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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50화 (50/858)

제50화

한편, 엽연채는 추길을 불렀다. 그녀는 경인을 정안후부로 보내 엽영교에게 서신을 전달하라고 분부했다.

경인은 저녁 무렵 정국백부로 돌아왔다. 소식을 들은 엽연채는 손에 들고 있던 화본을 내려놓고는 소청으로 걸어갔다.

경인이 웃는 얼굴로 고했다.

“정안후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는데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엽이채가 울며불며 안녕당으로 달려가 사실을 고해바치려고 했던 것, 손씨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려고 하면서 집안사람들에게 혼수를 메꿔 달라고 요청했던 것, 유이가 나타나 거짓말이 탄로 난 것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 주었다. 추길과 혜연은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포복절도했다.

추길은 아주 속 시원해하며 말했다.

“그래도 싸지!”

경인은 상황 전달을 모두 마치고 엽영교의 말을 전했다.

“영교 아가씨께서 내일 자수실을 고르러 금수재錦繡齋에 가실 것이라면서 아가씨께도 같이 외출하실지 여쭈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마침 나도 책방에 가서 화본을 고르려고 했어!”

엽연채는 서책을 넘기며 흔쾌히 응했다.

* * *

하늘이 어둑어둑한 저녁 무렵, 혜연과 추길은 소청에서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주운환과 여한도 이즈음 귀가했다. 그가 서측 측문으로 들어가려는데 진씨의 어린 여종이 그를 막아섰다.

“셋째 도련님, 마님께서 부르십니다.”

주운환은 어리둥절했다. 적모는 늘 서자들을 싫어했고, 자신도 어렸을 때는 어지간히 괴롭힘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적모가 벌을 내리면 순순히 벌을 받았고, 또 그녀가 매질을 가하면 찍소리도 내지 않고 그 매를 다 맞았다. 그러자 그녀도 저를 괴롭히는 데 흥미를 잃었다. 여전히 자신을 미워하긴 했지만 구태여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렇게 날 공기 취급한 지 여러 해가 지났는데 이제 와서 왜 갑자기 부르다는 말인가?’

사실 추측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아내 일로 자신을 부른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주운환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한아, 가서 부인께 날 기다릴 것 없이 식사는 혼자 하셔도 된다고 전하거라.”

마음이 씁쓸해진 여한은 돌아서서 서과원西跨院으로 돌아갔다. 주운환은 여종과 함께 청석판이 깔린 길을 따라 일상원으로 향했다. 일상원 문안으로 들어서자 녹지가 정방의 회랑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녹지가 말했다.

“셋째 도련님, 오셨군요! 마님께서 고질병이 도지셨어요. 무척이나 고통스러워하시는데 어떤 약을 먹어도 효험을 보지 못하고 계셔요. 셋째 도련님은 한동안 마님을 위해 『지장경地藏經』을 필사하지 않으셨죠. 오늘이 또 초하루이니 마님께서 셋째 도련님께 소불당小佛堂에 가서 『지장경』을 스무 번 필사하라고 하십니다.”

“알겠다.”

주운환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녹지 네가 나 대신 어머님께 문안 인사 좀 전해 드리거라.”

그 말만 남긴 뒤 주운환은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녹지는 미끈하게 뻗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속으로 그의 흉을 봤다.

‘정말 백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풍모와 용모네. 흥, 기녀의 아들다워.’

* * *

그 시각 궁명헌.

혜연과 추길은 밥상을 다 차렸다. 엽연채가 밥상 앞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주운환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한이 홀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셋째 마님, 혼자 식사하시지요. 셋째 도련님께서 오늘은 드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알겠다.”

엽연채는 알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주운환에게 중요한 일이 생겨 식사하러 오지 못하는 모양이라고 단순히 생각했다. 말을 전한 여한은 냉큼 돌아서서 가 버렸다.

엽연채는 젓가락을 들고 식사를 하다가 밥을 반 공기쯤 먹었을 무렵 불현듯 미간을 찌푸렸다.

