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엽영교는 참으로 의아해했다. 큰오라비는 엽균에게만 잘해 주었고 엽연채나 엽미채는 모르는 사람만도 못하게 대했기 때문에 부녀간의 정이 깊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골이 매우 깊었다.
큰오라버니가 새언니를 대하는 태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만 떼어 놓고 보면 온씨가 흉악한 죄인이라도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만약 큰오라버니가 정말로 마음을 고쳐먹었다면야 이보다 더 좋은 일도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엽영교는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런데 엽연채의 아리따운 얼굴에는 먹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고, 반짝거리던 눈동자는 냉랭한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엽연채는 전생의 기억이 떠올리고 있었다. 전생에 엽이채가 장씨 가문으로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친아버지가 그녀를 도왔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중병으로 몸져누워 다 죽어 가고 있을 때 엽이채는 배부른 몸을 끌고 찾아와 침상 곁에 앉아서 ‘시름을 달래고’ 있었다. 그때 엽이채는 이리 말했다.
“사실 그때 저와 박원 공자님이 잡혀 오고 언니가 장씨 가문으로 들어가 공자님과 혼례를 올렸을 때, 전 이미 포기한 상태였어요. 저와 공자님이 이렇게 아름다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건 다 큰아버지 덕분이에요!”
그러곤 웃음을 터뜨리더니 감격스러운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당시 저는 나뭇간으로 끌려가 할아버지의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았어요. 그리고 보름을 갇혀 있었는데 어머니가 할아버지께 방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드린 덕에 가까스로 그곳에서 나올 수 있었죠. 그런데 방으로 돌아갔더니 큰아버지가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전 당연히 큰아버지가 저를 훈계하려고 오신 줄 알았어요. 그런데 큰아버지께서 저에게 포기하면 안 된다고 하시더니 저와 공자님이 서로를 진심으로 사모하기만 하면 명분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언젠가는 하늘도 감동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고도 해 주셨죠.
그러시면서 저에게 밖으로 나가 몰래 공자님의 첩실이 되라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저도 내키지 않았죠.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까 ‘공자님이 사모하는 사람은 분명 나인데 왜 언니가 그분을 차지하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할아버지께 별채로 가서 잘못을 반성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하지만 사실은 밖에서 공자님의 첩실로 지내기 시작한 거였죠.
그런데 하늘도 저를 불쌍히 여기셨나 봐요. 언니가 우리의 부부의 연을 끊어놓았지만,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라는 말처럼 언니는 난산 끝에 사산하더니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죠. 그리고 전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고요.”
그러더니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엽이채가 노골적으로 드러내 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엽연채는 알고 있었다. 엽이채가 속으로 이쪽은 조만간 병으로 죽을 테고 그럼 자신은 고난 속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전생의 온갖 기억들이 떠오르자 엽연채의 속은 음흉하고 악랄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하하, 그 죽일 놈의 진실한 사랑에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게다! 부부의 연을 끊어 놓은 악한 사람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겠지!’
엽승덕은 자신이 무슨 진정한 사랑의 수호자인 양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랑하는 감정이 진솔하기만 하면 부모와 아내, 친자식도 다 죽일 수 있는 인간이었다. 엽연채는 속으로 그를 금수만도 못한 개 같은 인간이라고 욕하다가, 이는 오히려 개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간을 살짝 구겼다.
“연채야……. 너 안색이 왜 이리 어두운 것이냐?”
온씨는 엽연채의 낯빛이 갑자기 변하자 깜짝 놀라며 물었다.
“동의하지 않는 게냐? 아이참, 네 아버지 말씀이 옳대도 그러는구나. 다들 한 발짝 물러나면 모두에게 좋은 것이란다.”
“어머니.”
엽연채의 불그스름하고 윤기가 도는 입술에 비웃는 듯 비정해 보이는 웃음이 어렸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그런 말을 하셨다고 자식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셔서는 안 됩니다. 이제라도 마음을 돌리시려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 여인에게 더 푹 빠졌다는 거예요! 정신이 휙 돌 정도로 그 여인을 사랑해서 이제는 손쓸 수 없을 정도가 됐다는 증거라고요!”
“그, 그게 무슨 허튼소리냐! 네 아버지의 말씀은 아무리 뜯어봐도 다 너를 위해서, 너를 도와주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란다.”
엽연채의 차디찬 웃음에 놀란 온씨는 그녀의 말을 더욱 인정할 수 없었다.
“엽승덕 그 사람이 도와주려는 건 제가 아니라, 장박원과 엽이채 그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에요!”
엽연채는 싸늘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그러자 질겁한 온씨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황급히 부정했다.
“연채야, 그게 무슨 헛소리냐? 너는 네 아버지의 친딸이다. 설령 너를 도와주지는 않더라도 장박원을 도와주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네 아버지는 장박원과는 아무 친분도 없는데 왜 쓸데없는 일을 해가며 장박원을 도와주겠느냐?”
“왜냐하면 장박원과 자신이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엽연채는 엽승덕을 신랄하게 비꼬며 냉소를 흘렸다.
“그 사람은 장박원과 엽이채가 사랑의 도피를 한 것을 진정한 사랑으로 보고 있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은정랑과 혼인 전에 만나지 못한 걸 한스러워하고 있죠. 장박원과 엽이채를 보면서 그들에게 자신과 은정랑의 관계를 투영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장박원과 엽이채를 적극적으로 돕는 거고요.”
