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자신의 모습에 더욱 만족감을 느낀 주묘서는 거울을 내려놓고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아주 예쁜데요!”
엽연채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엽연채가 집에만 박혀 지냈던 것은 온씨가 자신의 딸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외모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 외출을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엽연채가 여덟 살이던 해에 일어난 사건과도 관련이 있었다.
당시 어머니의 친척 여동생 중 하나가 아주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 여동생은 한 국공國公의 눈에 들게 됐고, 그는 그녀를 자기 첩실로 삼겠다고 기를 썼다. 여동생은 방계 출신이었기에 그녀의 부모는 국공이 자신들 딸을 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옳다구나 하고 그녀를 시집보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녀는 국공부의 후원에서 숨을 거뒀다.
그 사건은 온씨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녀의 딸도 대단히 곱게 생겼으니 그저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도성의 권력가가 국공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위로는 황자와 황손들도 있으니, 인품이 형편없는 자에게 억지로 끌려가 부인이나 첩실이 되면 고생길이 열릴 터였다.
또 엽학문이 손녀를 이용해 자신의 앞날을 도모하려고 할까 봐 걱정도 되었다. 어찌 보면 제 속을 제가 끓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맹씨가 사돈을 맺자는 말을 꺼내니 온씨는 단박에 혼사를 수락한 후에 딸이 외출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엽연채는 규수들의 모임에 한 번도 참석한 적이 없고, 적성대에 간 적도 없으며,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래서 정안후부에 이렇게 아리따운 규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이렇게 엽연채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을 아예 만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한집안 자매들, 친척 여동생들, 잘 알고 지내는 벗들과는 만남을 가졌기 때문에 어떻게 치장을 해야 제격인지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주묘서의 치장은 아름답지만 저속해 보였다. 엽연채는 주묘서가 자신의 호의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자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지만 저렇게 내버려 두면 진씨가 또 그 책임을 자신에게 물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엽연채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재차 충고했다.
“큰아가씨, 지금 그 차림은 너무 과합니다.”
그 말을 들은 주묘서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자신이 보기에는 분명 예쁜데 이 새언니는 계속해서 자신을 비웃었다. ‘정말 별로인가?’ 하는 의심도 조금은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렇게나 예쁜걸! 새언니는 예쁜 게 뭔지도 모르면서!’
주묘서는 불같이 성을 냈다.
“새언니가 정안후부의 적장녀이기는 하지만 정안후부도 도성 귀족들 사이에선 중류층 정도밖에 안 되잖아요! 우리 주씨 가문이 지금은 몰락한 가문이 되어 버렸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대단한 가문이었거든요! 정안후부는 말할 것도 없고 왕부와 공주부에서도 우리 가문 사람들을 보면 예를 갖춰서 대했어요. 우리 가문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교양은 제대로 갖췄다고요!”
말문이 막힌 엽연채에게 주묘서는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게다가 새언니는 두문불출하던 사람인데, 그런 식견으로 무슨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는 거예요!”
엽연채는 할 말이 없어 잠시 후 이렇게 대꾸하고 말았다.
“아가씨 마음에 들었으면 됐죠, 뭐.”
‘저게 무슨 뜻이지?’
주묘서는 또다시 불쾌해졌다. 어쩐지 엽연채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새언니는 나랑 동갑이잖아요. 나보다 고작 몇 개월 빨리 태어났을 뿐이고요. 그런데 미천한 출신인 서자에게 시집왔죠. 그럼 이번 생은 고작 그렇게 살다가 가는 거죠, 뭐! 그 처지에서 더 나아질 가능성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자유로운 내게 무수한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배 아픈 거겠죠? 내가 적성대에 얼굴을 비치면 지체 높은 가문의 귀한 공자에게 시집을 갈 테니 배가 아플 수밖에요.”
그렇게 생각하며 주묘서는 조롱하는 눈빛으로 엽연채를 쓱 쳐다봤다. 엽연채는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또 척을 지게 될 줄이야.
그런데 이때 주묘화는 고개를 숙이더니 머리에 꽂고 있던 순금 화잠花簪을 슬며시 빼고 허리춤에 맨 홍실도 슬그머니 떼어냈다.
마차는 달달 소리를 내며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대략 일각 정도 지나자 마차가 드디어 멈추어 섰다. 주묘서가 발을 들고 밖을 내다보니 적성대가 눈앞에 보였다.
웅장한 7층 건물은 황금색 기와로 덮여 있었고, 붉은 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방형方形 지붕에는 층층마다 처마 서까래 끝에 비첨飛檐(처마 서까래 끝에 부연을 달아 기와집의 네 귀가 높이 들린 처마)을 달아 네 귀가 높이 들려 있었다. 금빛 지붕은 유약을 발라 유리처럼 반짝였고 대문 앞에는 ‘적성대’라고 적힌 커다란 도금 편액이 걸려 있었다.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적성대 대문 앞에 마차를 세운 마부가 문지기에게 쪽지를 건넸다. 잠시 후 문지기가 보낸 사람이 그들을 안으로 인도했다. 검은색 옷을 입은 여종이 초목이 무성한 정원으로 마차를 안내했는데, 안에는 이미 십여 대의 화려한 마차가 서 있었다. 시종들은 저마다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작은 걸상을 내려놓으랴 발을 걷어 올리랴 부산을 떨었다.
