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53화 (53/858)

제53화

“마님!”

채 마마가 환히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방금 세자께서 큰아가씨를 염려하신 거죠?”

온씨가 고개를 끄덕이자 채 마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희망이 보이네요! 그리고 세자께서 하신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이번 기회에 갈등을 해소하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죠. 세자께서 드디어 자식의 소중함을 깨달으셨나 보네요. 하니 더더욱 이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되겠지요.

가족끼리 무릇 화기애애하게 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자애를 베풀고 자식이 효를 다하면 세자도 자연히 감화되실 거예요. 그러면서 점차 마음을 되돌리실 겁니다.”

온씨도 그런 기대감을 품고 밖에 있는 여종을 불렀다.

“염교야, 안녕당에 가서 나리께 저녁을 이곳에서 드실 건지 여쭤보거라.”

염교는 그 말을 듣고는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온씨는 기쁜 나머지 더는 실로 구럭을 뜨지 않고 어서 염교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잠시 후, 발이 스르륵 걷히더니 염교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세자께서는 안녕당에서 큰마님께 문안을 드리고 계셨습니다. 소인이 세자께 여쭙자 저녁에 벗과 벽수루碧水樓에서 술 한잔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가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뜨겁게 타올랐던 온씨의 마음은 찬물을 한 바가지 끼얹은 것처럼 확 식어 버렸다. 채 마마도 마찬가지로 끓어오르던 마음이 식어 버렸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말했다.

“마님, 걱정 마세요. 정말로 벗과 약속하셨는지도 모르죠. 예전 같았으면 나리께서는 그 망할 여편네 거처로 간다고 대놓고 말씀하셨을 거예요. 지금 나리께서 정말로 벗을 만나시든 아니든, 설령 정랑의 거처로 간다 하더라도 이젠 돌려 말하는 법을 알게 되신 거죠. 마님의 심정을 헤아리기 시작하신 겁니다. 마님, 어떻게 첫술에 배가 부르겠습니까? 천천히 지켜보시지요.”

온씨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마음은 복잡했지만 그래도 채 마마의 말마따나 희망을 본 셈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맞다. 미채는?”

온씨는 마음을 다소 진정시키고 나자 문득 엽미채가 떠올랐다.

“거처로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채 마마가 말했다.

“오늘 영교 아가씨께서 연채와 자수실을 고르러 가기로 약속했다고 그 아이가 말하더구나. 이 일도 마무리 지을 겸 나도 따라가야겠다. 미루다가는 엽이채의 혼례식 날짜가 늦춰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엽이채의 혼사 이야기를 꺼내자 온씨는 속이 좀 뒤틀렸지만 엽승덕의 말을 듣고 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이미 마음이 넘어간 후였다.

“염교야, 가서 영교 아가씨께서 출타했는지 알아보고 오너라.”

염교는 얼른 돌아서서 다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염교가 숨을 헐떡거리며 돌아오더니 웃으며 고했다.

“마님, 어쩜 이런 우연이 있대요. 제가 방금 전 영교 아가씨 거처로 가서 물어보니 아가씨께서 방금 막 길을 나서셨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수화문으로 가보니 영교 아가씨가 마차에 오르고 계시기에 제가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말씀드렸어요.”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집안에서 입는 일상복이라 외출하기에는 마땅치 않았다. 전지纏枝(줄기나 넝쿨이 상하좌우로 뻗어 서로 얽힌 문양) 문양이 들어간 담홍색의 긴 웃옷 정도는 걸쳐 줘야 밖에서 체면이 설 것이었다.

희망이 보이자 기분이 좋아진 그녀는 머리 위에 홍옥과 순금을 상감한 장신구를 꽂은 후 수화문으로 향했다.

엽영교는 수화문에서 가까운 대나무 숲에 앉아 있었다. 항아리 문양이 들어간 연보라색 장화妝花(남경南京 지역 특색이 강한 복잡한 채색의 자카르 직물) 배자와 흰색 실에 은색 실을 섞어 짠 마면군馬面裙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경라輕羅(얇고 가벼운 비단)로 만든 반투명한 도화선桃花扇을 쥐고서는 살살 부치고 있었는데, 무슨 상념에 깊이 빠져 있는지 눈빛이 멍했다.

“아가씨.”

온씨가 웃으며 걸어왔다.

“새언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엽영교는 그녀를 맞이하러 다가갔다. 엽영교는 온씨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더니 근래 들어 가장 생기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지 생각을 해 보니 이내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새언니는 분명 어제 둘째 오라버니네가 곤경에 빠진 일로 이리 기뻐하는 거겠지!

“늦었으니 얼른 마차에 오릅시다.”

온씨가 재촉하며 먼저 마차에 올랐다. 두 사람이 자리에 앉자 온씨가 말했다.

“어디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엽영교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약수차관若水茶館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우선 그곳에 마차를 세워 두고 자수 상점과 책방부터 들렀다가 다시 차관으로 돌아가 차를 마시기로 했거든요.”

온씨 역시 약수차관이 대화를 나누기에 제격인 장소라고 생각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먼저 차관에서 가서 차를 마시는 건 어때요?”

엽영교는 미소를 지으며 응했다.

“그것도 좋죠.”

그녀는 그저 알겠다고 말한 후 온씨에게 연유 등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곤 어떤 자수실을 고를 것인지, 어떤 모양으로 구럭을 뜰 것인지 등의 소소한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꼭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 * *

약수차관은 귀족들이 즐겨 찾는 품위 있는 장소인지라 마차나 말을 세워놓는 뒷마당이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온씨와 엽영교가 탄 마차가 약수차관의 뒷마당으로 들어섰고, 곧 두 사람은 차례로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작은 걸상을 밟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러자 반투명한 향라선香蘿扇을 손에 쥐고서는 머리를 갸우뚱하며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빛이 도는 촘촘히 짠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은 엽연채는 반짝반짝 빛이 나는 생기 넘치는 얼굴로 꽃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어! 어머니께서도 오셨네요!”

