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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48화 (48/858)

제48화

그 소리를 들은 엽영교는 두 눈을 반짝이더니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다급하게 부르는 것을 보니 분명 무슨 급한 일이 있나 봐요. 어서 안으로 들이세요!”

“안으로 들이거라!”

엽학문의 분부에 여종이 발을 걷어 올리자 유이가 서둘러 들어왔다. 그의 얼굴은 온통 땀범벅이었고 머리에 쓴 검은 모자도 삐뚤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는 둘째 일가가 한자리에 있는 모습과 눈물 자국이 얼굴 곳곳에 남아 있는 엽이채를 보고는 순간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그 이유를 짐작했다.

“무슨 일이냐?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엽학문은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말이죠…….”

유이가 엽승신을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방금 전 밖에서 일을 보다가 어떤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바로 둘째 나리께서 둘째 아가씨의 혼수를 내기로 전부 날려 버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손씨와 엽승신의 낯빛이 확 변했고 손씨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내며 말했다.

“이, 이놈! 그게 무슨 망발이냐!”

“그게…….”

유이는 놀라서 멈칫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유이는 둘째 식구가 모두 이곳에 자리하고 있고 둘째 아가씨도 두 눈이 벌게질 정도로 펑펑 운 얼굴이라, 벌써 일이 전해진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노태야와 다른 식구들이 속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게 참말이냐?”

엽학문이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일이 이미 이 지경까지 이르렀으니 유이는 감히 엽학문에게 거짓을 고할 수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정을 상세히 고했다.

“참말입니다. 제가 문방文房(문구점)에서 나리께서 쓰실 벼루를 고르고 있는데, 한 소년이 저에게 와서 둘째 나리께서 저당 잡힌 물건을 도로 찾아갈 거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니, 그 아이가 자긴 금외루의 심부름꾼이라면서 그저께 둘째 나리 내외분이 혼수품 같은 물건을 한가득 가져와 자기네 전당포에 저당을 잡혔다고 했습니다. 무려 일 만 냥이나 되는 것을 말이죠.

그다음에는 두 분께서 그 돈을 가지고 적성국으로 가셔서 몽땅 판돈으로 걸으셨다고 했습니다. 둘째 나리께서 대단한 확신을 갖고 돈을 걸으시더래요. 자기하고도 여섯 냥을 걸고 내기를 하셨다면서요. 하지만 그만 지고 마신 거죠!”

묘씨와 엽학문은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 이놈!”

손씨는 유이를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었다. 유이는 그녀가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자 몸을 움츠렸다.

“…이게 정말 사실이더냐?”

엽학문은 굳은 얼굴로 손씨를 노려보았다.

“아버님…….”

손씨는 온몸을 달달 떨었다.

“흑… 흑, 허어어엉!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께서 이 일을 해결해 주세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엽이채는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크게 울부짖었다.

“제 혼수가, 제 혼수가 몽땅 사라졌어요! 이래서 어떻게 시집을 가겠어요? 그냥 죽어 버릴래요! 죽어 버릴 거라고요!”

“이런 정신 나간 것들을 보았나!”

눈앞이 캄캄해진 엽학문은 버럭 고함을 지르더니 손에 든 찻잔을 냅다 집어 던졌다.

“아버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손씨는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이채의 혼수입니다……. 어찌 됐든 간에 우선 빌려야…….”

“혼수가 없는 건 다 니들이 벌인 짓 때문이다!”

돈을 빌린다니! 현재 집안에서 모아둔 돈은 엽이채의 혼수를 마련하기 위해 전부 탈탈 턴 상태였다. 게다가 반년 후면 영교도 시집을 가는지라 칠천 냥의 혼수를 더 해 줘야 했으며 혼례식 당일에도 천 냥을 더 써야 했다.

며느리인 나씨에게 빌린 것은 좀 더 나중에 갚아도 된다지만, 그저께 대대로 교분을 맺어 온 두 집안에서 청첩장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태자의 생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귀한 선물도 올려야 했다. 3개월 후에 토지세와 소작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현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 판국에 엽이채 때문에 일만 냥을 더 빌리게 되면 집안사람들은 어떻게 살란 말인가?

손씨는 엽학문이 진상을 알게 된 이상 집안에서 혼수를 메워 줄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아니면… 지금 집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연채이니 도와 달라고 부탁해 봐야겠어요.”

“그 아이가 퍽이나 도와주겠구나!”

엽학문이 호통을 쳤다.

“주씨 가문 부인을 찾아가 연채에게 말해 달라고 부탁드리면 되죠.”

손씨는 순간 독기 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그녀는 진씨가 엽연채에게 사당에서 무릎 꿇는 벌을 내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씨의 손아귀에 잡힌 거야! 만일 엽연채가 혼수를 안 내놓겠다고 하면 갖가지 방법으로 주씨 가문을 들쑤시면 된다. 그럼 엽연채가 안 내놓고 배기겠어?’

“동서는 사람을 모해하는 데 도가 텄군!”

갑자기 누군가의 냉소가 들려왔다. 밖에 설치된 발이 걷히더니 온씨가 노기충천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왔다.

“또 우리 연채를 건드리려는 게야!”

그 말에 손씨의 안색이 확 변했다.

“큰애야…….”

엽학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버님!”

온씨는 냉랭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 서 있었고 엽연채와 닮은 아름다운 얼굴로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두 눈에는 원망과 분노로 얼룩진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전 정말 모르겠습니다. 왜 또 둘째네가 저지른 일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 책임을 져야 합니까? 왜 이채한테 문제가 생기면 그 피해를 보는 건 항상 우리 연채입니까!”

