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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47화 (47/858)

제47화

엽이채는 억울해 죽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 아버지가 노름에서 지는 바람에 모든 혼수품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엽연채가 녹죽원에서 다 빼앗아 갔을 때보다 훨씬 더 억울하고 괴로웠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흐윽,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이 해결해 주세요! 전 살고 싶지 않아요! 살고 싶지 않다고요……!”

엽이채는 안녕당으로 뛰어갔고, 그녀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하인들은 서로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뒤에서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엽이채는 다른 사람들이 험담하는 것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가슴속의 울분을 쏟아 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안녕당 대문으로 뛰어 들어가던 그녀는 그만 문턱에 걸려 엎어지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크게 신음했다.

“으윽!”

“무슨 일이냐?”

그녀의 머리 위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매화 문양이 들어간 하늘하늘한 치마를 입은 소녀가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엽영교였다. 그녀는 엽이채의 손목을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조심 좀 해. 그 팔찌 내가 엄청 아끼던 거란 말이야. 넘어져서 망가뜨리지 말라고.”

엽이채는 넋이 나간 채 자기 손목에 찬, 윤이 흐르고 투명한 빛을 발하는 벽옥 팔찌를 내려다봤다. 그녀는 곧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이 팔찌가 저를 비꼬며 제 얼굴을 후려갈기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만 해도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자신이 이겼다고 떠들어 댔었다. 전리품까지 얻어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자신의 부모가 딸의 모든 혼수품을 날려먹었을 줄은 몰랐다. 마치 혼수품 전부를 이 팔찌 하나와 맞바꾼 듯했다.

“밖이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겁니까?”

방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 마마였다.

“이채가 왔어. 근데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엽영교가 몸을 돌려 전씨의 말에 답했다. 그러곤 엽이채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일어나.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엽이채는 그녀의 힘을 빌려 몸을 일으켰다.

“가자. 우리 부모님 보러 온 거 아니야?”

엽영교가 치맛자락을 나부끼며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갔다. 입을 실쭉거리던 엽이채는 엽영교가 자신을 끌어당기자 더욱 억울함을 느꼈다. 그녀는 수치스러우면서도 화가 나서 온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러나 도무지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기에, 그저 훌쩍거리며 엽영교의 뒤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여종이 발을 걷어 올리자 두 사람은 앞뒤로 서서 서차간으로 걸어갔다. 묘씨와 엽학문은 막 식사를 마치고 나한상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채야, 무슨 일이냐?”

현재 엽학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구는 엽이채였다. 엽이채는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은 채로 훌쩍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눈가는 빨갛게 부어 있었고 낯빛은 창백했다. 깜짝 놀랄 만한 모습이었다.

“울면서 뛰어오고 있더라고요. 무슨 일로 저러는 건지 모르겠네요.”

엽영교는 묘씨 옆에 놓인 복숭아꽃 문양 수돈 위에 앉더니 빈정거리며 놀리듯 말했다.

엽이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본래는 자신의 억울함을 울며불며 하소연하려고 했었는데, 엽영교를 만나자마자 울음이 쏙 들어갔다. 자기 혼수를 부모님이 몽땅 날렸다는 이야기를 엽영교 앞에서 어떻게 꺼내 놓을 수 있겠는가. 사실을 털어놓으면 적성대에서 우쭐거렸던 자신은 또 대체 뭐가 되겠는가.

“이채야! 이채야!”

이때, 손씨와 엽승신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잠시 진정이 됐던 엽이채의 마음은 손씨와 엽승신을 보자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고, 마음속이 억울함과 분노로 가득 차 버렸다. 엽이채는 코를 훌쩍이며 갑자기 울부짖더니, 엽학문과 묘씨 앞에 쿵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께서, 두 분께서 해결해 주세요……. 흑흑,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아버지 어머니께서…….”

“얘가 참!”

손씨는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냅다 달려가 엽이채의 입을 막았다.

“우… 으… 읍……!”

엽이채는 발버둥을 쳤다.

“이렇게 소란을 피우다가는 정말 아무것도 없이 시집가야 해!”

손씨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승신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엽학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그게…….”

엽승신은 창백해진 낯빛으로 더듬거리기만 할 뿐 감히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장씨 가문이!”

손씨가 다급히 말을 내뱉더니 정신없이 눈알을 굴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장씨 가문이…….”

“장씨 가문이 어쨌다는 것이냐?”

엽학문은 장씨 가문이라는 단어를 듣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이번 혼사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손씨는 마침내 할 말을 생각해 냈다.

“장씨 가문에서… 저희 이채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바로 이 일 때문에 이리 우는 겁니다! 장씨 가문에서 이채는 둘째 아들의 소생이니 자기네가 이채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것은 엄청난 손해니 뭐니 하더라고요. 그러니… 혼수로 삼만 냥은 준비해 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엽승신과 엽이채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엽승신은 두 눈을 살짝 번뜩이고는 고개를 숙였다. 지금으로선 집안에서 혼수를 더 마련하도록 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엽이채도 더 이상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곤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혼수만 다시 생기면 과정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뭐라?”