“연채야.”

온씨는 얼른 다가서서 딸의 손을 꼭 잡았다. 지난번에 사찰에서 엽연채를 본 후로 벌써 십여 일이 지났다. 다행히 딸은 여위어 보이진 않았으나 다소 피곤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녀의 눈빛을 본 온씨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엽승덕의 말이 더욱 일리가 있다고 느껴진 그녀는 마음이 한층 급해졌다.

“차관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꾸나. 내 너에게 알려 줄 중요한 일이 있단다.”

“네.”

엽연채는 대답을 하더니 무슨 일인지 묻는 듯한 눈빛으로 엽영교를 쳐다봤다. 그러자 엽영교가 웃으며 말했다.

“시간에 쫓기는 것도 아니니 들어가서 새언니께 듣자꾸나.”

그러면서 농담조로 덧붙였다.

“무슨 비밀 같은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제가 들어도 되나요?”

온씨는 엽영교가 전부터 자신들 편을 들었음을 떠올렸다. 게다가 말하려는 이야기 자체도 딱히 비밀 같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엽학문과 묘씨도 이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분명 동의하리라고 믿었다.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못 들을 게 뭐가 있겠어요? 갑시다. 오늘 이 새언니가 아가씨께서 제일 좋아하는 벽라춘碧螺春(고도의 수작업으로 만들어 공예품 성격을 띠는 고급 녹차)을 사 드릴게요.”

그렇게 세 사람은 여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차관은 그런대로 장사가 잘되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무슨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라 따로 예약하지 않았아도 자리는 넉넉했다.

2층으로 올라가 보니 별실들이 자리했다. 별실에는 각각 꽃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온씨는 딸아이가 특히 좋아하는 꽃이 해당화임을 떠올리며 해당화라는 이름이 붙은 별실을 골랐다.

별실 안은 정교한 소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황화목 뿌리로 만든 다해茶海(찻주전자에서 우린 차를 부어 농도와 온도를 맞추는 쟁반) 위로 해당화가 조각된 비취 다구茶具 다섯 개가 놓여 있었다. 별실의 한 면은 길가와 닿아 있어 멀리 큰 강이 보였다. 풍경이 수려하고 그윽하며 고아한 운치가 흘렀다.

점원은 먼저 화로와 물이 든 찻주전자, 찻잎 등 정교한 다구를 정렬했다. 그런 후에 한편에 놓인 황리목 재질의 장탁長卓 위에 먹기 아까울 만큼 정교한 과자들을 올려놓은 후 밖으로 나갔다.

세 사람은 다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채 마마는 곁에서 시중을 들었으며 혜연과 옥패는 바깥으로 통하는 일반실에서 대기했다.

엽영교는 다구를 들더니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우려냈고 엽연채는 차화고茶花糕를 집어 한입 베어 물며 물었다.

“어머니, 무슨 중요한 말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아니면 화본을 사고 자수실을 고른 다음 쉴 겸 다시 와서 차를 마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얘도 참.”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를 튕기더니 입을 열었다.

“뭐겠니? 목전의 일인 엽이채의 혼사지.”

그러자 엽연채가 ‘치’ 하고 못마땅한 소리를 냈다.

“걔 혼사가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손씨가 엽이채의 혼수 때문에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모른다. 어제 너에게 빌린다는 말을 꺼냈었는데 내가… 못하게 막았지.”

온씨는 그 말을 하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잘하셨어요!”

엽연채는 기쁨과 위안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고 역시 자신의 어머니답다고 생각했다.

“얘는!”

온씨는 그런 딸을 나무라듯 한마디 했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보탰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지금은 한 발짝 물러서는 게 더 낫겠다 싶구나.”

그 말에 엽연채는 어안이 벙벙해 입으로 넣은 차화고를 삼키는 것도 잊어버렸고 물을 따르던 엽영교의 손도 순간 멈칫했다.

온씨는 엽승덕이 했던 말을 그대로 전했다.

“네 아버지 말씀이 맞다. 그 애가 혼수 없이 시집을 가면 우리 가문 체면뿐만 아니라 장씨 가문 체면도 바닥에 떨어진다. 그리고 둘째 내외는 분명 우리가 도와주지 않은 걸 죽도록 원망하겠지.

네 할아버지도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하시지만, 그때 가서는 분명 앙심을 품으실 거고, 장씨 가문도 그럴 게야. 이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살 바에야 차라리 우리가 돈을 좀 쓰자꾸나. 그럼 적대적인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뀔 테니까 말이다.”

‘적대적인 관계가 우호적으로 바뀐다고?’

엽연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엽승덕이 어머니께 그 말을 하던가요? 어머니를 그렇게 설득하던가요?”

엽연채는 마치 생판 남을 부르듯 친아버지를 이름으로 불렀지만, 온씨는 초조함과 기대감으로 신경이 다른 곳에 가 있어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래!”

그러더니 온씨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벽옥으로 만든 잔을 들어 올렸는데 아직 차가 다 우려지지 않아 당장은 끓인 맹물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때 채 마마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어쨌든 부녀지간이잖아요. 아가씨가 주씨 가문에서 고생하며 지내는 걸 보시고 세자께서도 자신이 사실은 아가씨를 아끼고 염려한다는 걸 깨닫게 되신 거죠. 마침내 희망이 보이는 거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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