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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51화 (51/858)

제51화

정국백부의 소불당은 사당에서 멀지 않은 작은 삼합방三合房(‘ㄷ자’ 모양의 집으로 중간이 뜰인 전통 주택)에 있었다.

엽연채가 안마당 협문으로 나가서 반각半刻쯤 걸어가니 주씨 가문 소불당이 나왔다. 삼합방에는 등불이 켜져 있지 않았고, 정방의 열린 문 사이로 등불 빛이 조금씩 새어 나올 뿐이었다.

엽연채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안에는 지장보살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불상은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향상香床 위에는 갖가지 공물이 놓여 있었으며 칠잔소유등七盞酥油鐙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바닥에는 상다리가 짧고 옻칠을 한 배나무 장탁長卓이 놓여 있었다. 연청색 옷을 걸치고 그곳에 앉은 주운환의 맵시 좋은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필사에 열중해 있었다.

그가 부들방석도 없이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필사하는 모습을 보니, 엽연채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주운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 주운환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여긴 왜 오셨습니까?”

“공자께서 식사하러 오지 않아 제가 여한에게 물었더니 어머님께서 공자님께 불경을 필사하라고 하셨더군요.”

그러더니 엽연채는 자책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 저 때문입니다.”

그러자 주운환은 계속 붓을 움직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별것 아닙니다. 어릴 때도 자주 했었거든요.”

하지만 엽연채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주운환에게 시집오지 않았다면 진씨가 그를 다시 괴롭힐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방금 전에 일상원에 갔더니 어머님께서 열 번만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주운환은 기다란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우며 말했다.

“그러지 마세요. 그분은 제 적모이고 저는 서자입니다. 그분이 제게 효심을 보이라고 하시면 마땅히 그리해야 합니다.”

첩실은 본래 정실보다 못한 처지를 참고 견뎌야 하는 신분이었다. 인내해야만 서자와 서녀가 이 세상에 태어날 자격을 얻었다. 그래서 그들의 신분은 늘 적출인 형제자매들보다 한 단계 아래로, 고난이나 수모를 겪는 것 역시 일상이었다. 이건 서자로서 그가 응당 보여야 할 태도였다. 그리고 이후 거사를 벌이기 위해서 더더욱 눈에 띄게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엽연채가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소란을 피우지는 않았어요. 다만… 어머님께서 지금 제게 바라시는 게 있으니 그렇죠. 지금 공자께서 겪고 계신 고통은 제가 드린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그리고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공자의 벌을 조금 가볍게 만드는 것뿐이었어요.”

그렇게 말하더니 그의 맞은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에게 먹을 갈아 주며 물었다.

“몇 번이나 쓰셨어요?”

“두 번째를 쓰고 있던 참입니다.”

“어머님께서 열 번만 쓰면 된다고 하셨어요. 어쨌든 제가 공자의 아내이니 공자를 도와 쓰는 것도 효심을 보이는 거겠죠.”

엽연채는 그렇게 말하며 다른 붓을 들었다. 상 위에는 하나가 아니라 총 세 개의 붓이 놓여 있었다. 그래서 종이도 챙겼는데 막상 『지장경』이 보이지 않았다.

“『지장경』은요?”

“이미 다 외웠습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몇 번이나 썼기에!’

“배고프지 않아요?”

어리둥절한 주운환 눈에 엽연채 곁에 놓인 작은 바구니가 들어왔다. 안에는 소가 든 찐빵 한 접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주운환은 바로 사양했다.

“지금은 손이 더러우니 안 먹겠습니다.”

말문이 막힌 엽연채는 그가 써놓은 『지장경』을 들고선 묵묵히 필사하기 시작했다.

공물이 놓인 향상 위에서 일곱 개의 장명등長命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희미한 등불 아래에는 그림 같은 소녀가 옥처럼 반짝이는 광채를 뿜어내며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지장경』을 필사하는 주운환은 마음이 요동쳤다. 그는 순간 그게 무슨 감정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어 난감했다. 어릴 때부터 벌을 받는 데는 이골이 난 자신이었다. 이렇게 『지장경』을 필사하는 정도야 수도 없이 했던 일이다. 얼음장 같은 이 불당 안에서 몇 번이나 무릎을 꿇었는지 모른다.

자신이 늘 겪어 왔던 이런 별것 아닌 일로 적모의 거처로 달려가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로… 이상한 소저야…….’

희미한 등불 아래 부부는 말없이 경문을 필사했다.

* * *

한편, 그 시각 시끌벅적한 야시장 안에 눈에 띄지 않는 객줏집 곁채에서 남녀 한 쌍이 남몰래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이채야, 이렇게 갑자기 날 부르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장박원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엽이채는 비에 젖은 배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흐느껴 울고 있었다.

“제 혼수가 없어졌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어쩌다가? 저번에 말했을 때는 집안에서 일만 오천 냥을 준비해 준다고 했잖아?”

“어머니, 아버지께서 제 혼수를 노름으로 몽땅 날리셨어요!”

엽이채는 말을 하면 할수록 억울해 죽을 것만 같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장박원이 안색이 확 변했다.

“설, 설마 절 버리시는 것은 아니시겠죠?”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보며 엽이채는 ‘말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후회했다. 하지만 너무도 억울하고 막막했다. 그리고 장박원은 자신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기에 그만 참지 못하고 그가 자신을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 사실을 털어놓은 것이다.

