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엽영교는 다급히 계단 입구로 다가가 연신 그를 불러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괜찮으신 거예요?”
“그래……. 괜찮다.”
묘기화는 그녀의 손을 치우며 사동의 부축을 받고 일어섰다. 민망해서였는지, 묘 공자는 엽영교를 따라 그녀와 함께 걸어왔다.
“표숙表叔(한국의 진외당숙).”
엽연채는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이 아이는…….”
묘기화는 그녀를 못 알아보는 듯했다.
“제 큰조카 엽연채예요!”
“아.”
엽영교의 소개에 묘기화는 비로소 생각이 났다는 듯 다시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널 떠올렸으니 대단히 영광스럽겠구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엽연채는 입가를 씰룩거렸다.
‘저렇게 콧대를 세우며 거만하게 구는 인간이었으니 넘어져 죽었겠지.’
“두베(북두칠성의 첫 번째 별) 공자님이시네요.”
주묘서와 주묘화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묘서가 엽연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새언니, 저분이랑 아는 사이예요?”
“제 표숙이세요.”
엽연채의 대답에 주묘서 자매는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마셨다. 엽연채는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제 고모부가 되실 분이죠.”
주묘서는 내심 실망하는 눈치였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며 비웃듯 냉소를 지었다. 그녀의 고모부가 될 묘기화는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었고, 그랬기에 걱정을 샀다.
본래 묘씨 가문은 도성의 평범한 선비 가문이었다. 과거 이 집안에서 배출한 가장 높은 직급의 관리라고 해 봤자 6품에 불과했다. 이것이 묘씨가 적자와 서자를 합쳐 아들이 이미 총 셋이나 있는 엽학문의 후처로 들어온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묘씨 가문은 십 년 전부터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묘기화 때문이었다. 묘기화는 소년 수재도 소년 장원도 아니었지만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금琴을 아주 잘 탔는데, 그가 상사금相思琴을 연주하면 새떼가 날아와 그 위를 선회했고 그 소리는 마치 두견새가 구슬피 우는 소리 같았다. 후에 그는 적성대 대결에 참가해 단번에 금 연주의 일인자로 우뚝 섰고 ‘두베’라는 칭호도 얻었다.
적성대에서는 각종 재예, 즉 금 연주, 바둑, 서책, 그림, 시, 노래, 춤을 겨뤘는데 각각의 재예에서 일인자로 자리매김한 사람에게는 북두칠성 칭호를 붙여 주었다. 묘기화는 그중 첫 번째인 두베를 칭호로 받았다.
그리고 4년 전부터는 이름을 더욱 떨치게 되었다. 북연에서 대제로 사신을 보내며 금으로 교분을 나누자고 했고, 이때 묘기화가 출전한 것이었다. 두베 공자는 북연 사신을 꺾고 단숨에 명성을 떨쳤고 이후 그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크게 기뻐한 황제는 그에게 관직을 내리려고 했지만 묘기화는 구속되기를 꺼려해 이를 거절했고, 황제는 고민하다가 그의 형에게 정4품 낭중郎中의 벼슬을 내렸다. 그때부터 묘씨 가문도 명망 있는 가문이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재능이 뛰어난 두베 공자께서 실족사하는 어이없는 결말을 맞게 됐다니!’
엽연채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잠시 고민했다.
‘저 인간 저렇게 매를 버는데 그냥 죽게 내버려 둘까?’
“오늘 대결은 참 특이해요. 재상의 따님과 농가 소녀가 대결하다니. 정말 흥미진진하겠어요!”
엽미채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적성대에는 북두칠성 칭호를 받은 일인자들뿐만 아니라 태자 전하, 양왕 전하 등 황가의 분들도 많이 오셨다고 들었어요.”
‘양왕’이라는 두 글자를 들은 엽연채의 표정이 순간 창백해졌다. 차갑고 섬뜩한 빛을 번뜩이던 예리한 칼날이 떠오르자 엽연채는 더는 견디기 어려워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엽영교가 빙그레 웃으며 묘기화를 쳐다봤다.
“맞죠, 오라버니?”
“그래. 모두 왔단다.”
묘기화는 관심 없다는 듯 건성으로 대답하더니 술 주전자를 들어 엽영교에게 과일주 한 잔을 따라 주었다.
“마셔 보렴.”
엽영교는 한 모금 마시더니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오디주네요. 오라버니께서는 참 다정도 하셔요.”
엽연채는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엽영교의 애정표현을 맞닥뜨리는 바람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엽미채와 주씨 가문 자매도 엽영교의 노골적인 언사에 얼이 빠지긴 마찬가지였다.
“왔다!”
갑자기 옆에서 누군가가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보니 입구 쪽에서 소녀 몇 명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선두에서 서서 걸어오는 소녀는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상의로는 매화를 수놓은 연녹색 대금對襟을, 하의로는 암화暗花 문양이 들어간 흰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윤기 나는 머리칼은 독특한 모양의 수운계垂雲髻(옆으로 틀어 올린 머리인데, 쪽을 진 모양새가 흘러가는 구름과 비슷하다고 붙은 이름)로 틀어 올렸는데, 벽옥과 칠보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머리 장식을 꽂아 화려함과 부귀함을 자랑했다.
소녀의 피부는 눈처럼 새하얬고, 조그만 얼굴은 오이씨같이 갸름했으며, 살구 모양의 두 눈은 맑고 투명했다. 그녀의 청아하고 수려한 용모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 소저께서 오셨어!”