“방금 여한이 왔던 거지?”

“예!”

추길이 고개를 끄덕이자 엽연채의 의문이 더욱 커졌다.

“여한도 돌아왔는데 어째서 공자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신 거지?”

“오늘은 여양과 함께 외출하신 게 아닐까요?”

혜연의 말에 엽연채는 ‘아’ 하고 수긍했다. 주운환이 밖에서 하고 다니는 일에 대해 그녀가 미주알고주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사월밖에 안 되었는데도 날은 벌써 더운 감이 있었다. 엽연채는 부채를 흔들며 밖에서 소화를 시키고 있었다.

그런데 난죽거를 지나가다가 여한과 여양이 난죽거 정방의 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본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며 난죽거로 걸어 들어갔다.

“어째서 둘 다 여기 있는 것이냐?”

“있으면 안 됩니까?”

여양은 콧방귀를 뀌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엽연채 뒤에 서 있던 추길은 엽연채를 대하는 여양의 버릇없는 태도를 보고는 입을 실쭉거렸다.

“여양아!”

여한이 그를 확 밀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물었다.

“셋째 마님, 식사는 다 하셨습니까?”

“그래, 지금 소화시키는 중이다.”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너희 둘 다 여기 있는데 공자께서는 어째서 돌아오지 않으신 게냐?”

“도련님은 진작에 돌아오셨거든요!”

여양이 성이 난 목소리로 대꾸하자 추길도 화를 내며 쏘아붙였다.

“우리 아가씨께서도 공자님 일에 이러쿵저러쿵 물어보실 생각 없으시거든. 그저 식사하러 오지 않으셨기에 궁금해서 물으신 것뿐인데 네가 뭔데 이렇게 나오는 거야.”

여한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얼른 좋게 말했다.

“얘가 생각이 없어서 그래. 셋째 도련님이 마님께 불려 가셔서 그러니까 좀 이해해 줘.”

“마님께서 왜 셋째 공자님을 부르신 거냐?”

엽연채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셋째 마님도 다 아시면서 뭘 물으세요. 셋째 마님께서 벌이신 일 때문에 저희 도련님께 화풀이를 하시는 거겠죠. 마님께서 병으로 몸져누우셨다면서 도련님께 소불당에 가서 『지장경』을 필사하라고 하셨어요!”

여양의 차가운 목소리에 엽연채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그러자 여한이 얼른 입을 열었다.

“셋째 마님, 마음에 두지 않으셔도 됩니다. 셋째 마님께서 시집오시기 전에도 자주 있었던 일입니다. 도련님은 어릴 때도 자주 필사를 하셨어요.”

엽연채는 복잡한 마음을 품은 채 난죽거를 나섰다.

* * *

하늘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였다. 스산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서과원과 달리, 정국백부 중앙에 위치한 뜰은 곳곳에 등불을 밝혀 놓아 길이 환했다. 더욱이 일상원은 화기애애한 목소리로 가득했다.

“형님이 수재秀才가 되셨네. 수레를 밀고 끌며 형님을 서당에 보냈지…….”

올해 네 살인 강심설의 아들 주학해가 방 한가운데 서서 옹알거리고 있었고, 폴짝거리며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에 다들 즐거워하니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재롱을 떠는 손주의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는 진씨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우리 학해의 노래 실력이 보통이 아니구나. 자, 이 할미가 계화떡을 주마.”

주학해는 얼른 진씨 곁으로 달려가더니 그녀의 품에 앉아 기쁜 얼굴로 떡을 조금씩 뜯어 먹었다. 강심설의 여종 만월은 화목한 모습을 지켜보다가 밖으로 나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강심설은 의기소침한 만월의 표정을 통해 만월이 주비양을 부르러 갔으나 그가 오지 않겠다고 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순간 비웃음 섞인 냉담한 눈빛을 번뜩였다.

