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엽연채가 정국백부에 시집간 지도 벌써 두 달쯤 지난 시점이었다. 정안후부에서 딸을 시집보내는데 사촌 여동생이 형부 될 사람과 눈이 맞아 도망을 쳤다는 추문은 하루하루 힘들게 일하는 백성들의 머릿속에서, 그리고 계속해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천천히 잊히고 있었다.
그동안 정안후부와 장씨 가문은 사주 때문에 엽연채는 주씨 가문과 혼약을 맺었고 엽이채는 장씨 가문과 혼약을 맺었다고 보기 좋게 포장을 해 놓았었다. 그리고 엽연채가 주씨 가문에 시집가서 별 탈 없이 잘 살자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믿기 시작한 눈치였다.
그런데 오늘 엽연채의 시동이 내뱉은 ‘사촌 여동생이 형부를 꾀어 도망갔다!’라는 말 때문에 장씨 가문과 정안후부가 오랫동안 공을 들여 포장해 놓은 결과가 한순간에 원점으로 돌아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건 이젠 빼도 박도 못 하는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 일은 순식간에 퍼져나갔고 엽부에서는 엽영교가 제일 먼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엽연채의 혼수 일로 초조했던 그녀는 자신의 후안무치한 오라비가 온씨를 압박해 엽연채의 혼수를 빼앗아갈까 봐 걱정하던 차였다. 그래서 엽영교는 돈으로 건달 몇 명을 사서 송화 골목에서 무슨 낌새가 있는지 지켜보게 했다. 그런데 엽연채가 오늘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아주 흥분한 엽영교는 이 일에 얼른 불을 지피고 싶어 안녕당으로 일러바치러 달려갔다. 더군다나 얼마 안 있으면 이 일이 안녕당에도 전해질 텐데 그럼 어머니와 아버지는 연채를 나무랄지도 몰랐다.
둘째 오라버니 내외가 달려와 옆에서 부채질을 해 대고 큰오라버니까지 교활하게 궤변을 늘어놓으면, 연채와 큰새언니가 골치 아프게 될 것이 분명했다.
‘내가 먼저 선수를 쳐서 일러바쳐야지!’
마침 점심을 먹을 시간이라 엽학문과 묘씨는 방금 막 식사를 마치고 서차간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바깥쪽 발이 걷히더니 엽영교가 안으로 들어오며 인사했다.
“아버지, 어머니.”
“얘는. 방금 전에 밥 먹으라고 부를 땐 오지 않더니 왜 이제야 오는 게냐.”
묘씨가 말했다.
“요 며칠 동안 가슴이 답답해서 밥 생각이 안 들었어요. 그래서 하인들에게 아침에 먹다 남긴 달곰한 죽을 데워 오라고 해서 과자 두 개와 곁들여 먹었어요. 그러고 나니 속이 편해지더라고요.”
엽영교가 웃으며 앞으로 다가오더니 다정하게 묘씨 옆 하좌에 놓인 수돈에 걸터앉았다. 묘씨는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으이구, 요 녀석.”
여종이 차를 내오자 엽영교는 찻잔을 들고 차를 홀짝홀짝 들이켜며 본론에 들어갔다.
“오늘 원래 만들고 있던 말액 두 개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는데, 방금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지 뭐예요. 그래서 만들 생각이 싹 달아났어요.”
“안 좋은 일이란 게 무엇이냐?”
묘씨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엽학문도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을 멈칫했다.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들어 눈꺼풀이 절로 떨렸다. 요 이틀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고 둘째 아들 내외도 한바탕 난리를 쳤는데, 정말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엽영교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저께 둘째 오라버니와 둘째 새언니가 이채의 혼수를 홀랑 날려먹었잖아요!”
그 일을 다시 언급함으로써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과연 엽학문은 그 말을 듣자 누그러졌던 노기에 다시 화르륵 불이 붙은 모양인지 낯빛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왜, 그것들이 또 무슨 못된 짓이라도 벌였느냐?”