많은 규수들이 얼른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최고의 재녀일 뿐만 아니라 권세가인 재상의 장손녀였다. 어느 누가 그녀를 보고 열광하지 않겠는가.
주묘서 역시 그녀와 한마디라도 섞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녀는 엽연채를 밀며 말했다.
“새언니, 가서 인사 안 하세요?”
엽연채는 티 안 날 정도로 그녀를 슬쩍 노려보며 말했다.
“모르는 사이입니다.”
주묘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엽연채가 두문불출하던 사람이란 것을 떠올리고는 다시 엽영교에게 말했다.
“엽 소저는 가서 인사 안 하시나요?”
그러자 엽영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도 저분과 전혀 친분이 없습니다.”
주묘서는 어이가 없었다.
‘정안후부가 그렇지 뭐. 능력이 하나도 없네. 재상의 장손녀와도 친분이 없다니.’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묘기화를 슬쩍 쳐다봤다. 묘기화는 적성대의 금 연주 일인자이고 유곡요는 바둑의 일인자이니, 두 사람은 분명 아는 사이일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 잇달아 두 사람에게 물어본 후라 묘기화에게 다시 물어보기가 망설여졌다. 또 물어봤다간 지위가 높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었기에 그녀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유곡요 일행이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유곡요 곁에 있던 노란 옷을 입은 한 소녀가 말했다.
“그 농가 소녀는 대체 뭔데 곡요 언니를 기다리게 하는 거야.”
유곡요는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직 시간이 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온 것인데 굳이 그 사람을 나무랄 필요가 있느냐?”
그녀가 말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또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왔다, 왔어! 그 농가 소녀가 왔어!”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또 다른 입구에서 평범한 옷을 입은 농가 소녀가 활짝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말쑥하고 참하게 생긴 그녀는 열일곱 살쯤 되어 보였고, 수수한 남색 무명천 상·하의를 입은 채 쪽 진 머리에 복숭아꽃 은잠을 꽂은 차림새였다.
유곡요는 싸늘한 눈빛으로 농가 소녀를 훑은 다음 모포 위로 걸어갔고 농가 소녀도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곡요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저는 정도 여승의 제자 유곡요라고 합니다. 오늘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그러자 농가 소녀도 이에 답례했다.
“저는 상주常州 덕승진德勝鎭 백하촌白河村에서 온 촌부로, 미천한 소녀의 이름은 제민이라고 합니다. 오늘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말을 마친 두 사람은 바둑판 앞에 서로를 마주 보며 앉았다. 돌가리기(한 명이 백돌을 여러 개 쥔 뒤 다른 사람이 흑돌 하나를 바둑판에 내려놓는데, 이때 백돌이 홀수 개이냐 짝수 개이냐에 따라 흑백을 결정하는 방식.)를 통해 유곡요가 흰 돌, 제민이 검은 돌을 잡게 되었다.
두 사람은 즉시 대결에 돌입했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주변을 둘러싸고 그녀들의 대국을 흥미롭게 지켜봤고 바둑에 흥미가 없는 사람들은 좀 지겨워하며 결과를 기다릴 뿐이었다.
엽이채는 바둑에 문외한이었다. 2층 별실 안에 앉아 있던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아버지 어머니께서 나한테 꼭 와 보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어. 저기 앞쪽은 시끌벅적하고 흥겨워 보이기는 하는데, 난 내려가서 사람들하고 어울릴 수 없으니까…….”
엽이채는 감히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형부를 꾀었다고 자신을 흉볼까 봐 두려웠다. 흉한 소문이 돌아 혼사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겠는가? 그러니 조용히 있다가 장씨 가문에 시집가는 게 상책이었다.
그러자 그녀와 함께 나온 여설이 피식하고 웃었다.
“나리와 마님께서 아가씨께 깜짝 선물을 주시려는 거 아니겠어요?”
“무슨 깜짝 선물?”
엽이채는 여설을 잡아당기며 보챘다.
“여설아, 뭔데? 빨리 이야기해 줘!”
“안 돼요. 곧 알게 되실 테니 기다려 보세요.”
엽이채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여설은 요지부동이었다. 엽이채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아래에서 한창 불꽃을 튀기고 있는 두 사람에게 다시 시선을 두었다.
“한번 맞혀 봐. 너희들 생각에는 누가 이길 것 같아?”
여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농가 소녀요!”
“그럴 리가. 저런 사람이 어떻게 재상의 손녀를 이길 수 있겠느냐?”
엽이채의 반응에도 여설은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아니면 나랑 내기할래?”
그러더니 엽이채는 손목에 차고 있던 백옥 팔찌를 풀었다.
“저 농가 소녀가 이기면 이 팔찌는 네 것이다.”
“아가씨께서 주시는 선물 감사히 받겠습니다!”
여설이 기뻐하자 엽이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어째서 네가 이길 거라고 그리 확신해?”
그 말을 들은 여설의 눈에 오묘한 광채가 돌았다.
‘제게는 아가씨께서 모르는 내부 정보가 있답니다!’
“어쨌든 분명 소인이 이길 겁니다.”
그러자 엽연채는 콧방귀를 뀌었다.
“이렇게 하면 너만 이득을 보잖아? 네가 지면 어찌할 거야?”
“소인이 지면 아가씨께 은화 오십 냥을 드리는 건 어떻사옵니까?”
“좋다.”
내기에 맛이 들린 엽이채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아래에 있는 엽연채와 엽영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러더니 면사포를 둘러쓰고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내려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