엽학문은 멍해진 얼굴로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러나 그 역시 양심에 찔려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하지만 손씨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도리어 역정을 냈다.

“애초에… 애초에 연채가 장씨 가문에서 보낸 예물과 이채의 혼수를 몽땅 가져가지 않았다면 저희가, 저희가 이런 짓까지 벌이지는 않았겠죠!”

“그 이야기는 이미 마무리됐지 않나. 이채가 당연히 우리 딸에게 보상해 줘야 되는 부분이지! 그리고 집안에서 한 번 더 이채에게 혼수를 모아 줬잖은가! 자네의 욕심이 끝이 없어 이 지경이 된 것이지!”

온씨가 차가운 목소리로 쏘아붙이더니 이어 눈물을 가득 머금고는 엽학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님, 애초에 연채가 장씨 가문에 시집갔다면 이리 많은 일들이 일어났겠습니까!”

엽학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이 맞았다. 애초에 엽이채가 이 혼사를 가로채지만 않았으면 어찌 이런 많은 일들이 일어났겠는가. 다 엽이채 때문에 생긴 일었다. 한번 일이 꼬이니 또 다른 일이 꼬리를 물고 벌어졌다.

게다가 둘째 내외는 자신들이 판돈을 잃어놓고선 장씨 가문 부인에게 뒤집어씌우려고까지 했다. 그러면서 손실을 본 부분을 가족들에게 메꿔 달라고 하다니, 정말이지 남을 모해하는 데 도가 튼 이들이라고 엽학문은 생각했다.

쨍그랑!

엽학문이 항탁 위에 놓인 찻주전자를 손으로 확 밀어 버리자 찻주전자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는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너희들이 벌인 짓이니 스스로 책임지거라! 혼수품을 누구에게 빌리든 그건 너희들이 알아서 하고, 못 빌리거든 시집 안 보내면 그만이다.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거라!”

“흐흑! 아버지, 어머니가 죽도록 미워요! 죽도록 밉다고요! 그냥 콱 죽어 버릴 거예요!”

엽이채는 냅다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채야!”

더 이상 남아 있기 부끄러웠던 손씨도 얼른 그 뒤를 쫓아갔다.

엽이채는 눈물바람으로 뛰쳐나갔다. 옥리원에 도착한 그녀는 상자에서 하얀 비단을 꺼내고 의자를 잡아끌었다. 그러곤 의자 위로 올라가서 비단을 대들보에 걸고 매듭을 짓더니 목청이 찢어져라 슬피 울부짖었다.

“그냥 이대로 죽어 버릴 거예요!”

손씨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엽이채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손씨였으나, 그녀가 목매 죽으려 하는 모습을 보자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손씨는 딸을 끌어내리더니 뺨을 냅다 후려쳤다. ‘짝’ 소리와 함께 휘청거리던 엽이채가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모친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절 때리신 거예요?”

손씨도 멍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딸의 뺨을 때릴 줄이야! 하지만 궁지에 몰려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손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더욱 모진 말을 내뱉었다.

“살기 싫어? 그래, 그럼 그대로 죽어 버리든가!”

엽이채는 말문이 막혔다. 절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장씨 가문 적자에게 시집을 가야 하니까! 그러면 화려하고 멋진 나날들이 펼쳐질 텐데 결코 죽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너무 억울했다. 그래서 이 난리를 쳐야 했다. 이리 소란스럽게 굴지라도 않으면 사람들이 어찌 이 억울함을 알아 주겠는가! 어떻게 이 억울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겠는가!

엽이채는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이게 다 어머니, 아버지 때문이에요! 두 분 때문이라고요!”

손씨는 판돈을 날려먹어 초조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엽학문에게 된통 혼나기까지 했다. 그래서 지금 난감하기 이를 데 없고 괴로워 죽을 것만 같은 마음인데, 딸이 그런 심정을 이해해 주기는커녕 계속해서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그녀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부끄러운 나머지 성을 냈다.

“나도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것이다! 지금 이 난리를 쳐 봤자 아무 소용없다. 방법을 강구해 내야지.”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각해 낸 방법은 필요 없어요!”

그렇게 목 놓아 울던 엽이채는 갑자기 뭔가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두 분께서 말씀하신 깜짝 선물이란 게… 설마 저를 위해 노름에서 돈을 따는 것이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리석은 일만 할 줄 아시네요! 세상에 두 분처럼 우둔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 큰돈으로 노름을 하다니, 두 분 도움 따윈 필요 없어요!”

엽이채의 말에 손씨는 더욱 난감해졌다. 그녀는 화가 나 머리가 윙윙 울렸다.

“좋아. 내 도움은 필요 없다는 거지? 알았다. 그럼 나도 손 떼마!”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벌컥 화를 낸 손씨는 그 말을 하고선 홱 돌아서서 가 버렸다.

‘지금 정색할 사람이 누구인데!’

성질이 날 대로 난 엽이채는 휘청거리다가 침상으로 고꾸라지더니 조금 전보다 더 큰 소리로 통곡하기 시작했다.

* * *

정안후부에서 한바탕 난리가 난 그 무렵, 엽연채는 아직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그녀가 사는 백부는 도성의 북쪽에 위치했고 적성대는 가장 번화한 중심부에 있었으니 갈 길이 멀었다.

적성대에서 모욕을 당한 주묘서는 이미 마차를 타고 먼저 떠난 상태였다. 그래서 엽연채는 하는 수 없이 엽영교와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밖에서 작은 마차 한 대를 빌렸다.

마차는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대로를 지나갔고, 주묘화와 그녀의 여종 여의는 엽연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생긴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묘화는 얼떨떨했다.

‘새언니는 지금 언니 일로 수심이 가득할 텐데 어떻게 웃을 수 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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