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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45화 (45/858)

제45화

엽연채와 엽영교는 구석에서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었는데, 문득 분홍색 옷을 입고 면사포를 두른 소녀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얼굴을 보지 않고도 엽이채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과연 엽이채가 미소 띤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고모, 큰언니, 미채야.”

그러곤 이어서 주씨 가문 두 아가씨를 흘끗 쳐다봤다. 이 두 아가씨가 바로 주씨 가문 아가씨일 터. 그녀는 주묘서의 차림을 보고는 몸을 부르르 떨며 주씨 가문에 시집 안 간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응.”

엽영교가 뜨뜻미지근한 목소리로 답하는데도 엽이채는 그녀 곁에 천천히 앉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방금 여설이와 내기를 했습니다. 전 유 소저께서 이기는 데 걸었고요.”

그러자 엽영교가 미간을 찌푸리며 찬물을 뿌렸다.

“제민이 이길지도 모르지!”

그녀도 사실 누가 이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은 그저 구경이나 하러 온 참이었다. 하지만 엽이채가 유 소저가 이길 거라고 하니 괜히 반대로 말한 것이었다. 그러자 엽이채가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아니면 고모도 저랑 내기하실래요? 제가 지면 이 목걸이를 고모께 드릴게요.”

그러면서 목에 두르고 있던 팔보八寶 목걸이를 내려놓았다. 그러자 엽영교도 손에 차고 있던 비취 팔찌를 푸르며 말했다.

“좋아!”

엽이채가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큰언니는 안 껴요?”

그러면서 팔에 찬 금팔찌를 또 풀었다. 그 모습을 보는 엽연채의 눈에 순간 비웃음이 어렸다.

“좋아. 나도 끼지 뭐!”

그렇게 말하면서 손가락에서 산호 반지를 뺐다. 그러자 엽이채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큰언니는 왜 그것만 걸어요?”

이 산호 반지는 예쁘긴 했지만 별로 값이 나가는 건 아니었다.

“지금 갖고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그래. 머리에 꽂은 장식마저 빼면 보기 흉할 것 같잖아.”

엽이채는 그녀를 흘끗 쳐다보았다. 엽연채는 오늘 정말 값나가는 장신구를 차고 오지 않았다. 엽이채는 아쉬운 대로 넘어가기로 하고 웃어 보였다.

“고모와 큰언니는 저 농가 소녀에게 건 거예요. 나중에 지고 나서 잡아떼면 안 돼요!”

그 말을 들은 엽영교는 말문이 막혔다.

‘이채 이건 대놓고 이득 볼 만한 사람에게 붙네! 자기는 승산이 높은 쪽에 걸겠다 이거지!’

그러나 엽영교는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라 이제 와 물러서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누가 이기고 질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여설은 엽이채가 계속해서 제 무덤을 파고 있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둘째 아가씨, 그 사람은 진다니까요! 쳇, 뭐 됐어요. 지면 지는 거죠. 그래 봤자 목걸이 하나랑 금팔찌 하나이니까요. 저 농가 소녀가 이기면 은화 몇 만 냥을 따는데요. 원한다면 뭘 줄 수 없겠어요? 까짓것 적선하는 셈 치면 되죠.’

바둑판 주위는 바람 한 점 통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로 들끓어 바둑을 두고 있는 두 소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탄성만 계속해서 들려올 뿐이었고 이를 통해 치열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반 시진쯤 지나자 그쪽에선 잇따라 탄성이 터졌다.

“이겼다! 내 이길 줄 알았다니까!”

“누가 아니래! 당연한 결과지!”

여설은 그 소리를 들으며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가 당연한 결과라는 거지? 다들 유곡요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을 건데. 하지만 이기는 사람은 그 농가 소녀라고!’

여설은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누가 이겼는지 물어보려 하는 순간 누군가가 그 질문을 했다.

“누가 이겼어요?”

“당연히 유 소저지! 그걸 물어봐야 알아?”

사람들 사이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말을 들은 여설은 눈앞이 깜깜해지고 머리가 윙윙 울렸다. 그녀의 귓가로 기뻐하는 엽이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유 소저야! 고모, 큰언니, 감사해요.”

성이 난 엽영교는 뽀로통한 얼굴로 작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눈에 비웃음을 담더니 엽이채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만에.”

엽이채는 일순 어리둥절했으나 곧 엽연채가 주씨 가문에서 고생하기 싫어 자신에게 잘 보이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바둑판 주변은 아직도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유곡요를 치켜세웠다.

“유 소저, 듣기로는 제 소저가 정도 여승을 이겼다고 하던데요. 지금 유 소저께서 제 소저를 이기셨으니 이미 스승님을 뛰어넘으신 거네요.”

그러자 유곡요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닙니다. 스승님께서는 대단한 바둑 실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제 소저와 바둑을 두실 땐 갑자기 고질병이 도져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던 바람에 지시고 만 것입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선 진 것은 진 것이라며 변명은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대답에 담긴 속뜻을 즉시 파악했다. 정도 여승은 뛰어난 바둑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대결에서 졌다. 그러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필 그때 고질병이 도졌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직접 대결에서 진 이유를 사람들에게 설명하면 사람들은 그녀가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우려가 있었다. 얼룩을 지우려다가 더욱 번지게 해서는 안 되지 않는가.

