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그녀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콧방귀를 뀌더니 엽연채와 엽영교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모, 언니. 제가 이겼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엽영교는 굳은 표정으로 꽤나 아끼던 벽옥 팔찌를 그녀의 손에 확 밀어 넣었다. 엽연채는 산호 반지를 엽이채의 손에 쥐여 주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보는 눈이 있네. 이건 내 혼수 선물이다. 별건 아니지만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렴.”
엽이채는 업신여기는 눈빛으로 그 반지를 쳐다봤다.
‘이런 낡아 빠진 산호 반지를 누가 귀히 여긴다고.’
하지만 받을 건 받아 내야 했다.
“전 항상 보는 눈이 좋았어요. 제가 이겼네요.”
물건을 다 받자마자 그녀는 홱 돌아서서 가 버렸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린 여설은 멍하니 엽이채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꼭 나무 인형처럼 팔과 다리를 동시에 뻗으며 걸어갔다.
엽이채는 손에 쥔 엽영교의 벽옥 팔찌를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건 꽤 괜찮네.”
엽이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여설은 얼빠진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곤 웃음을 지었다.
“얘, 여설아, 내가 이겼다! 내가 말하지 않았니. 분명 유 소저가 이길 거라고!”
여설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여전히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엽이채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아, 알겠다. 그 농가 소녀가 졌으니 나한테 은화 오십 냥을 줘야 해서 속이 쓰려서 그런 거지? 알겠어. 그 오십 냥 안 받으면 되잖아.”
그러더니 엽연채의 산호 반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오늘 기분 좋으니까 이건 상으로 줄게!”
“고… 고맙습니다, 아가씨.”
여설은 입가를 씰룩이며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떠나가는 엽이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엽영교는 콧방귀를 뀌었다.
“쟤한테 지지 않으려고 용쓴 나를 탓해야지. 괜히 져서 팔찌만 하나 뺏겼네. 근데 뭐 지가 잘해서 이겼나. 이건 운 좋다고 과시하는 거잖아. 그래, 네가 이겼다. 장박…….”
엽영교는 하던 말을 멈추었다. 엽연채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이 ‘장박원, 그 잘난 정혼자를 빼앗아갔으니까.’임을 알고 있었다.
엽연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모께 말해 드릴 게 있어요.”
그러더니 엽영교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엽영교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쯧쯧, 가여운 것. 그 팔찌는 내가 선물로 준 셈 치지 뭐!”
그러곤 고소해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엽이채는 적성대 대당을 나선 후 마차에 올라 바로 정안후부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엽이채는 날아갈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그녀는 내기에서 이겨 받은 엽영교의 벽옥 팔찌를 자신의 손목에 차 보았다. 반들반들한 청록색 팔찌를 차니 손목이 더욱 가녀리고 하얗게 보였다.
엽이채가 물었다.
“여설아, 이 팔찌 말이야. 고모가 차는 게 예쁘니, 내가 차는 게 예쁘니?”
엽이채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설은 안색이 창백했다. 그녀는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멍하니 말했다.
“당연히 아가씨가 차신 게 훨씬 예쁘죠.”
엽이채는 그녀의 대답이 아주 흡족했으나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까부터 왜 그래? 안색이 왜 그리 안 좋은 거야?”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럽니다.”
여설의 대답에 엽이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럼 마차 속도를 높이거라. 돌아가서 의원을 부르자꾸나!”
마차 벽을 세 번 두드리자 마차는 속도를 더 높였다.
엽이채는 또 여설에게 말을 걸었다.
“아, 맞다. 깜짝 선물이 있다고 하지 않았니?”
그 말을 들은 여설은 안색이 확 변했다.
“깜, 깜짝… 그 깜짝 선물이 뭔지 저는 모릅니다! 나리와 마님께 여쭤 보세요…….”
그녀는 도저히 사실을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엽이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다들 뭔데 그리 숨기는 거야.”
속도를 내던 마차는 일각쯤 지나자 정안후부 안으로 들어섰다. 엽이채는 곧장 손씨의 거처로 달려갔다.
방 안으로 들어서니 손씨와 엽승신이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엽승신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팔꿈치를 탁자 위에 올려놓곤 손바닥으로 이마를 누르고 있었다. 손씨는 완전히 얼이 빠진 모습으로 초점 잃은 흐리멍덩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엽이채가 웃으며 뛰어 들어왔다.
“오늘 아버지랑 어머니께서 제게 적성대에 가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생각 외로 너무 재미있었어요! 바둑 대결 같은 건 재미없었는데 고모와 큰언니를 만난 거 있죠? 고모와 큰언니랑 내기를 했어요. 전 유 소저가 이긴다는 데 걸었고요. 그리고 제가 이겨서 고모의 벽옥 팔찌를 받아 냈고요. 고모 표정이 정말 볼 만했다니까요!”
손씨는 엽이채가 유곡요에게 걸어 팔찌를 따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낯빛이 확 변했다. 그러나 흥이 오를 대로 오른 엽이채는 계속해서 혼자 떠들어 댔다.
“너무 당연한 거잖아요? 어느 산골짜기에서 온지도 모르겠는 그런 농가 소녀가 어떻게 재상의 손녀를 이길 수 있겠어요?”
말을 마친 엽이채는 손씨가 엽영교를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이상했다. 엽이채는 그제야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버지, 어머니. 왜 그러세요? 아, 맞다. 오늘 제게 깜짝 선물을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대체 그 깜짝 선물이 뭐예요?”