“두 분께서… 누구에게 사기를 당하신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전에는 큰언니가 제 혼수도 몽땅 빼앗아 가고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도 전부 빼앗아갔어요. 부모님은 제가 기죽지 않기를 바라셨고, 또 장씨 가문의 체면을 세워 주려 애쓰시다가 믿던 사람에게 그만 사기를 당하신 거예요.”

엽이채는 자신의 혼수를 전부 날려 버린 부모가 심히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시댁의 일원인 장박원 앞이니 부모님의 체면을 봐서 그들을 두둔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엽이채는 살구 모양의 커다란 눈으로 장박원을 쳐다봤다.

새하얀 계란형 얼굴, 투명하게 반짝이는 눈물이 고인 촉촉한 눈망울, 입술을 문 채 시선을 아래로 드리우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가냘픈 자태. 미인의 연약한 모습에 장박원은 금세 마음이 약해졌다. 어떻게 그녀를 나무랄 수 있겠는가?

“걱정 말아라. 내가 어떻게 너를 버릴 수 있겠느냐.”

장박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그럼 혼수는…….”

엽이채가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내가 도울 방법을 생각해 보마.”

그녀가 궁상맞게 시집오는 것을 어찌 두 눈 뜨고 쳐다만 보겠는가. 게다가 신부가 혼수 없이 시집오면 자신의 체면도 크게 실추될 터였다.

“역시 공자님이 최고예요. 순간 어리석은 실수를 하신 저희 부모님을 탓해야죠.”

엽이채는 눈물을 머금고는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뽀얗고 부드러운 살결에서 나는 그녀의 향기가 그의 품 안을 가득 채웠고, 얇은 홑옷 위로 느껴지는 작고 보드라운 손이 그의 뜨거운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열렬히 사랑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어찌 그녀를 버릴 수 있겠는가.

장박원은 얼른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아버님, 어머님 탓이 아니다. 두 분도 다 우리를 위해 그러신 게야.”

두 사람은 객줏집에서 반 시진쯤 더 머문 후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장박원은 침상에 누워 엽이채의 혼수를 어떻게 마련할까 이리저리 궁리했다. 그 자신은 매달 용돈을 받는 족족 다 써 버려서 모은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방 안에 값나가는 물건들이 있기는 했지만, 이것들을 가져다가 팔거나, 혹은 맡겨 돈을 빌린다 하더라도 일이천 냥밖에 안 되니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부모님께 부탁을 드려 보면… 씨알도 안 먹히겠지!’

장씨 가문은 이미 예물을 한 번 보냈다. 엽연채에게 보낸 것이든 엽이채에게 보낸 것이든 간에 어쨌든 정안후부에는 예물을 보낸 것이다. 그러니 절대로 다시 보낼 리가 없었다. 예물을 다시 보내 달라고 집안에 요구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엽이채를 더 미워하게 될 뿐이었다.

골똘히 고민하던 장박원은 문득 한 사람이 떠올라 두 눈을 번뜩였다. 그러곤 이내 눈을 감더니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 *

이튿날 아침, 장박원은 말을 타고 조용히 동쪽 거리에 있는 송화 골목으로 가 작은 집의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열다섯쯤 되어 보이는 여종이 문을 열어 보니 젊고 잘생긴 공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경계심을 가득 품고 물었다.

“누구를 찾으시죠?”

“정안후부 세자께서 안에 계시느냐?”

“누구십니까? 무슨 일로 저희 나리를 찾으십니까?”

장박원의 물음에 여종은 대답하지 않고 도로 물었다. 그녀의 말투를 보니 안에 있는 게 확실했다. 장박원은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가서 장박원이 뵈러 왔다고 전하면 된다.”

여종은 그를 쳐다보더니 문을 닫고 들어갔다. 그녀의 회색 옷자락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이 다시 열리더니 서른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풍아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엽연채의 아버지 엽승덕이었다.

“박원아. 여긴 어쩐 일로 온 것이냐?”

엽승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백야, 이 박원이 좀 도와주십시오!”

장박원은 엽이채가 혼수를 잃게 된 기막힌 사정을 털어놓았다. 예전에 엽승덕은 장박원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하지만 장박원이 엽이채와 사랑의 도피를 한 후로는 현실의 제약이나 속박을 벗어던지고 용감하게 진정한 사랑을 추구한 장박원을 아주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백야, 저도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백야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장박원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잖아도 집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엽승덕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일만 냥이나 되는 큰돈을 내가 어디에서 구한다는 말이냐?”

어디서 일만 냥이나 구할 수 있겠는가? 지난번 장씨 가문과 엽씨 가문의 혼사가 정해지고 그 이튿날 그는 불효막심한 딸 덕분에 밖에서 물건을 구입하는 비용과 대외활동비도 빼앗겨 버려 지금 수중에 남은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건…….”

장박원은 실망감을 역력히 내비쳤다.

“일단 걱정 말거라.”

엽승덕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수중에 돈이 없지만 내 불효막심한 딸에게는 혼수가 한가득 있다. 그 애가 너희들에게 혼수를 빌려 주게 할 방법을 생각해 보마.”

엽승덕은 엽연채가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과 엽이채의 혼수를 차지한 건 뻔뻔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며 막돼먹은 여인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미 엽연채의 손에 들어갔고, 그 불효녀와 온씨는 사납고 포악하니 다시 빼내 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니 빌린다고 말해야 중재가 가능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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