화목한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셋째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에 진씨의 표정이 확 굳었다.

‘간만에 손자의 재롱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이 빌어먹을 계집이 또 와서 기분을 망치다니!’

“어머님, 저 왔습니다.”

이미 안으로 들어온 엽연채는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그래.”

진씨는 뜨뜻미지근한 말투로 대충 대답하고서는 주학해의 조그만 얼굴을 어루만졌다.

“천천히 먹거라. 그러다 볼이 터지겠구나.”

주변을 둘러보던 엽연채가 물었다.

“어째서 제 부군께서는 보이지 않는 겁니까?”

진씨의 표정이 점점 싸늘하게 변하는데도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어머, 어머님 건강이 아주 좋아 보이시네요. 제가 방에서 함께 식사하려고 부군을 기다리고 있는데, 여한이 와서는 어머님 병이 위중해서 부군께 『지장경』을 필사하며 복을 기원하라고 하셨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어머님께서 와병 중이신 줄 알고 곁에서 보살펴 드리러 이렇게 왔는데.”

그 말에 진씨와 강심설 등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표정이 확 굳었다. 진씨는 더욱 난감해했다. 자신이 꾀병을 부려 서자를 괴롭힌다고 대놓고 들추어내는 게 아닌가.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여태껏 아무도 나서서 들추어내지 않았다.

진씨는 엽연채와 주운환이 따로 지내기 때문에 그녀가 분명 주운환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시집을 오면서 정조를 잃은 몸이 되어 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부부로 지내는 모양이라고 여겼다.

그러니 자신이 주운환을 못살게 군다 하더라도 엽연채는 전혀 관여하지 않겠거니 했는데, 이렇게 소란을 피우러 올 줄이야. 게다가 대놓고 밉상스러운 말까지 하니 진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처지가 되어 몹시 화가 났다.

그러자 강심설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셋째 도련님이 필사하시는 게 정말 효과가 좋거든. 셋째 도련님이 필사하시기만 하면 어머님 허리 통증이 싹 가시더라고.”

“맞다!”

진씨는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녀에게 밉보이기 싫으면서도 또 체면 때문에 필사를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진씨는 꾀를 냈다.

“날이 벌써 이렇게 어두워졌구나. 녹지야, 셋째가 날 위해 필사를 몇 번 한다고 하더냐?”

“셋째 도련님은 효성이 지극하셔서 마님을 위해 스무 번 필사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이도 참. 날이 이렇게 어두워졌으니 가서 열 번만 하면 된다고 전하거라.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하고.”

진씨는 손자에게 계화떡을 먹이며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머님, 저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진씨는 엽연채가 물러간 쪽을 쳐다보더니 손에 든 계화떡을 바닥에 냅다 집어 던졌다.

“쟤는 대체 왜 저러는 것이냐? 셋째 그 빌어먹을 놈을 다른 곳으로 쫓아낼 땐 언제고 지금은 왜 또 와서 나보고 셋째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냐!”

그러자 강심설은 눈에 조롱을 한가득 담고 대꾸했다.

“셋째 도련님을 깔보기는 해도 어쨌든 자기 남편이다 이거지요. 어머님께서 셋째 도련님에게 벌을 주시면 자기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하겠죠.”

그 말에 진씨는 콧방귀를 꼈다. 그녀는 주운환 부부 사이가 삐걱거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안 그랬다가는 주운환이 부귀한 가문의 적녀를 아내로 맞이해 양심도 없이 자기 아들의 세자 자리를 노릴 줄 누가 알겠는가. 아니, 머지않아 그런 마음을 품게 될 것이 분명했다.

엽연채는 어찌 됐든 셋째의 부인이었다. 더군다나 본래 명문가의 적녀니 절대로 한평생 이렇게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지기 싫어하고 손해 보지 않으려는 성격이니, 설령 셋째가 그럴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그녀가 옆에서 세자의 자리를 손에 넣으라 셋째를 부추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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