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6화 (56/858)

제56화

채 마마가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마님. 큰아가씨만 생각하시고 꿋꿋이 살아가셔야 합니다. 세자는 더 이상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돌아가신 셈 치면 됩니다!”

그녀는 마지막 말을 하며 이를 빠드득 갈더니 다시금 이어서 말했다.

“사실 저런 사내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사내들이란 거의 첩실에게 홀딱 빠져서 살고들 있죠.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식 하나 바라보며 살아도 그런대로 잘들 지내지 않습니까.”

채 마마는 그 말을 하다가 조금 멋쩍어졌다. 다른 정실부인들이 떵떵거리며 잘 살 수 있는 건 사실 아들딸이 제구실을 잘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님은…….’

물론 마님도 예전에는 그렇게 잘 사실 수 있었다. 그러나 큰아가씨의 혼사가 틀어지면서 마님의 버팀목과 당당함도 함께 꺾여 버리고 말았다.

“마님, 그럼 혼수를 빌려주는 건 어떻게 하시렵니까. 큰아가씨께 서신을 정말 보내실 건가요?”

채 마마가 물었다. 그러자 온씨는 싸늘한 눈빛을 보이더니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냉소를 지었다.

“꿈도 꾸지 말라 하거라!”

“그럼 방금 전에는 왜 그러겠다고 하셨어요?”

채 마마가 놀라 묻자 온씨는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내가 아침에 그리하겠다고 답했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꾸면 어떻게 보이겠나. 더군다나 어제 점심에 내가 외출을 하지 않았더냐. 아마 나리께서 수상하게 생각해 상황을 알아보려고 할 거고, 내가 연채를 만났다는 걸 알게 되시겠지. 그럼 연채가 뭐라고 해서 내 마음이 바뀌었다고 추측할 게다.”

물론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온씨는 모든 사람들의 화살이 엽연채에게 향하는 걸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 설령 정말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모두 자신이 감수할 것이었다.

이렇듯 온씨의 머릿속에는 온통 엽연채를 위한 생각뿐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이런 마음이 엽연채에게 전해지지는 않았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경인을 엽승덕에게 보냈다. 엽승덕은 관아에서 나와 송화 골목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가 은정랑의 거처에 다다를 무렵 갑자기 경인이 나타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엽승덕은 시동처럼 보이는 자가 휙 튀어나와 자신의 앞을 막자 기분이 상당히 언짢아졌다.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넌 어느 가문의 하인이기에 이리 법도도 모르는 것이냐? 감히 내 앞을 가로막다니.”

그때 경인을 알아본 엽승덕의 시동 봉춘이 말했다.

“이 아이는 큰아가씨의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입니다.”

“큰아가씨?”

엽승덕은 순간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아듣지 못했다.

“전 나리의 친따님을 모시는 하인입니다.”

이에 경인이 조롱이 은근히 섞인 어조로 자신을 소개했다. 엽승덕은 그제야 엽연채를 떠올렸고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아이가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것이냐?”

“나리 말씀이 참 이상하시네요. 분명 나리께서 먼저 일이 있어서 저희 아가씨를 찾지 않으셨습니까. 안 그러면 저희 아가씨가 뭣 하러 나리를 찾으시겠어요!”

경인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정안후부 하인이 감히 그따위로 상전에게 대답하는 것이냐!”

봉춘이 버럭 화를 내자 경인은 ‘쳇’ 하며 혀를 찼다.

“누가 정안후부 하인이라는 겁니까? 저희 아가씨는 주씨 가문 셋째 마님입니다. 그러니 저는 주씨 가문 하인이지요!”

“이게……!”

봉춘이 앞으로 다가서자 엽승덕이 손을 뻗어 그를 멈춰 세웠다. 엽승덕은 장박원 일을 떠올리며 어쩌면 엽연채가 혼수와 관련해 상의하자고 하인을 보내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선 그 금수만도 못한 것들에게 동전 한 닢도 빌려 주지 않을 것이니 세자께서는 괜히 마음 졸이지 마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엽승덕의 낯빛이 단박에 어두워졌다.

‘이 불효막심한 것이 혼수를 빌려주기는커녕 제 아비한테 욕지거리까지 해!’

“이런 몹쓸 놈을 봤나! 지금 누구보고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한단 말이냐!”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너 오늘 내 손에 죽어 봐라!”

대로한 엽승덕 곁에서 봉춘 역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렇게 장박원과 엽이채를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하면 주인나리와 은정랑은 뭐가 된다는 말인가?’

경인에게 홱 달려든 봉춘은 그를 붙잡아 흠씬 두들겨 주려 했으나 경인은 쏙쏙 잘도 빠져나갔다. 거기다 경인은 키는 작아도 힘은 보통 사람의 네다섯 배나 되는 장사였다. 경인이 봉춘의 뺨을 한 대 후려치자 봉춘의 머릿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비틀거리다가 결국 바닥에 엎어진 봉춘은 놀라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앞은 바로 은정랑이 지내는 거처였다. 그는 일어서며 다시금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목춘아, 이자야! 어서 나와 봐. 이 자식 좀 두들겨 패 줘!”

하지만 경인의 목소리는 그보다 더 컸다.

“큰일 났습니다! 야단났어요! 글쎄, 정안후부 세자께서 첩실 때문에 친딸의 혼수를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거기다 말을 전하러 온 하인도 때려죽이려고 하고 있어요! 사람 살려! 사람 살려!”

그 말을 들은 엽승덕의 표정이 확 굳었다.