엽학문과 묘씨의 안색이 동시에 확 변했고 엽학문은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단 말이냐! 장찬 이 늙은이는 대체 뭐 하자는 겐지. 응? 안 되겠다. 내 직접 그 인간을 찾아가 따져야겠구나. 이미 이야기를 마친 혼사이거늘 또 이런 짓거리를 한단 말이냐!”

그렇게 말하며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씨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 이야기가 장씨 가문 귀에 들어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랬다가는 이 일의 전말이 모두 들통나고 말 것이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 댁 노태야가 아니라… 이 이야기를 한 사람은 장 부인입니다!”

손씨는 생각을 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이채가 적성대에 갔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물건을 좀 사려고 보석상에 들렀다가 장씨 가문 부인과 마주쳤습니다……. 아니, 마주쳤다고 할 수도 없죠. 보석상에 들어서는데 우연히 그 댁 부인과 여종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겁니다.

부인이 이채를 자기 집안에 들이는 건 엄청난 손해라고 하시더랍니다. 이채는 서녀인 데다 혼수도 연채보다 적다면서, 이채가 시집올 때 혼수를 얼마나 들고 오는지 볼 거라고 했습니다. 만약 연채보다 적으면 제대로 괴롭혀 줄 거라고 벼르면서요! 또 곁에 두는 여종을 장박원의 첩실로 삼아 이채보다 먼저 장자를 보게 할 거라고도 했어요!”

“뭐라?”

엽학문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래서… 이채가 이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오더니 저와 나리께 혼수 만 냥을 더 준비해 달라고 했던 겁니다. 저희가 몇 마디 했더니 이곳으로 뛰어온 것이지요.”

손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좀 찔렸는지 엽이채를 흘끗 쳐다봤다. 과연 엽이채는 화가 나서 그대로 까무러칠 뻔했다.

‘곤경에 빠진 사람은 바로 나고 가장 억울한 사람도 나인데 모든 책임을 내게 덮어씌우다니! 나를 철부지로 만들어 버리다니!’

손씨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엽이채의 표정을 보더니 얼른 자신의 과오를 만회할 수 있는 말을 꺼냈다.

“아버님, 그래서 말인데요. 이채가 삼만 냥의 혼수를 해 간다면… 장, 장씨 가문 부인께서도 만족하실 겁니다. 집안의 대사인 혼사를 치르는 건데…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치러야 하잖아요. 만족시킬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만족시켜야 해요! 그래야… 이채한테도 좋을 거고 저희 가문에도 좋을 겁니다.”

그러자 엽학문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삼만 냥? 지금 그만한 돈이 어디 있느냐?”

“그게… 아가씨께…….”

손씨는 그리 말하며 묘씨와 엽영교를 쳐다봤다. 그러자 묘씨는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리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교도 반년만 있으면 출가한다. 너는 한 번 뜯어간 것으로는 부족해 또 그러는 게냐! 그만 못하겠느냐?”

그러자 손씨는 몸을 움츠리더니 이를 꽉 물고 말했다.

“이채가 장씨 가문 적자의 아내가 되면 나중에 아가씨를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요.”

“됐거든요!”

엽영교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분노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냉소가 터져 나왔다.

“장씨 가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요. 나는 비렁뱅이에게 시집가나 보죠? 시집가서도 장씨 가문에 빌붙어야 하고요? 한 번 뜯어가더니 또 뜯어 가려고 하네! 장씨 가문은 부잣집이고 묘씨 가문은 먹고 입는 것도 해결 못할 정도로 가난하니, 장씨 가문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손씨는 사레가 들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억울한 엽이채는 분노와 수치심으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은 고모의 남은 혼수를 뜯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 자신을 탓해서는 안 되었다. 자신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까.

묘씨의 낯빛은 먹물이라도 흘러내릴 듯이 어두워졌다. 그녀가 여태껏 둘째 며느리 내외를 떠받들어 준 건 지금보다 더 이득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지금 남은 밑천마저 다 뜯어 가려고 하니 어디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묘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채는 장씨 가문에서 자리를 잡아야 되고 우리 영교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말이냐? 그리고 시집에서 자리를 잡으려면 며느리로서의 본분을 다해야지. 시집에… 크흠,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며느리로서 본분을 다하는 게지.”

사실 그녀는 서둘러 시집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 하나 안겨 주는 것이야말로 며느리로서 본분을 다하는 셈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도 아들을 낳지 못했고, 이는 자기 인생에서 약점이 되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얼른 말을 바꿨던 것이다.

손씨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묘씨에게서는 절대로 무언가를 더 뜯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도무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

이때, 엽승신이 엽학문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금 이채의 혼수를 마련하기 위해 집안 재산을 있는 대로 다 끌어다 쓴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혼사는 정말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영교처럼 순탄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영교는 외숙부댁과 치르는 혼사이지 않습니까.

이채 혼사도… 어찌 됐든 간에 잘 넘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면 어떨까요? 우선 밖에서 빌리는 게지요. 저희 정안후부가 일만 오천 냥도 못 빌리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엽학문은 미간을 찌푸리며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리! 나리!”

이때, 밖에서 엽학문의 사동 유이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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