엽이채의 말에 엽승신은 결국 이성의 끈이 뚝 끊어져 버렸다.
“깜짝 선물은 무슨!”
그는 잔뜩 성이 난 목소리로 고함을 치더니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탁자는 우당탕 소리를 내며 뒤집어졌고 찻주전자, 찻잔 등 따위도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이채도 아는 것을! 농가 소녀가 어떻게 재상의 손녀를 이길 수 있겠소!”
엽승신이 일어서면서 탁자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손씨는 비틀거리다가 하마터면 바닥에 고꾸라질 뻔했다. 손씨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 그 소식은 처음에 나리께서 가져오신 거잖아요! 나리께서 시작하신 것이고요. 그 농가 소녀가 반드시 이길 거라고 확신하시면서요. 거기다 또 뭐라고 하셨어요? 많은 일들이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오는데 운 좋게도 나리께서 그 소수 중 한 사람이 될 거라고도 하셨잖아요. 하, 그런데 지금 전부 제 탓으로 돌리시는 것인가요!”
찔리는 구석이 있는 엽승신은 부끄럽고 화가 나 더욱 핏대를 세웠다.
“나, 난 오백 냥만 걸려고 했소. 그럼 손해를 봐도 고작 오백 냥이니까! 그런데 당신이 일만 냥을 걸었잖소. 일만 냥이나!”
“그건 다 나리를 믿었기 때문이죠! 아니다 싶었으면 절 말리셨어야죠! 이제 와서 뒷북치면 뭐 합니까?”
“날 믿었다고? 분명 당신이 암자에 사람을 보내 물어봤다고 하지 않았소. 정방 여승에게서 정확한 소식을 듣고 나서야 일만 냥을 걸지 않았소!”
엽승신은 삿대질까지 하며 노호했다.
“그러면서 내가 담이 작다고 면박을 주지 않았소! 흥, 당신은 담도 참 크오. 커도 너무 커서 판돈을 한 방에 다 잃어버렸잖소!”
“나리! 어쨌든 나리께서 시작하신 일이잖아요!”
그렇게 부부는 상대방의 말을 맞받아치며 싸우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엽이채는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뒷걸음을 치기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대체 무슨 일로 싸우시는 거예요?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시냐고요!”
그렇게 묻는 엽이채는 가슴이 쿵 내려앉아 눈물을 뚝뚝 흘려 댔다. 그녀는 그들의 대화 속에서 잽싸게 핵심적인 단어들을 뽑아냈다. 농가 소녀, 판돈, 손해, 오백 냥, 일만 냥…….
‘세상에나. 제발 내가 지금 상상하는 그런 상황은 아니기를! 대체 어디서 일만 냥을 가져다 쓴 거지? 지금 집안에서 가장 큰 목돈은…….’
거기기에 생각이 미치자 엽이채는 마치 냉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끼얹은 것처럼 오한이 들었다.
“제 혼수는요! 제 혼수는 무사한 거죠?”
그러더니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손씨는 딸의 혼수를 잘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줄곧 자신의 거처에 있는 서쪽 곁채에 자물쇠를 걸어 놓고 혼수를 보관해 왔다.
엽이채는 곧장 서쪽 곁채로 달려갔지만 문이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문을 아무리 밀어도 열리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여설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엽이채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열쇠! 열쇠를 가져오너라!”
여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엽이채의 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어졌다. 결국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더니 손씨의 침실로 뛰어 들어가 열쇠를 가지고 나왔다. 엽이채는 서쪽 곁채 입구로 달려가 열쇠를 낚아챘다. 그녀는 긴장감과 초조함으로 손을 덜덜 떨며 열쇠를 몇 차례 다시 쑤셔 넣고 나서야 자물쇠를 열 수 있었다.
커다란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좋은 물건들이 가득 쌓여 있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엽이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곧 그녀가 비틀거리며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아가씨! 아가씨!”
여설이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자지러지는 비명소리를 들었는지 방에서 치열하게 싸우던 부부는 순간 언쟁을 멈추었고, 손씨가 얼른 밖으로 뛰어나갔다. 나가 보니 곁채 문 앞 회랑에 엽이채가 쓰러져 있었고 여설이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다.
“이채야! 이채야! 이게 무슨 일이냐?”
손씨는 황급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여설의 품에 기대 있는 엽이채는 기절하진 않았으나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문 채 창백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채야…….”
손씨는 그런 딸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라면서 두렵기도 했고 또 걱정스러웠다.
“제기랄. 이게 다 저 여편네 때문이야!”
엽승신이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는 본채 문 앞에 서서 멀리 있는 손씨에게 삿대질을 하며 그녀를 쉼 없이 나무라고 질책했다.
“난 원래 오백 냥만 걸려고 했다고. 근데 저 여편네가 일만 냥을 걸자고 했지! 돈이 없으니 이채의 혼수를 저당 잡혀 그 돈을 걸자고! 그런데 지고 말았잖아!”
“그 입 다무세요!”
손씨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다 나리 때문이에요! 나리께서 시작한 일이잖아요!”
이때, 엽이채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러자 깜짝 놀란 손씨가 말했다.
“이채야…….”
엽이채는 벌떡 일어나더니 문밖을 향해 달려갔다. 달음박질하면서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할아버지! 저 죽어 버릴래요! 이제 다 끝났어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절 사지로 내몰았다고요……! 죽어 버릴 거예요! 죽어 버릴 거라고요!”
결국 엽이채는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