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40화 (40/858)

제40화

“제대로 활용한다?”

진씨는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러자 백 이낭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큰아가씨께서 올해 열넷이 되었습니다. 부인이 지난 이삼 년가량 혼처를 물색해 보셨으나 아직 좋은 혼처를 구하지 못하셨죠. 정안후부가 별 도움이 안 된다 해도 알고 지내는 사람은 저희보다 많을 겁니다. 방금 전 적성대 일만 봐도 셋째 부인께서 아가씨들을 데리고 나가시는 거 아닙니까?”

그 말에 진씨는 저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요즘 딸의 혼사 문제로 속을 썩고 있었다. 혼처를 구하는 데 어찌나 열을 올렸는지 도성 안의 거의 모든 매파가 자신을 다 알고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진씨 마음에 차는 사람은 그녀의 여식이 마음에 차지 않아 했고, 여식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집안이 가난하거나 용모가 추해 진씨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 이낭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진씨는 그제야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내일 제가 셋째 부인을 불러오겠습니다. 집안 식구들에게 정식으로 인사시키는 거죠.”

백 이낭이 말에 진씨는 작게 콧방귀를 뀌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한편, 일상원을 나서던 엽연채가 추길에게 말했다.

“가서 경인이를 불러오너라. 그 아이에게 시킬 일이 있다.”

“아가씨, 무슨 일을 시키시려고요?”

추길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엽이채와 손씨를 가만두지 않으려고 한다.”

엽연채는 냉소를 지어 보였다. 이 말에 추길과 혜연은 두 눈을 반짝였다. 둘 역시 분수를 모르고 날뛰는 엽이채 식구들을 오랫동안 참아 왔다. 드디어 엽연채가 반격과 복수에 나선다고 하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경인이 오자 엽연채는 해야 할 일을 소상히 설명해 준 후 침상에 기대어 책을 보기 시작했다.

“아가씨, 마님께서 보낸 여종이 왔습니다.”

추길이 말했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보니 녹엽이 걸어오고 있었다. 녹엽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마님께서 말씀하시길 사찰에서 백 이낭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백부 나리께서는 일이 있으셔서 출타 중이시니, 우선 안식구들과 안면을 트자고 하셨습니다. 내일 마님 거처로 오셔서 인사를 나누시지요.”

“알겠다.”

녹지가 떠나자 추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심스러워했다.

“일상원 쪽에서 또 뭔가 모략을 꾸미는 걸지도 몰라요.”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선물을 준비해 일상원으로 향했다.

집안 안식구들은 백 이낭만 빼고 이미 거의 다 만나 본 참이었다. 백 이낭은 아주 온화하고 얌전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외출 금지를 당해 참석하지 못한 비 이낭을 빼고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 첫인사 선물을 나누었다. 뒤늦게나마 예의를 차린 셈이었다.

* * *

성의 서쪽은 도성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라 이곳에는 그야말로 별의별 사람이 다 살았다.

한산한 골목길을 볼품없어 보일 정도로 단출한 작은 마차 한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 안에는 이십 대로 보이는 잘생긴 사내가 타고 있었는데, 검붉은색 비단옷을 입고 금관金冠으로 머리를 정돈한 것이 딱 봐도 명문가의 공자임을 알 수 있었다. 초라한 마차와는 확연한 이질감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서는 이곳을 꺼려하는 기색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더없이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손에 든 쥘부채로 엄지와 검지 사이를 톡톡 치며 기분 좋게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때, 마차가 갑자기 격하게 흔들리더니 그 자리에 확 멈춰 섰다. 미간을 찌푸리던 사내는 밖에서 마부가 호통을 치는 소리를 들었다.

“야, 이놈아!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사내가 하얀 손에 쥐고 있던 쥘부채로 발을 살짝 걷어 올리자 열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멀끔한 소년이 마차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어르신, 길 좀 여쭙겠습니다!”

소년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오정五丁 골목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마차 안에 있던 사내는 오정 골목이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고, 마부 또한 잔뜩 경계하면서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모른다!”

“정말 모르세요?”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오정 골목에 있는 그 집 나무에 붉은 천이 걸려 있던데, 간 공자께서 모르실 수가 있나요?”

간 공자의 안색이 확 변하더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저 소년이 내 성이 간씨인 것을 알고 있는 거지?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오정 골목에 붉은 천을 걸어놓은 일을 저 소년이 알고 있다는 거야. 설마 비밀이 발각된 걸까? 누가 본 걸까? 부모님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누, 누가 너를 보낸 것이냐?”

제 발 저린 마부가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걱정 마세요. 저는 간씨 가문 마나님이나 그 집 식구가 부리는 하인이 아니니까요. 저는 그저 우연히 그 일을 목격했을 뿐입니다.”

소년은 여전히 싱글거렸다.

놀라고 두려운 간 공자의 눈이 순간 매섭게 빛났다. 눈앞의 소년을 죽여 입을 막고 싶었지만, 소년의 옷차림을 보아하니 명문가의 사동인 것 같았다. 사내는 더욱 두려움을 느끼며 안색이 변했다. 입을 막을 수 없었다. 여기서 죽인다 한들 소년의 주인이 알게 될 게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말이 새 나갔다는 일을 그르치게 된다.

간 공자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내… 너에게 돈을 주마!”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그럼 뭘 원하느냐?”

간 공자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간 공자님께서 일 하나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소년이 앞으로 다가서더니 서신 한 통을 건넸다. 간 공자가 굳은 얼굴로 서신을 받아보니 서신 위에는 옅은 해당화 문양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었다. 서한을 읽던 간 공자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리 간단하다고?”

