하는 게 당연했다.
묘씨는 진작부터 엽승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전에는 그가 힘이 있었고, 훗날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이며, 적장손인 엽균 또한 그와 사이가 좋았으니 엽승덕과 온씨의 일에 끼어들지 않았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엽승덕은 이제 끈 떨어진 연이고 득세를 한 건 엽승신이지 않은가. 장차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은 분명 엽승신과 그의 아들 엽영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수년간 쌓아 온 엽승덕에 대한 악감정을 전부 쏟아 냈다.
“우선 이채의 일은 나중에 논하자꾸나. 지금 밖에선 네가 외실을 끼고 살더니 정실부인과 친자식을 요절내려고 한다고 떠들고들 있다.”
묘씨가 은정랑을 물고 늘어지려는 것을 보고는 엽승덕의 눈빛이 더욱 어둡고 싸늘하게 변했다.
“어머니, 대체 누가 그런 허튼소리를 한답니까? 그리고 제가 정랑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뭐 어때서 그러시는 겁니까? 제가 온씨와 그 불효막심한 것을 어떻게 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모녀는 자신들이 얼마나 유세를 부리며 윤택하게 사는지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묘씨의 눈빛에서 순간 혐오감과 조소가 감돌았다.
“네 생각이 어떻든 간에 밖에선 듣기 민망한 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그 외실을… 일단 정식으로 정안후부로 데리고 들어오거라. 네 아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절을 올린 후 차를 올리게 해. 그런 다음 정식으로 이낭으로 삼는 게지. 아니면 멀리 보내 버리든가.”
엽승덕은 속으로 부아가 치밀었다. 그는 멸시 어린 얼굴로 묘씨를 쳐다보며 속으로 사납게 욕했다.
‘역시 계모는 계모구나. 결국 오늘 그 악랄한 속내를 드러내는군!’
“전에 두 분께서 죽어도 정랑을 들일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나요?”
그 말에 엽학문은 미간을 심하게 찌푸렸다. 그는 사내가 외실 몇 명쯤 거느리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밖에서 외실과 살림을 차리는 것도 사람들에게 욕 한번 먹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심지어 남녀 간의 둘도 없는 연정은 미담美談으로 전해질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엽학문이 생각하는 외실은 유순하고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인이었다. 몰락한 귀족 아가씨 혹은 기예는 팔지만 몸은 팔지 않는 재능이 넘치는 기녀까지는 가능했지만, 은정랑 같은 여인은 절대 아니었다.
이 은정랑이라는 외실은 온씨보다 고작해야 한두 살 정도 어릴 뿐인 데다 혹까지 달린 과부였다. 이런 여인을 집안에 들이는 건 풍속을 문란케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엽학문은 은정랑을 심하게 멸시했다.
그래서 엽승덕이 그녀와 알고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엽학문은 그를 질책하며 은정랑을 정안후부로 데리고 들어오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또한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겠거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그녀를 멀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리되기는커녕 가면 갈수록 깊게 빠져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끝내는 이런 사태까지 벌어져 버렸다.
묘씨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때는 그때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그 사람을 집안으로 들이는 것이 안 들이는 것보다는 낫다. 안 그렇습니까, 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