여러 가문의 여식들이 마차에서 내려 뒤쪽에 위치한 대당大堂을 향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어갔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비는 인파 속에서 소녀들은 다정하게 소곤거렸다. 그들의 갖가지 장신구와 화려하고 아름다운 비단 치마가 고운 빛깔을 뽐내며 부귀함을 드러냈다.
주묘서와 주묘화가 지금까지 자라면서 봤던 가장 부귀한 사람들은 민주에 있는 외가댁 진씨 가문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어디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겠는가! 둘은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리시죠.”
엽연채가 말했다. 고개를 돌리던 주묘서 자매는 순간 멈칫했다. 엽연채가 면사포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제는 풍토가 개방적인 나라였지만 일부 여인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면사포를 즐겨 썼다. 엽연채는 지난번 사찰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조심하는 게 좋겠다 싶어 면사포를 쓴 것이었다. 적성대는 도성에서 가장 격조 있는 장소 중 하나이니 양왕이 방문할지도 몰랐다. 그가 선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모두 마차에서 내리자 주묘서가 두리번대며 물었다.
“새언니, 어째서 여긴 여인들밖에 없는 거예요? 귀공자들도 많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공자님들은 다른 곳에 말을 세워 놓고 있거나 말에서 내려 쉬고 있겠죠.”
엽연채가 말했다.
엽연채 일행이 산수가 조각된 커다란 담벽을 돌자 등불이 번쩍번쩍 빛나는 대당이 보였다.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사면의 장지문이 활짝 열려 있어 실내에는 빛이 잘 들어왔다.
내부에는 널찍하고 호방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벽에는 산수의 드높은 기상이 담긴 서화가 걸려 있었고, 여덟 귀퉁이에는 사람 키만 한 백옥 자기가 놓여 있었다. 자기에는 철을 맞아 핀 커다란 복숭아꽃 가지가 꽂혀 있었는데, 가지는 곱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향긋한 꽃내음을 풍기고 있었다.
주변에는 꽃문양이 조각된 상과 의자들이 깔려 있었는데 형태가 각기 다름에도 이질감 없이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내부를 장식한 사람이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기물들을 배치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한가운데는 원형으로 비어 있었는데, 암화暗花 문양과 대나무 잎 문양으로 장식된 짙은 남색 모포가 약 일 장一丈(약 3m) 크기의 땅을 덮고 있었다.
모포 위에는 대나무 무늬가 새겨진 바둑판이 있고, 그 위로 놓인 두 개의 작은 잔 안에는 검은 돌과 흰 돌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양쪽으로 부들방석이 놓여 있었다. 이번 달 바둑 대결을 위해 특별히 꾸민 자리였다.
적성대는 매번 대결이 있을 때마다 장소를 다르게 꾸몄다. 웅장하고 화려한 분위기와 곳곳에서 드러나는 정교함에 엽연채도 자신의 안목이 한층 높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인당 입장료가 은화 열 냥일 만했다. 재력이 그만큼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리 호화스럽게 운영할 수 없을 것이었다.
엽연채 일행이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는 순간, 갑자기 근처에서 사랑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이게 누구야?”
고개를 돌린 엽연채가 웃으며 인사했다.
“고모.”
엽영교와 엽미채가 함께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영교는 흐릿한 매화 문양이 들어간, 바닥까지 내려오는 긴 흰색 치마를 입었고, 엽미채는 오밀조밀한 화훼 무늬가 들어간 담홍색 긴 배자를 입었다. 한 명은 아름답고 사랑스러웠으며, 다른 한 명은 청초하고 참해 보였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은 사람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주묘서는 두 사람의 치장을 보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주묘서는 다른 여인들이 어떻게 치장했건 간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그저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얼마나 실망스러울지만 염려했다.
엽영교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너 전에는 적성대에 오지 않았잖아? 오늘은 딴사람이라도 된 거야?”
엽연채도 맑게 웃으며 대꾸했다.
“저도 좀 견문을 넓혀야 하니까요.”
엽영교는 주씨 가문 아가씨들을 흘끗 쳐다보더니 ‘음’ 소리를 내며 물었다.
“이 두 분은 누구셔?”
“제 손아래 시누이들이에요.”
엽영교는 주묘서의 과하게 화려한 차림새를 보며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자리에 앉았다.
엽영교가 엽연채를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휴, 연채야, 엽이채도 왔어.”
“그래요?”
엽연채는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이렇게 말했다.
“감히 외출을 다 하네요.”
“누가 아니래.”
엽영교는 위층의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돈도 많이 써서 위층에 있는 별실에 앉아 있더라고.”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혀를 끌끌 찼다.
“둘째 숙모가 집안일을 맡아 처리하니 다르긴 다르네요.”
엽영교는 ‘흠’ 하고 콧숨을 내쉬었다.
“어, 저기 묘 공자님 아냐!”
그때 주묘서가 갑자기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고개를 들자 검은 머리칼에 흰옷을 입고 있는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 계단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엽영교의 사촌 오라버니이자 정혼자인 묘기화였다.
묘기화는 그림 같이 수려한 외모에 선인 같은 풍격을 지녔으나, 태도가 오만했다. 또한 마치 속세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이 세상사에 무관심한 듯한 냉담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선을 빼다 박은 이 묘 공자는 전생에 계단에서 미끄러져 실족사했다.
“아! 묘 공자가 넘어졌다!”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그 소리를 들은 엽연채는 입가를 씰룩거렸다. 묘기화가 넘어졌던 건 사고가 아니라 나쁜 버릇 때문이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