그러자 엽영교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에요. 또 못된 짓을 벌였더라고요! 얼마 전에는 혼사를 가로채며 소란을 피워댔잖아요. 다 둘째 오라버니네가 잘못한 거였죠. 그래서 그저께 아버지께서 둘째 오라버니 내외에게 스스로 방법을 강구해서 알아서 책임지라고 하셨잖아요.
그랬더니 둘째 오라버니 내외가 또 연채를 곤경에 빠뜨린 거 있죠. 저번에도 그러려고 했잖아요. 있는 말 없는 말 해 대면서 아버지가 연채를 압박하게 만들어 그 아이의 혼수를 가져가려고 했죠. 결국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요.
아무튼 이번에는 큰오라버니를 이용해 큰오라버니가 연채에게 혼수를 내놓으라고 압박하게 만들었어요. 둘째 오라버니 내외는 뒤에서 사람을 조종하며 돈을 세고 있던 거죠.”
엽영교는 말 한번 기가 막히게 했다. 사실 이 일은 둘째 오라비 내외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장박원이 배후에서 벌인 짓이었다. 하지만 장박원이 뒤에서 벌인 짓이라고 하면 엽학문은 아마 장박원이 엽이채를 귀히 여긴다고 생각해 되레 기뻐할지도 몰랐다.
그럼 일이 장박원이나 엽이채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도록 손 놓고 지켜보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엽연채에게 분별없이 행동한다며 그녀를 또 나무랄 것이었다.
그래서 엽영교는 이 일을 전부 둘째 오라버니 내외가 벌인 짓으로 포장했다. 그들이 사람들을 조종한다고 말하고, 또 지난번에 엽학문도 조종했다고 말함으로써 그를 도발하여 분노하도록 한 것이다.
과연 엽학문은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둘째가 정말 갈수록 오만방자하게 굴며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 벌여 댔다. 그 많은 돈을 다 날려 먹고도 반성하기는커녕 저번에는 은근히 자신을 조종해 큰손녀를 압박하게 만들더니, 그게 통하지 않자 이번에는 큰아들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는 정말 참을 만큼 참았다고 생각했다.
엽학문이 대로하여 어쩔 줄 몰라 할 때 묘씨가 끼어들었다.
“네가 들은 게 이게 다더냐?”
“아뇨!”
엽영교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 갔다.
“큰오라버니가 둘째 오라버니 내외를 도와 연채에게 혼수를 요구했어요. 그러자 화가 난 연채가 시동을 보내 큰오라버니께 혼수는 빌려 주지 않을 거라고 알렸죠. 그랬더니 큰오라버니께서 길거리에서 그 시동을 때려죽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신 거예요!
당연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다 몰려들었죠. 큰오라버니가 또 유명하잖아요. 외실을 데리고 사는 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 큰오라버니가 친딸의 시동을 때려죽이겠다고 하고, 또 연채에게 도량이 좁아 둘째 내외에게 혼수를 빌려 주지 않는다고 나무라니까 그 모습을 본 백성들이 벌집을 쑤신 듯 들끓었대요.
그 금수만도 못한 것들은 도와주고 친딸은 업신여긴다고, 큰오라버니와 그 외실에게 똑같이 금수만도 못한 인간들이라고 욕을 해 댔다고 하더라고요.”
그녀는 벌어진 사건 속에서 지엽적인 부분만 골라 이야기했다. 그렇게 하니 분명 경인이 떠들어 댄 말인데도 엽승덕이 한 말처럼 들렸다. 엽영교는 이참에 아예 쐐기를 박으려고 엽승덕이 조심성 없이 거리에서 욕지거리를 해댔으며, 그가 외실을 데리고 산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다고 한 것이었다.
“큰오라버니께서 소란을 피우자 사람들은 이채가 형부를 꾀어 달아났다는 이야기를 또 꺼냈어요. 저희 가문과 장씨 가문에서 가까스로 그 사건이 잊히게 만들었는데, 이렇게 수선을 떠니 사람들도 그 일이 다시 떠오른 거죠. 우리 엽씨 가문 여인들의 평판에 거듭 흠집이 난 겁니다. 전 정말이지 앞으로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닐지 모르겠어요!”
