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나리, 시간이 늦었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죠!”
엽승신 뒤에 있던 사동이 말했다.
“잠깐 기다려 보거라. 내 가서 저 두 사람의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겠다!”
엽승신은 매화주를 사동의 손에 떠넘긴 후 급한 걸음으로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문밖을 나서니 대로는 인파로 북적거려 왁자지껄했고 주변은 온통 사람들과 행상인, 마차로 가득했다. 엽승신은 후회가 밀려왔다. 방금 전 어째서 망설였단 말인가? 어째서 바로 그들의 뒤를 쫓지 않았단 말인가. 그런데 이때, 저쪽 골목에서 노란 옷을 입은 사내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엽승신은 기쁜 마음에 재빨리 사람들을 밀쳐 내며 그 뒤를 황급히 쫓아갔다. 그는 골목 반대편으로 걸어 들어가 사거리 교차점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다른 사람들은 없었고 방금 전에 본 그 두 사내만이 골목 한쪽에 서 있었다.
노란 옷의 사내가 말했다.
“형님, 이번에 남쪽으로 내려가 장사를 했다가 오만 냥이나 잃었단 말입니다. 불행히도 물건 역시 전부 물에 빠뜨렸고요. 빚이 산더미예요! 형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저희 육씨 가문은 끝장입니다!”
간사동이 말했다.
“알겠다. 대신 이번만이야!”
그러자 노란 옷의 사내는 감격한 얼굴로 얼른 읍했다.
“그럼 채권자에게 말미를 더 달라고 어떻게든 부탁해 볼게요. 앞으로 몇 달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그러자 간사동이 말했다.
“몇 달은 무슨. 3일 후 적성대에서 농가(農家) 소녀에게 걸어라. 한 판에 다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예, 예?”
노란 옷의 사내는 깜짝 놀라 말했다.
“하지만… 상대는 재녀(才女)인 유곡요입니다. 농가 소녀가 어떻게 이깁니까? 형님, 설마 절 놀리시는 겁니까?”
간사동은 냉소를 흘렸다.
“믿거나 말거나 네 마음대로 하거라! 내가 널 놀려서 얻는 게 뭐가 있냐? 설령 내가 널 돕고 싶은 마음이 없더라도 네가 큰 손해를 보도록 두고 볼 수는 없지! 우리는 직계 친족인 사촌 형제다. 내가 너랑 육씨 가문에 해를 입혀서 무슨 덕을 보겠느냐? 너에게 해를 입혔다간 어머니께 흠씬 두들겨 맞을 것이다. 너나 나나 좋은 꼴은 못 볼 테지.”
간사동은 말을 마치곤 돌아서서 자리를 떴고 노란 옷의 사내는 연신 미안하다는 소리를 하며 얼른 그 뒤를 쫓아갔다.
형제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엽승신의 표정은 고민과 망설임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잠시 후 자신을 찾아온 사동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 * *
그 시각 정안후부.
손씨는 방에서 탁탁 주판알을 튕기며 혼례식 지출 비용과 축의금 등의 수입을 계산하고 있었다. 계산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미간은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딸이 떵떵거리며 시집갈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영 마음에 걸렸다.
엽승신은 탁자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은화 오백 냥만 주시오!”
주판알을 튕기던 손씨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오늘 아침에 혼사를 위해 술을 예약하시라고 오백 냥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왜 또 필요하시단 거예요? 공주貢酒(공물로 진상하던 귀한 술)로 예약하신 거 맞죠?”
엽승신은 잠시간 고민하다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게 아니라 따로 쓸데가 있어서 그렇소.”
“무슨 일인데 오백 냥이나 필요하시단 겁니까?”
손씨의 낯빛이 당장에 어두워졌다.
“지금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할 때예요! 한 푼이라도 더 생기면 이채의 혼수에 무조건 보태야지요. 무슨 일이기에 이채의 혼수보다 더 중요하단 말입니까? 나리께서도 아시겠지만 장씨 가문이 혼사에 응했다고는 해도, 맹씨가 이채를 얼마나 업신여깁니까. 이채가 혼수라도 많이 가져가야 중요하게 생각하겠지요. 이채가 장씨 가문에서 자리를 잡아야 저희에게도 좋다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고요.”
“에이, 거참! 내 말 좀 끝까지 들어 보시오!”
엽승신은 짜증 섞인 호통을 치며 사정을 설명했다.
“다 이채의 혼수에 보태려고 그런 거 아니겠소?”
“말이 참 이상하네요. 이채의 혼수에서 꺼내는 건데 도리어 보태다니요?”
“아이고 참. 내 말이 끝나거든 그때 다시 이야기하시오.”
엽승신은 차를 따른 후 입을 열었다.
“내 오늘 술집에 가서 술을 예약하다가 어떤 사람을 보았소.”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간사동이라는 사람이오!”
“간사동이요? 어디서 들어 본 것 같네요.”
손씨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엽승신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그 간사동이라는 사람은 내기만 했다 하면 이긴다고 하더군!”
“내기만 했다 하면 이긴다고요?”
그 말을 들은 손씨는 깜짝 놀라더니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사람의 소문… 저도 들어 봤던 것 같아요!”
간사동에겐 별명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기만 했다 하면 이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적성국摘星局에서나 내기를 했지, 노름판에서 주사위를 던져 큰 수를 맞추는 내기는 하지 않았다.
적성대는 도성의 규수들과 귀공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매월 초 적성대에서는 재예才藝 모임이 열렸고 사람들은 함께 모여 시끌벅적하게 학문을 토론하거나 대결을 벌였다. 그리고 모든 대결은 사전에 쌍방 중 한 사람이 신청하고 다른 한쪽이 이를 수락해야 이루어졌다.
