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5화 (55/858)

제55화

엽연채는 진지한 눈빛으로 엽영교를 쳐다봤다. 그러자 엽영교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내게 너와 엽이채는 별 차이가 없었어. 그래서 어느 편도 들지 않았지. 하지만 이번 일은 무조건 엽이채와 둘째 새언니 잘못이야. 그것도 크나큰 잘못이지. 그래서 갈수록 엽이채가 꼴도 보기 싫고 너에게는 호감이 생기고 있단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상식적인 사람들은 이번 일은 분명 숙모와 엽이채가 저지른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죠. 그런데 그 당사자들은요?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것 같나요? 전혀 그러지 않으니 그야말로 소인배들인 거죠.

아직 출가하지도 않았는데 사람 됨됨이가 이 모양이에요. 진짜 득세를 하고 나면 아마 저를 도와주기는커녕 짓밟으려 들 거예요. 설령 도와준다 하더라도 체면상 도와주는 척만 하겠죠. 실질적으로 저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겁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죠. 거지가 밥을 구걸할 때 마음씨가 착한 사람은 좋은 밥에 좋은 반찬을 주거나 적어도 깨끗한 음식을 줄 겁니다. 하지만 작은어머니 같은 사람은 적선하기 전에 분명 밥 안에 진흙 한 줌을 넣어서 줄 거예요. 심하면 인분을 비벼서 줄지도 모르죠. 거지가 한 숟갈 입에 떠 넣자마자 구린내가 진동할 겁니다.”

그러자 온씨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는 좋은 차를 맛보는데도 무슨 맛인지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늦었으니 나 먼저 돌아가야겠구나. 고모와 잘 놀다 가렴.”

“어머니.”

온씨가 비틀거리자 엽연채가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따라 나섰다.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그러자 온씨가 손사래를 치며 거절했다.

“됐다. 넌 시집간 지도 얼마 안 되었는데 친정집에 자주 들리면 시어머니가 못마땅하게 생각하실 게다.”

“그럼 새언니, 저랑 같이 가요. 자수실 같은 건 나중에 고르면 되니까요.”

엽영교의 말에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사양했다.

“놀다 오세요. 채 마마와 염교가 곁에 있으니 괜찮아요.”

어머니의 완강한 모습에 엽연채는 묵묵히 그녀를 부축해 문밖으로 나설 뿐이었다. 엽연채 일행은 별실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간 후 마차가 세워져 있는 뒷마당으로 갔다. 온씨가 마차에 오르자 엽연채는 채 마마를 끌어당기며 당부했다.

“마마도 알겠지만 어머니는 쉽게 화를 내고 기분이 상하는 분이시니 잘 지켜봐야 돼요.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으면 나한테 꼭 알려 주고요. 절대로 숨기면 안 돼요.”

그러자 채 마마가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우리 아가씨께서 이제 정말로 다 크셨네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 아가씨. 제가 마님을 잘 보필하겠습니다.”

채 마마는 장담하며 마차에 올랐다. 그러나 마차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엽연채의 눈빛에는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말렴. 네 아버지가 하루이틀 그런 것도 아니고 네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는 모습도 한두 번 본 게 아니잖니. 그리고 네 아버지가 정말로 마음을 안 바꿀 것 같으면 새언니도 현실을 직시해야지. 하루 종일 헛된 기대와 원망에 사로잡혀 세월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엽영교의 말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는 늘 엽승덕에게 헛된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무심한 몸짓 하나, 냉담한 눈길 한 번에 어머니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품었고, 그런 후에 슬퍼하고 실망하기를 거듭했다.

엽영교가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쨌든 기왕 나왔으니 이제 가서 자수실도 고르고 화본도 구경하자!”

“네. 어머니 드릴 화본도 몇 개 골라야겠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엽영교가 갑자기 엽연채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런데 새언니는 화본을 좋아하지 않으셔. 차라리 자수실을 더 골라서 구럭을 몇 개 떠 드리는 게 더 좋을 거야. 아니면 손수건을 몇 장 만들어 드리는 것도 좋고. 대체 화본이 뭐가 재미있다는 건지 모르겠구나.”

이에 엽연채는 두 눈을 반짝이며 반박했다.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요즘 『쌍사결雙思結』이라는 화본을 보고 있는데 얼마나 흥미진진한지 몰라요. 오늘은 다음 권을 사려고 나온 거예요!”

엽영교는 그래도 입가를 씰룩이며 대거리했다.

“재자가인才子佳人(재주 있는 사내와 아름다운 여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 등장하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내용이잖아? 그게 뭐가 재미있니?”

“왜 재미가 없어요? 책 속에는 아름다운 내용이 가득 담겨 있잖아요. 보면 마음을 얼마나 상쾌하게 만들어 주는지 몰라요!”

엽연채도 지지 않고 입을 삐죽거렸다. 이 세상에는 형편없는 사내들이 너무 많아 행복이 가득한 아름다운 사랑을 느끼고 싶으면 화본을 봐야 한다. 배반하지 않는 건 화본밖에 없으니까.

아웅다웅하던 두 사람이 대로 밖으로 나와 모퉁이를 돌자 도성에서 가장 큰 책방인 호한서장浩瀚書庄이 보였다. 책방을 가득 채운 서책들을 보자 엽연채는 뛸 듯이 기뻤다. 그녀는 먼저 재자가인이 등장하는 화본과 인문지리와 민간 농담에 관한 서책들을 몇 권 고른 후 관아의 사건 판결을 다룬 머리 아픈 서책도 몇 권 골랐다.