그래서 제자인 유곡요에게 제민의 도전을 받아들이라고 한 다음, 그녀가 제민을 이기면 자신이 바둑 대결에서 졌던 이유를 밝히려 한 것이었다. 그래야만 그녀의 명성과 체면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쯧쯧쯧, 저 농가 소녀는 참 뻔뻔하기 그지없구먼. 정도 여승이 아픈 틈을 타 이겨 놓고는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사람들에게 정도 여승을 이겼다고 말하고 다니며 자신을 미화한 거잖아!”

“미화를 했건 안 했건 어쨌든 제가 이겼잖아요!”

제민은 여전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곤 하품을 하더니 돌아서서 자리를 뜨려고 했다.

“도망갈 생각 말거라!”

귀공자 하나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어디서 이런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 어서 유 소저께 사과드리거라!”

제민이 미간을 찌푸리자 유곡요가 말했다.

“소저, 가세요!”

그러고 나서 그 공자에게 말했다.

“공자, 감사하지만 저희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진 것은 진 것이고 이긴 것은 이긴 것이며, 졌으면 다시 이기면 되는 것입니다. 제민 소저가 스승님과 겨뤘든 저랑 겨뤘든 그저 바둑을 한 판 두었을 뿐이지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말에 선禪의 이치가 가득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전보다 더욱 존경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과연 재상의 적장손녀였고 대제 최고의 재녀라 불릴 만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제민은 깔깔 웃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유곡요는 제민이 아주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와 가타부타 따지기 싫어 작게 한숨을 내쉰 후 그대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데 이때 비단을 찢는 것 같은 쟁쟁 소리가 갑자기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보니 아름답지만 조금 천박해 보이는 차림을 한 소녀가 멀지 않은 곳에 놓인 금안琴案(금을 연주할 때 금을 올려놓는 상) 앞에 앉아 있었다. 방금 들린 그 소리는 그녀가 낸 것이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유 소저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 달떠서 역정 낼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더니 금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연주하는 곡은 그윽하고 고아한 운치를 물씬 풍기는 <정호야월靜湖夜月>이라는 곡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녀의 연주에 그다지 집중하지 않았다. 그녀의 연주 실력이 너무 평범해서 무엇 하나 특별한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주목을 끈 건 오직 그녀의 차림새였다. 금빛 찬란한 장신구들이 가득 꽂혀 있는 머리와 붉고 푸른 화려한 옷차림이 한 마리 앵무새를 연상케 했다.

엽연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주묘서가 안분지족安分知足(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 앎)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잠시 눈을 뗀 사이에 이런 짓을 벌이다니!

“저 사람은 누구야? 어째 차림새가 꼭 공작새 같은데?”

“공작새는 무슨, 딱 봐도 앵무새지!”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주묘서는 그 소리를 듣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금 소리는 이내 멈추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금 소리가 멈추니 상황은 더욱 난감해졌다.

주묘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저도 모르게 엽연채를 쳐다봤고, 이내 시선은 그 옆에 있던 묘기화에게 향했다.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청했다.

“묘 공자님, 저와 함께 합주해 주실래요?”

적성대 두베인 묘기화가 그녀와 함께 합주하겠다고 하면 위신이 크게 서니 이 난감한 상황도 해결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묘기화는 콧대를 세우며 냉소를 지었다.

“제가 왜 소저와 합주를 해야 합니까?”

그 말을 들은 주묘서의 표정은 확 일그러졌고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근처에 있던 유곡요는 ‘픽’ 하고 실소를 터뜨렸고 곁의 노란 옷의 소녀도 따라서 주묘서를 비웃었다.

“저 여인은 누굽니까? 낯가죽도 참 두껍네요! 옷은 꼭 금계錦鷄(관상용 꿩)같이 입고는!”

‘금계?’

주묘서는 더는 견딜 수가 없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뛰어가 버렸다.

“언니…….”

주묘화는 웅얼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기만 할 뿐, 그녀를 쫓아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러던 그때 엽연채가 갑자기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둘째 아가씨, 이 일을 똑바로 보셨죠. 집에 돌아갔을 때 어머님께서 질책하시면 사실을 왜곡하시면 안 됩니다!”

주묘화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말했다.

“그럼요.”

“좋아요. 아가씨 말을 믿을게요.”

이 말을 듣자마자 주묘화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주묘서는 집에 돌아가면 분명 이 일을 일러바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지금 새언니에게 주묘서의 편을 들지 않겠다고 말해 버렸다. 그러나 자신은 적모 밑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서녀에 불과했다.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언니를 따라 바로 집에 갈걸.’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엽이채의 눈에 비웃음이 어렸다. 그러더니 동정심이 가득한 눈으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언니도… 참 힘들겠어요.”

그러자 엽연채도 마찬가지로 안쓰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엽이채를 쳐다보았다.

“이제 네가 더 힘들 것이다.”

엽이채는 그저 엽연채가 악담을 퍼붓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장씨 가문에서 평탄하게 지내지 못하도록 저주라도 하나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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