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백야……! 어찌 됐든 큰소저께서는 백야의 여식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큰소저께서는 저와 이채를 죽어라 미워하는데 백야께서 저희에게 빌려 주라는 말씀을 하시면… 부녀간의 정을 해칠까 염려됩니다.”
장박원이 깜짝 놀라 만류했다.
“해치고 말고 할 게 뭐가 있느냐!”
엽승덕은 엽연채를 떠올리자 속이 다 꼬였다. 그녀는 자신과 정랑 사이에서 난 아이도 아니었다.
“난 옳은 일을 하는 것뿐이다.”
“감사할 따름입니다, 백야!”
눈시울이 붉어진 장박원이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이 세상에서 백야보다 더 사리에 밝으신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엽승덕은 기쁨과 위안을 느끼며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장한 녀석. 지금은 고난이 가득하겠지만 앞으로 분명 좋아질 게다. 너는 우리보다 훨씬 운이 좋다. 평생토록 사모할 사람을 이리도 빨리 만났고, 정식으로 그 사람을 아내로 맞이하니 말이다.”
그 말을 하면서 엽승덕은 자조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처지가 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만약 혼인 전에 정랑을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에 만약은 없었다.
“백야께서도 감정에 충실하시니 분명 뜻하시는 바가 이루어질 겁니다.”
“네 말대로 됐으면 좋겠구나!”
장박원의 말에 엽승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는 정랑과 허서와 함께할 밝은 미래를 위해 차근차근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었다.
“하하, 그래. 널 여기 너무 오래 세워 두었구나.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아닙니다.”
장박원이 미소를 지으며 사양했다.
“아버지께서 점심에 서재로 오라고 하셔서 이만 가 봐야 합니다.”
장박원은 그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린 후 떠나갔다. 엽승덕도 방으로 들어가 바로 채비를 한 후 정안후부로 돌아갔다.
* * *
엽승덕이 정안후부로 돌아왔을 때는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 무렵이었다. 온씨는 점심을 먹은 후 침상에 앉아 실로 구럭을 뜨고 있었고, 엽미채는 항탁을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7년 전 엽승덕이 은정랑을 첩실로 들인 후로 서녀와 두 이낭을 바라보는 온씨의 눈길은 한결 부드러워졌다. 공동의 적이 생기자 자연히 같은 편에 서게 된 것이었다.
“어머니, 좀 있다 고모께서 큰언니와 자수실을 고르러 가신다고 해요.”
엽미채가 말했다.
“그래서 고모께 수홍전금선水紅纏金線을 골라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걸로 매화 주머니를 떠서 어머니 옷에 달면 옷이 더욱 돋보일 거예요.”
“요 기특한 것.”
온씨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이마를 가볍게 튕겼다. 온씨는 어제 둘째네 내외가 엽이채의 혼수를 노름으로 홀랑 날려 먹은 일을 전해 들은 뒤로 내내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했다.
‘쯧쯧. 손씨, 이 망할 여편네야, 그걸 바로 인과응보라고 하는 거다!’
“그건 그렇고 너는 왜 네 고모랑 같이 나가지 않은 게냐?”
“아침 일찍 일어나긴 했는데 귀찮아서 움직이기 싫더라고요.”
엽미채는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외출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어제 그런 큰일이 벌어졌는데 신이 나서 밖에 나가 돌아다닐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엽연채와 같이 어울렸다가 손씨가 자신에게 앙심이라도 품으면 큰일이었다.
자신은 엽영교가 아니었다. 그저 보잘것없는 서녀에 불과했다. 심지어 큰아들 일가의 서녀였다. 지금 이쪽은 세가 약해질 대로 약해져 온씨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인데, 하물며 자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세자께서 오셨습니다.”
갑자기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을 듣자마자 온씨의 고운 얼굴이 어두워졌고, 마음은 뒤엉킨 듯 괴로워졌다. 엽승덕은 그 첩실을 들인 후로 하루 종일 집에 붙어 있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도 바깥뜰에 있는 서재에서 지냈기에, 보름 가까이 안뜰에 들어오는 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온씨는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돌아온 그의 냉담한 눈빛을 보면 더욱 크게 상심하고 괴로워했다. 또 그가 돌아오지 않을 때면 은정랑의 처소에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속이 뒤집어지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파 왔다.
온씨가 도량이 넓은 사람이 아니더라도 두 이낭은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은정랑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엽승덕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제대로 홀려 버린 여인이니까.
그렇게 온씨가 복잡한 심경을 느끼는 사이 엽승덕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엽승덕은 옷깃이 둥근 다갈색 비단 도포를 입고, 허리춤에는 새 무늬가 들어간 파란색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기품 있는 얼굴이었지만 깊은 눈동자는 더없이 싸늘했다. 그는 허리를 곧게 편 자세로 잰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를 본 엽미채는 깜짝 놀라 얼굴이 하얘지더니 얼른 일어나서 자신의 자리를 그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엽승덕은 온씨 곁에 앉지 않고 아래쪽에 놓인 권의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온씨는 마음이 쓰리고 분통이 터졌다. 자신 곁에 앉기조차 꺼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몸과 마음을 은정랑에게 다 주어 버린 것이었다.
“아버지.”
엽미채는 창백해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불렀다. 엽승덕은 그저 그녀를 흘끗 쳐다보며 대충 대꾸할 뿐이었다. 적출인 자녀들도 나 몰라라 하는데 존재감 하나 없는 서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차, 차를 내오겠습니다!”