그러더니 손수건으로 눈가를 지그시 누르며 마음이 아프고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격노한 엽학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전 마마는 당장 가서 첫째와 둘째를 불러오너라!”
엽영교가 두 눈을 살짝 반짝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좀 있으면 또 둘째 새언니께서 울면서 들어오겠네요. 그러면서 이렇게 난리가 났는데도 혼수를 마련하지 못했다고 하겠죠.”
그 말을 들은 엽학문은 말문이 막혔다. 어찌해야 좋을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그는 둘째 아들 내외 일로 고민이 많았다. 엽이채가 좋은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되면서 엽학문은 둘째 아들네를 중요히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 둘째 아들네 일로 소란이 끊이지가 않았다.
엽학문은 둘째 아들 내외가 혼수를 전부 날려 먹은 일로 적잖이 분노했지만, 그렇다고 엽이채가 정말 혼수 없이 시집가 망신당하고 체면이 깎이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둘째 내외가 정말로 엽연채의 혼수를 가져올 수 있다면 자신도 그에 동의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 내외는 혼수를 가져오지도 못했을뿐더러 볼썽사납게 법석만 떨고 있었다.
그러니 마음 같아서는 바로 둘째 내외를 불러다 혼쭐을 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또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우는소리를 해 대며 집안에 혼수를 요구할 테니 이를 도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집안은 현재 거의 거덜이 날 지경이었지만 정말로 돈을 모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마을이나 토지를 매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정말 최후에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것들은 소위 알을 낳는 암탉이니 절대로 팔 수 없었다.
물론 빚을 내는 것도 가능했지만, 엽학문은 엽이채 혼사로 빚까지 지고 싶지는 않았다. 만약 빚을 내야 한다면 응당 둘째 내외가 그들 이름으로 빌려야 했다.
전 마마가 돌아서서 나가려는 순간 엽학문이 얼른 그녀를 불러 세웠다.
“둘째네가 오면 분명 또 거짓 눈물을 보일 것이다. 이 일은 큰애가 벌인 짓이니 유이를 보내 큰애를 불러오도록 해라!”
“예.”
전 마마는 바로 유이를 찾아가 밖으로 나가 세자를 모셔 오라고 전했다.
묘씨가 슬며시 엽영교를 꼬집자 그녀는 ‘아얏’ 소리를 내며 모친을 쳐다봤다. 묘씨가 그녀를 흘겨보며 주의를 주었지만 엽영교는 도리어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려 웃음을 참았다. 원하던 대로 둘째 내외가 항변할 기회마저 빼앗았으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둘째 내외는 엽이채의 여종 류아에게서 엽이채가 장박원에게 부탁해 방법을 강구하도록 했다는 이야기를 진작에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장박원은 어제 엽이채에게 서신을 보내 엽승덕에게 엽연채의 혼수를 빼앗아 달라고 부탁한 사실을 전했다. 서신에다 이 일은 십중팔구 성사될 것이라는 희망찬 말도 덧붙였다.
엽승신과 손씨는 이 소식을 듣고 속으로 대단히 기뻐했다. 특히 두 가지 점이 흡족하기 그지없었다.
첫째로는 자신들의 딸이 보통내기가 아님을 알고 의기양양해진 것이었다. 딸이 장박원의 마음을 확실히 붙들어 놓아 그가 딸을 이리 귀히 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혼수가 없는데도 내치지 않고 그녀를 도와 혼수를 마련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는 딸의 수완이 상당하다는 이야기라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났다.
둘째로는 엽연채의 혼수를 다시 빼앗아올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득의양양해진 것이었다. 거기다 엽승덕이 나서서 일을 진행하니, 그야말로 엽연채와 온씨의 심장을 도려내는 일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