“예.”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걱정 마십시오, 공자님. 저희 주인님은 말썽이 일어나는 것을 꺼려하는 분이십니다. 주인님께선 진작에 이 일을 알고 계셨지만 여태 입도 뻥끗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자님의 도움이 꼭 필요하시지 않았다면 이리 저를 공자님께 보내시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간 공자가 얼른 답했다.

“알겠다! 이 일은 내게 맡겨 두어라. 너는 돌아가서 네 상전에게… 절대로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고 전하거라. 조금이라도 새어 나가선 안 된다고 말이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장담했다.

“물론이죠.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소년은 돌아서서 홱 가 버렸다. 이 소년은 다름 아닌 엽연채의 심부름을 하는 사동 경인이었다. 일을 마친 경인은 곧장 성 북쪽에 있는 정국백부로 돌아갔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던 추길은 경인이 궁명헌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보곤 곧장 달려가 그를 맞이하며 말했다.

“경인아, 돌아왔구나! 어서 들어가자! 아가씨께서 한참 동안 기다리고 계셨어!”

둘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뜰을 지났다. 화본을 보고 있던 엽연채는 밖에서 재잘재잘 떠드는 추길의 목소리가 들리자 경인이 돌아왔음을 알아차리곤 기지개를 켜며 소청으로 걸어갔다.

“아가씨.”

경인이 안으로 들어서며 인사했다.

“잘 처리했느냐?”

엽연채는 경인에게 차를 따라 주며 물었다.

“잘 처리했습니다. 그런데…….”

경인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분의 무슨 약점을 잡으신 건가요?”

그러자 엽연채가 웃으며 말했다.

“내 말을 전하지 않았더냐? 전했으면 난 이제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조금이라도 누설해서는 안 되지.”

경인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으나 추길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르게 물었다.

“그럼 아가씨, 대체 서신에는 뭐라고 적으신 겁니까? 간 공자님께 무슨 일을 도와 달라고 부탁하신 거예요? 둘째 마님을 어떻게 상대하시려고요?”

“그건 말해 줄 수 있지. 이리 와 보거라.”

엽연채가 붉은 입술을 씩 올리며 말했다. 세 사람은 엽연채 곁으로 다가섰고 그녀는 조그만 목소리로 자신의 계획을 들려주었다. 귀를 기울이던 셋은 모두 눈을 번뜩였다.

엽연채가 말을 끝내자 추길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정말 대단하세요! 그때가 되면 저희도 적성대에 가서 구경해야겠어요!”

“그래, 그렇게 해 주마.”

엽연채가 말했다.

“그런데… 둘째 마님 댁이 정말 걸려들까요?”

매사에 신중한 혜연은 조금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그러자 엽연채의 아름다운 눈동자가 살짝 번득였다.

“눈앞에 던져진 돈을 안 줍겠니?”

“안 주울 리가 없죠!”

추길이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안 걸려들어도 저희는 손해 볼 게 없죠! 다만 그 사람들이 굴러들어온 떡을 주워 먹게 될까 봐 그게 좀 걸리는 것뿐이에요.”

마지막 말을 하며 추길은 입을 삐죽거렸다.

* * *

시간은 천천히 앞을 향해 흘러갔다. 오늘은 삼월 스무이레, 즉 엽이채의 혼사가 보름이 남은 날이었다.

손씨는 혼사 준비 마무리에 열을 올리고 있었고, 엽승신도 혼례식 당일에 쓸 좋은 술을 예약하고자 주루를 찾았다. 예약을 마친 그는 주루 주인이 선물한 매화주 한 병을 들고서 계단을 내려왔다.

왁자지껄한 대당大堂(홀)을 지나는데 갑자기 술잔이 ‘쨍그랑’ 하고 그의 발 옆에 떨어지며 깨졌다. 깜짝 놀란 엽승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사람들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으려 고개를 들었다.

사내 둘이 팔선상八仙床(여덟 사람이 둘러앉을 만한 크기의 상)에 앉아 있었는데 딱 봐도 돈 꽤나 있는 부자 아니면 고관, 아무튼 귀인임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내는 잔이 바닥에 떨어진 것을 아직 모르는 눈치였다.

노란 옷을 입은 사내가 작은 목소리로 애원하며 말했다.

“형님, 저 좀 도와주세요! 그렇게 많은 은화는 형님만이 뚝딱 만들어 내실 수 있잖아요.”

그러자 간 공자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누가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이냐?”

“이 도성에 간사동 형님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어쨌든 형님도 거저 얻은 은화잖습니까. 그리고 형님은 지지도 않으시니…….”

말을 하던 사내는 갑자기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곧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엽승신을 발견하고는 안색이 싹 변하더니 간사동을 끌어당기며 낮게 속삭였다.

“형님,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하시죠.”

그러더니 상 위로 작은 은립銀粒(아주 작은 은 조각)을 집어 던졌다.

“난 안 나간다니까! 에이… 너도 참!”

노란 옷의 사내가 자꾸 그를 잡아당기자 간 공자는 어쩔 수 없이 비틀거리며 문밖을 나섰다. 술집 안은 여전히 떠들썩했다. 손님들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술집 심부름꾼은 술상 사이를 바삐 움직였다.

속으로 깜짝 놀란 엽승신은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은화를 거저 얻는다? 게다가 방금 전 노란 옷을 입은 사내가 상대를 분명 간사동이라고 불렀다. 간사동이란 이름은 그도 들은 바가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