그러자 혜연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그새 취향이 바뀌신 거예요?”

“이것들은 어머니를 위한 서책이야. 어머니는 지금 집안일도 관장하지 않고 계시잖아. 너무 한가한 것도 좋지 않으니 이것들로 주의를 분산시켜 드리면 좋을 거 같아서 그래.”

엽연채는 부드럽게 설명했다. 온씨는 지금 엽승덕 때문에 마음을 졸이고 있으니 재자가인이 등장하는 화본은 볼 맛이 전혀 나지 않을 터였다. 하여 다른 흥미로운 서책을 고른 것이다. 엽연채는 계산을 마친 후 자신 대신 온씨에게 가져다주라고 엽영교의 여종 옥패의 손에 서책들을 들려 주었다.

책방에서 나온 엽연채와 엽영교는 자수 상점에 들려 쓸 만한 자수실을 골랐다. 구경을 마친 엽연채는 자신의 마차로 엽영교와 그녀의 여종을 정안후부 측문으로 데려다준 다음, 성 북쪽에 위치한 주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 * *

한편, 집으로 돌아온 온씨는 귀비탑에 옆으로 누워 몽롱한 머리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당시 자신과 엽승덕은 아이 티가 남은, 소년 소녀 부부였다. 혼담이 오갔을 그 당시 자신은 그를 좋게 보았다. 용모도 준수하고 태도도 온화하고 의젓한 엽승덕은 자상하고 세심하게 자신을 배려해 주었다.

그도 자신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도, 기쁜 마음으로 아내로 맞이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자신은 두 사람이 한평생 화목하게 백년해로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엽승덕이 밖으로 뛰쳐나가 첩실 은정랑과 함께 살며 집안을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을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온씨는 저녁밥도 거르고 이튿날 아침까지 그렇게 자리에 누워만 있었다.

다음 날 해가 뜨고 나서야 그녀는 축 처진 상태로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한 후 아침상을 받았다. 하지만 뭘 먹어도 밍밍한 것이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온씨는 대충 멀건 죽 한 그릇을 비운 후 귀비탑에 다시 기대어 있었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자께서 오셨습니다.”

엽승덕이 돌아왔다는 말을 들은 온씨는 놀라서 얼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꼿꼿이 펴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바깥쪽 발이 휙 하고 걷히며 옷깃이 둥근 상앗빛 금포를 입은 엽승덕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편치 않은 기색으로 서차간으로 걸어오더니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입을 열었다.

“연채를 찾아가 봤소? 일은 어떻게 됐소?”

온씨는 초조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보자 대번에 심사가 한층 뒤틀렸다. 지금 자기 딸을 걱정하는 것인가 아니면 장박원과 엽이채 그 연놈들을 돕고 싶은 것인가? 그녀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직 연채를 만나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소리요?”

엽승덕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이채와 박원이의 혼례식이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소. 더 이상 꾸물거리면 안 된다는 말이오! 연채를 만나서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한나절 이상 걸릴 테고 또 그 아이가 혼수를 꺼내 오는 데 하루는 걸릴 것이오. 그리고 그걸 이쪽으로 보내는 데도 하루가 걸리겠지. 받은 후에 정리하고 상자에 담아 붉은 끈으로 묶어야 하는데, 그럼 시간이 얼마나 남았겠소?”

그의 말을 들은 온씨는 심장이 찢어져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박원이, 박원이! 참 정답게도 부르는구나!’

그의 말에서 딸자식에 대한 관심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그저 장박원을 도우려고 안달이 난 모습, 또 장박원이 불행해질까 초조해하는 모습이었다.

기침을 한 온씨는 삭신이 나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염교를 시켜 연채에게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엽승덕은 그제야 안색이 누그러졌다.

“다 연채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오.”

그러더니 홱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그가 밖으로 나가자 온씨는 휘청거리더니 맥이 풀려 귀비탑에 기댔다.

“마님…….”

채 마마가 눈시울을 붉히며 앞으로 다가왔다. 온씨는 기가 막혀 ‘허’ 하고 짧은 탄식을 내뱉더니 처연한 냉소를 지었다.

“자네가 보기에는 방금 세자께서 연채를 도우려는 것처럼 보이던가?”

채 마마가 창백한 얼굴로 대답했다.

“세자께서는 아가씨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녀도 남몰래 옆에서 엽승덕의 표정과 말투를 관찰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장박원이 겪고 있는 시련에 안쓰러워하고 초조해하는 사람처럼 보일 뿐이었다.

온씨의 충복인 채 마마는 당연히 온씨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길 바랐다. 그러나 엽승덕이 정말로 마음을 돌릴 생각이 조금도 없다면 아예 그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일 것이었다.

“마님… 괜찮으신 거죠?”

채 마마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난 아주 괜찮다!”

온씨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난 아주 괜찮을 것이다. 절대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야. 나에겐 연채가 있으니까! 그 아이는…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서자에게 시집을 갔으니 한평생 사람들이 업신여길 것이다. 이미 충분히 가엽고 억울한 아이지. 아버지도 저 모양이고 오라버니인 균이도 변변치 않으니 나마저 무너져 버리면 그 아이가 의지할 곳이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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