“저,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온씨의 가슴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파 왔다. 입으로는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으나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엽연채의 말을 믿기 시작한 뒤였다.
엽승덕이 은정랑에게 얼마나 푹 빠져 있는지 그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야말로 엽승덕이 저지를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온씨는 웅얼거리며 현실을 부정했다.
“넌 네 아버지 딸이다. 네 아버지 친딸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엽연채가 말했다.
“제가 친정에 갔던 날, 장박원이 협문으로 나가고 있는데 엽승덕이 장박원을 불러 세우는 걸 봤어요.”
당시 일은 이미 어린 여종이 엽연채에게 보고했었다. 하지만 그땐 혼수를 바삐 옮기고 주씨 가문으로 돌아가느라 바쁜 나머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씨에게 그런 끔찍한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수가 없었다. 엽연채가 설명을 이어 갔다.
“그때 많은 하인들이 그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자기 친딸을 배반한 전 사위를 두들겨 패거나 욕을 한바탕 퍼붓기는커녕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하더라니까요! 못 믿으시겠으면 어머니께서 직접 알아보세요. 엽승덕이 장박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는지 아닌지!”
그 말을 들은 온씨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냉수를 끼얹은 듯 전신에 오한이 들었다. 충격을 받은 온씨의 낯빛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엽연채는 그런 온씨의 모습에 가슴이 몹시 아팠지만 각오를 다잡았다. 어머니가 하루라도 빨리 진실을 알게 될수록 좋은 결과 역시 한층 빨리 거두게 될 것이었다.
이대로 그냥 두었다가는 엽승덕에 대한 어머니의 덧없는 희망은 점점 더 커질 것이고, 엽승덕은 은정랑을 위해 그런 모친을 철저히 이용할 것이다. 그리되면 결국 가장 잔인한 결말을 맞게 될 뿐이었다.
“새언니…….”
엽영교도 창백해진 얼굴로 온씨를 잡아당기며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연채의 말에 일리가 있어요.”
온씨가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비틀거리자 채 마마가 얼른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마님… 괜찮으십니까?”
“그래……. 난 괜찮다. 좀 쉬어야겠구나.”
온씨는 눈을 감더니 가슴 위에 손을 얹고선 심호흡을 했다.
“어머니, 기운 내셔야 해요!”
그녀를 바라보며 엽연채는 눈시울을 붉혔다.
“엽승덕 그 인간말짜는 어머니께서 상심하고 가슴 아파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어머니가 노력을 쏟아부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요.”
사실 이런 말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었다. 왜냐하면 온씨가 현재 품은 감정은 엽연채 자신도 전생에 느낄 만큼 느껴 봤으니까. 솔직히 장박원을 깊이 사랑했던 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 사람을 한 번도 사랑했던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저 어렸을 때 그에게 막연한 동경심을 품었던 것뿐이었다.
훗날 장박원이 다른 여인을 사모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으나, 자신은 이미 일생을 그 사람에게 건 후였다. 그래서 매일같이 그가 마음을 돌리길 간절히 바라며 자신의 취향과 겉모습마저 바꾸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는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그 사람이 살인을 하든 방화를 하든 다 옳은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원죄인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는 몸소 겪어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할 말을 잃은 온씨는 완전히 넋이 나간 채 의자에 앉아 있었다. 채 마마와 엽영교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일은 온씨 스스로 이겨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러 해 묵은 설수雪水(눈 녹은 물)가 작은 화로 위에서 이미 팔팔 끓고 있었다. 엽영교는 정교한 꽃무늬가 수놓인 면 손수건을 대고 검은 도기 주전자에 끓는 물을 따라 부었다.
첫 번째 찻물을 걸러 낸 후 펄펄 끓는 물을 다시 따라 붓자 은은한 향이 솔솔 피어올랐다. 벽라춘 특유의 향기가 방 안에 퍼지면서 사람들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엽영교는 조그마한 옥 찻잔에 차를 따르더니 온씨와 엽연채 앞으로 찻잔을 밀어 주며 말했다.
“새언니, 우선 차부터 드세요.”
온씨는 조그만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제야 마음이 다소 안정되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이… 어떻든 간에 그 말 자체는 일리가 있기는 하다. 네가 지금 엽이채를 도와주면 나중에 네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아이가 너를 도와줄 게다.”
엽영교는 복잡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바라봤다. 그녀는 당연히 엽이채가 망신을 당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엽연채의 장래를 생각해 보면 이참에 한 걸음 물러나는 것도 확실히 고려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바로 고개를 가로젓더니 온씨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어머니, 엽이채가 장박원과 도망친 후 지금까지 시간이 이리 많이 흘렀는데도 저에게 사과하는 것을 보셨어요? 숙부 내외가 조금의 미안한 마음이라도 드러내 보였나요? 저희에게 아주 조그만 선의라도 보였나요?”
그 말에 온씨와 엽영교 모두 깜짝 놀랐다. 과연, 엽이채와 그 부모는 미안해하기는커녕 갈수록 기고만장해졌다.
“고모, 고모는 저와 엽이채의 고모이시고 제 어머니와 작은어머니의 시누이셔요.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전체를 봤을 때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