“잘난 불효녀가 종놈을 아주 막돼먹게 가르쳤구나. 저놈을 붙잡아라! 입을 틀어막아!”

때마침 봉춘이 부른 하인들이 밖으로 나왔다. 회색 옷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두 하인이 앞으로 달려와 경인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경인은 되레 ‘흥’ 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잡으려면 잡으세요. 순순히 잡혀 줄 테니까!”

그러더니 양손을 내밀어 묶으라는 시늉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 말을 덧붙였다.

“그 간통이나 하는 불결한 곳으로 끌고 가 매질하는 게 좋을 거예요!”

‘간통이나 하는 불결한 곳’이란 말을 들은 엽승덕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경인에게 사납게 삿대질했다.

“네, 네 이놈……!”

그러나 큰길과 양쪽 작은 골목에는 이미 사람들이 모여들어 이쪽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수군거리기 시작한 후였다.

보는 눈이 많아지자 경인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잡아가세요! 때려죽이시라고요! 하지만 내일이면 제 주인께서 당신들에게 절 내놓으라고 하실 겁니다. 절 내놓지 못하면 저희 아가씨가 관아에 고발하시겠죠! 저야 노비이니 죽고 사는 게 주인께 달려 있기는 하지만, 전 당신들의 하인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하인을 때려죽일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죽으면 당신들은 관아에 끌려가 정청正廳 앞에 무릎을 꿇겠죠. 그럼 부윤府尹(부府의 최고 책임자)께서 경당목驚堂木(법관이 법당에서 주의를 환기하거나 경고하기 위해 내리쳐 소리를 내던 막대기)을 두드리며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당신들을 심문하시겠죠? 그럼 저희 아가씨께서는 아버지가 자신의 시동을 때려죽였다고 진술하실 거예요.

당연히 부윤이 왜 때려죽였냐고 묻겠죠? 그럼 아가씨는 얼마 전 혼례식이 있었는데 사촌 여동생이 부군이 될 사람을 꾀어 달아나는 바람에 다른 가문으로 시집가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씀하실 테고요. 그리고 이젠 사촌 여동생과 전 정혼자, 이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 혼례를 올리려는데 혼수를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자 자신의 친아버지가 그것들을 도와 자신의 혼수를 빼앗으려고 했다고 고하시겠죠!”

경인이 쉬지 않고 쏟아내자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백성들이 따라서 시끄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한 말 많은 아주머니가 나서서 경인에게 물었다.

“왜 친아버지가 자기 딸을 돕지 않고 그 금수만도 못한 것들은 돕는 거예요?”

“예?”

경인은 손가락을 펴서 귀에 갖다 댄 후 ‘음음’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질문 한번 잘하셨습니다. 이 친아버지란 사람이 외실外室 때문에 정실부인과 딸자식을 못 죽여서 안달이 난 거죠! 자신과 그 첩이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니 당연히 그 금수만도 못한 것들을 도우려는 겁니다!”

“네, 네 이놈! 어디서 그런 악독한 말로 중상모략을 하는 것이냐!”

엽승덕은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그래도 체면을 차리겠다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언제 정실부인과 딸자식을 때려죽였느냐! 네 그 빌어먹을 눈을 똑바로 뜨고 보거라. 내 부인과 딸은 멀쩡히 잘만 살아 있다.”

“나리나 똑바로 들으십쇼. 제가 언제 이미 때려죽였다고 했습니까? 전 못 죽여서 안달이 났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친딸과 정실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그 금수만도 못한 것들을 돕는 겁니까?”

경인이 시원하게 쏘아붙이자 주변에 있던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는 크게 분노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특히 아낙네들이 그러했다.

“에휴, 저 사람이 정안후부 세자인가 봐. 쯧쯧, 저 사람이 외실이 생기더니 정실부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소리를 내 진작에 들었어.”

“저번에 시집갔던 엽씨 가문 큰아가씨가 바로 저 사람의 여식인 거네! 분명 장씨 가문으로 시집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몰락한 가문의 서자에게 시집을 가게 됐지. 아이고, 가엾어라!”

“정안후부 세자는 어찌 친딸을 안 돕고 금수만도 못한 것들을 돕는 거야? 어떻게 저런 아버지가 있을 수 있는지!”

그때 우악스럽게 생긴 한 사내가 목청을 높였다.

“감히 내 딸을 업신여기는 놈이 있으면 난 그놈을 잘게 다져서 개에게 먹이로 줄 거요! 한데 정안후부 세자는 금수만도 못한 것들은 돕고, 자기 딸은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니. 저런 사람을 아버지라고 할 수나 있나! 사람도 아니지!”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멸시의 눈빛으로 엽승덕을 쳐다봤다.

“이놈……! 허튼소리 말거라! 내가 언제 그 금수… 남을 도왔다는 것이냐!”

엽승덕이 말했다.

“에, 아니셨어요? 그럼 전 가 보겠습니다!”

경인은 그렇게 말하고선 뒤돌아서 가 버렸다.

엽승덕은 뒷골이 쑤셔 하마터면 땅에 고꾸라질 뻔했다. 다행히 봉춘이 얼른 그를 잡아 주었다. 그때 처소에서 검푸른 비갑比甲(배자에서 소매를 없앤 겉옷)을 입은 여종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뛰쳐나왔다.

“우, 우선 돌아가시지요!”

엽승덕은 자신을 둘러싼 하인들의 부축을 받으며 딱한 몰골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붉게 칠해진 대문이 쾅 닫히더니 안에서 단단히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사람들이 그들을 우롱하며 즐거워하는 소리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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