적성대는 품위 있는 장소인지라 돈 냄새로 오염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결에 판돈을 걸지 못하게 했다.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일지라도 품격 있는 상품을 거는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적성대는 대제에서 이름난 명소인지라 많은 백성들이 이 품격 높은 장소를 선망해 이곳에 와서 구경하며 즐기고 싶어 했고, 교활한 사람들은 이 돈벌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암암리에 노름판을 만들었다. 노름판은 적성대에서 대결이 있을 때마다 벌어졌는데 이 노름판을 바로 ‘적성국’이라고 불렀다.
적성대의 풍아한 분위기를 선망하는 백성들은 적성대라는 세 글자가 붙으면 판돈도 품위 있게 변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장내는 적성국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간사동은 실력자인지라 거는 족족 다 적중해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그러자 돈을 따고 싶은 사람들은 그를 따라 판돈을 걸기 시작했고, 그는 점차 판돈을 걸지 않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판돈을 진짜로 걸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를 따라 판돈을 걸어서 배당률에 영향을 주는 것을 방지하려고 암암리에 다른 사람에게 대신 걸어 달라 부탁한다고 의심했다. 또 어떤 사람은 그가 조상 덕에 내기만 했다 하면 다 이기는데 만약 그 복을 다 써 버리면 단명할 수도 있어 더 이상 노름을 하지 않는 거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내가 오늘 그 간사동이 사촌 동생과 하는 이야기를 들었소. 월초에 적성대에서 또 대결이 벌어진다고 하더군. 농가 소녀가 무슨 최고의 재녀에게 도전한다는 것 같던데, 간사동이 제 사촌 동생더러 농가 소녀에게 걸라고 했다오. 반드시 이긴다면서!”
손씨는 엽승신의 말에 마음이 동했지만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이제 판돈을 걸지 않는다면서요? 사촌 동생을 놀리는 건 아니겠죠?”
“어떻게 놀릴 수가 있겠소! 들었더니 그 사촌 동생이라는 작자가 남쪽으로 내려가 장사를 하다가 크게 손해를 봤다고 하더군. 메꿔 놓지 않으면 집안이 폭삭 망하게 된다니 설령 도와주지는 않아도 절대 장난을 치지는 못할 것이오.”
여전히 손씨가 망설이자 엽승신은 다른 식으로 그녀를 설득했다.
“나도 걱정이 아예 안 되는 건 아니오. 만약 그 사람이 신통치 않으면 어찌 되겠소? 그래서 오백 냥만 걸려는 거요. 배당률이 5 대 5일지라도 오백 냥은 버니 말이오.”
손씨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나리께서 본 사람이 정말 간사동 본인이 맞습니까? 그리고 대결을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뭘 대결한다는 겁니까?”
그러자 엽승신은 멍한 얼굴을 했다.
“나도 사실 오늘 처음 본 사람이오. 오늘 들은 거라곤 그 사람 이름뿐이고……. 뭘 대결하는지도 아직 잘 모르오. 이따가 가서 살펴보며 정보를 얻어 오겠소.”
엽승신은 잠시 쉬다가 밖으로 다시 나갔다. 그는 사동에게 적성대에 관해 알아보라고 한 뒤, 자신은 직접 간사동의 집으로 달려가 그 집 문 앞에서 한참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렇게 반 시진쯤 기다렸으나 간사동의 모습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엽승신이 실망하여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간사동과 노란 옷의 사내가 앞뒤로 서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엽승신은 속으로 환호했다. 이미 간사동 본인이 틀림없다는 건 확인이 됐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그는 그 집 대문을 지키는 사동에게 은화 두 냥을 주어 신분을 제대로 확인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와 함께 외출했던 사동은 이미 귀가하여 손씨에게 적성대에 관해 보고하고 있었다.
“알아보니 이번 달 초 적성대에서 벌어지는 대결은 바둑 대결이라고 합니다. 대결을 신청한 사람은 어느 골짜기에서 튀어나온 농가 소녀이고, 대결에 응한 사람은 유 재상宰相의 적출 장손녀인 유곡요라고요. 유 소저는 대제 제일의 재녀라고 명성이 자자한데, 여승 정도의 수제자라고 합니다. 바둑 실력이 출중해서 도성 여인들 중 바둑 실력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다네요.”
그 말을 들은 손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간사동이라는 사람은 농가 소녀에게 걸라고 했는데, 정말 이길 수 있는 걸까?
그런데 마침 엽승신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이자 손씨가 물었다.
“잘 알아보셨나요?”
엽승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 옆에 앉았다.
“본인이 틀림없소. 회양후淮陽侯의 적출인 여섯째 공자라오. 회양후의 사촌 형은 도성에서 손꼽히는 거상인 육씨 가문 사람이고, 이종사촌이라 하더군. 육씨 가문은 십 년 넘게 잘나가다가 요 몇 해 사이 주춤거리고 있소.”
“간사동 본인이 맞고, 또 그 사람이 내기만 했다 하면 이긴다고는 하지만…….”
손씨가 마음을 놓지 못하고 계속 머뭇거리자 사동이 얼른 끼어들었다.
“제가 적성대에 관해 또 알아본 것이 있습니다. 듣기로는 그 농가 소녀가 보름 전에 정월암靜月庵에 갔다가 정도 여승과 겨루었는데, 결과는 정도 여승의 참패였다고 합니다.”
“뭐라?”
그 말을 들은 손씨와 엽승신은 깜짝 놀랐다. 엽승신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기 시작했다.
“정도 여승은 유곡요의 스승이 아니더냐!”
“현재 배당률이 얼마냐?”
손씨가 묻자 사동이 대답했다.
“그런 소문이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농가 소녀가 과장해서 말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유 소저의 배당률은 사실상 1 대 1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이고, 농가 소녀의 배당률은 1 대 9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