엽미채는 그렇게 말하더니 황급히 물러났다. 그러자 방 안에는 부부 두 사람만 남게 되었고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공기마저 어찌나 어색한지 온씨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오늘 내가 이리 온 건 상의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엽승덕이 먼저 운을 뗐다. 그 말에 온씨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상의할 일이 있다? 무슨 일이기에 나와 이리 상의를 해야 한다는 걸까? 설마 은정랑을 정안후부로 들이겠다는 걸까?’
은정랑이 처음 나타났을 때 온씨는 자신의 대범함을 보여 주려고 은정랑을 정안후부로 들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엽승덕은 은정랑이 첩실로서 정실부인에게 절을 올려야 하는 게 싫다고, 그녀가 수모를 겪게 할 수는 없다며 단칼에 거절했다.
‘그가 지금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면 응해야 할까 아니면 불응해야 할까? 밖에다 두고 안 보는 게 속 편할까? 아니면 곁에 두고 천천히 손봐 주는 게 나을까?’
온씨가 마치 강한 적과 맞서듯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는 이런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엽승신이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어제 이채 이야기를 다 들었소.”
“네?”
온씨는 어리둥절했다. 그가 엽이채의 이야기를 꺼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 식구인데 남처럼 대하면 되겠소.”
엽승덕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겉으로는 둘째 내외에게 화를 내며 꾸짖으셨지만 속으로는 이채가 떵떵거리며 시집가기를 바라실 게요. 현재로서 집에서는 그만한 돈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으니 당신이 연채에게 일단 혼수를 이채에게 빌려 주라고 해 보시오. 이채가 출가한 후에 다시 갚으면 되지 않겠소. 무릇 자매 싸움은 칼로 물 베기이니.”
“잠시만요!”
온씨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연채의 혼수를 엽이채 그 망할 계집애에게 빌려 주라고요? 원래 장씨 가문에 시집가기로 했던 게 연채인 것을 알면서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엽이채 그 빌어먹을 계집애 때문에 우리 연채는 몰락한 가문의 서자에게 시집을 갔어요! 그런데 원수를 도우라고요?”
온씨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엽승덕은 날이 선 그녀의 목소리와 자신을 거세게 몰아붙이는 말투에 미간을 확 찌푸렸다. 그의 눈에는 질색하는 기색이 비쳤다.
‘정말 드센 여인이야. 모질고 야박하기는. 도량이 바늘구멍보다도 작은 밴댕이 소갈머리 같으니라고! 사람을 용서해야 할 때는 용서해야 한다는 것도 모르고 선량함과 너그러움은 더더욱 모르지!’
엽승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원수는 무슨 원수요? 당신은 고집스럽게 매달릴 줄만 알고 한 발짝 물러날 줄은 왜 모르오? 어찌 큰 그림을 볼 줄 모르는 것이오? 연채가 남은 생을 모진 고난 속에서 살길 바라거나 그 아이가 죽어 나가는 꼴을 보려거든 계속 그렇게 인정머리 없이 구시오!”
그 말에 깜짝 놀란 온씨가 말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도 드는 생각이 있을 거 아니오? 지금 집안에서 그만한 돈을 꺼내 놓을 수 있는 건 연채밖에 없소. 둘째 내외도 어제 연채에게 빌리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당신이 단칼에 거절했지. 이채가 볼품없이 시집을 가게 되면 장씨 가문 체면도 바닥에 떨어질 것이니 그 가문에서는 분명 연채에게 보복하려 들 것이오.”
온씨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사실 그녀도 장씨 가문이 딸을 난처하게 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을 했었다.
“내 말을 좀 들어 보시오. 지금 저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우리도 이참에 혼수를 빌려줍시다. 아니면…….”
엽승덕이 그녀를 쳐다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연채가 가져간 게 많이 있으니 얼마간 이채에게 돌려주게 합시다. 그러면 이채의 어려움이 해결될 것이니, 이채가 연채를 좋게 볼 것 아니오. 그럼 우리는 이 일을 계기로 갈등을 해소할 것이고, 아버지와 어머니도 연채를 다시 중히 여기시겠지.
그러면 나중에 연채가 주씨 가문에서 수모를 당했을 때 장씨 가문이 도와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 친정에서 온 힘을 다해 그 아이를 도울 것이오.”
온씨는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쁜 마음도 들었다. 엽승덕도 애가 타는지 이마에서 땀을 흘리는 게 아닌가. 아무리 소원하다 해도 어쨌든 부녀 관계이니 그도 딸에게 관심을 쓰는 것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그의 마음도 천천히 돌아올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온씨는 그의 말이 심금에 와닿는 듯해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일리가 있는 말씀이시네요.”
엽승덕은 자신의 말이 먹혀들자 안도하여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이따가 연채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면서 고집부리지 말라고 하시오. 갈등이 해결되면 모두에게 좋을 테니 말이오.”
엽승덕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버지, 어머니를 뵈러 이만 가 보겠소.”
그러더니 돌아서서 밖을 향해 걸어갔다.
“아……. 오, 오늘 저녁에 와서 식사하실 건가요?”
온씨는 몸을 기울여 그가 떠나간 방향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엽승덕은 이미 발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간 후였다. 온씨의 심정은 또다시 복잡해졌으나 그래도 그가 딸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생각에 못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