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화
이때 여양이 달려오더니 주운환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벌을 다 받으신 후에는 이곳에 와서 물건을 가져간 비 이낭의 뺨을 두 대나 후려갈기셨다고 합니다. 비 이낭은 그길로 일상원에 달려가 마님께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했고요!”
그 말을 듣고 주운환은 또다시 입을 삐죽거렸다. 그때 엽연채가 고개를 들었다.
“여양아, 무슨 말을 했느냐? 내 흉이라도 본 것이냐?”
그러자 여양은 저 사람에게는 도무지 못 당해 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공자, 제가 또 말썽을 일으켰다고 절 나무라시려고요?”
“아닙니다.”
주운환이 말했다.
“소저께서 이곳에 온 순간부터 이런 일들이 생기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벌인 일은 제 스스로 해결하겠다고요. 그러니 공자께서는 공자의 일이나 신경 쓰시면 됩니다.”
그러더니 엽연채는 화본을 내려놓고는 밖을 향해 외쳤다.
“혜연아, 상을 차리거라.”
혜연과 추길은 얼른 찬합을 들고 안으로 들어오더니 준비한 음식을 하나하나 상 위에 내려놓았다. 주운환이 밖에 있는 상을 쳐다보니 그 위에는 평소 먹는 찬 외에도 그녀가 따로 준비한 찬이 두 가지나 더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그가 무척 좋아하는 것이었다.
주운환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때문에 이리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엽연채가 말했다.
“제 목숨을 구해 주셨는데 이런 찬들이 뭐 대수라고요. 다만 식사하러 오시지 않을 때는 미리 알려 주세요.”
어젯밤 그들은 말다툼하며 더 이상 부부 관계로 지내지 않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주운환은 그 시점부터 엽연채와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처럼, 서로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침이 밝자마자 그는 수업을 들으러 갔고, 수업을 마친 후에는 바로 외출을 했다. 점심밥도 먹으러 오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듣게 되어 묘한 기분이 들었다.
* * *
이튿날 아침, 단장을 마친 엽연채는 혜연, 추길과 함께 일상원으로 향했다. 며느리로서 시어머니께 조석으로 문안을 드리려는 것이었다. 어제 일을 통해 해야 할 도리는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안 그러면 나중에 또 약점을 잡힐지도 몰랐다.
일상원으로 들어서자 어린 여종이 엽연채를 보고는 깜짝 놀라 말했다.
“셋째 마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러고는 돌아서서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진씨에게 엽연채가 왔음을 알렸다. 진씨는 엽연채가 또 왔다는 소리를 듣고는 얼굴이 새파래졌다. 어제 자신이 엽연채를 제대로 밟아 주기는커녕 오히려 비 이낭을 이용해 엽연채가 위세를 부렸던 것을 떠올리며 그녀는 분노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또 와서 뭘 하겠다는 거지? 위세라도 떨겠다는 건가?’
진씨는 엽연채가 죽도록 미웠지만 보지 않겠다고 하면 도리어 약해 보일까 봐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라고 하거라.”
여종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엽연채가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서차간으로 들어서던 엽연채는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순간 어리둥절했다. 안에는 진씨와 강심설 외에도 열 네다섯쯤 되어 보이는 소녀 둘이 있었는데, 한 명은 서 있고 다른 한 명은 앉아 있었다.
수돈 위에 앉아 있는 소녀는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생겼다. 그 소녀는 순금으로 장식한 주화珠花(진주 등으로 장식한 꽃 모양 머리 장신구)를 머리 위에 꽂고 있었고, 붉은 물결무늬와 촘촘히 짜인 자귀나무 꽃문양이 들어간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생김새는 전체적으로 진씨와 닮아 있었다.
서 있는 소녀도 용모가 수려했는데, 앉아 있는 소녀에는 못 미쳤다. 이 소녀는 흰 바탕에 분홍색 깃이 달린 대금對襟(두 섶이 겹치지 않고 가운데 단추로 채우게 되어 있는 웃옷)과 꽃문양이 들어간 배자를 입고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단정하고 예의 바른 모습으로 서 있었다.
엽연채는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이 갔다. 이 두 소녀는 정국백부의 소저들이며, 앉아 있는 소녀는 분명 적장녀인 주묘서이고 서 있는 소녀는 서녀이자 차녀인 주묘화일 것이다.
엽연채는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어머님, 형님, 그리고 두 분 아가씨들.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새언니, 얼른 앉아요!”
주묘서가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말했다. 주묘서의 행동에 말문이 막힌 진씨는 슬며시 그녀를 꼬집었다. 진씨는 엽연채를 세워놓고 이야기를 함으로써 그녀의 기세를 제대로 꺾어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딸이 갑자기 팔이 바깥으로 굽는 행동을 한 것이었다. 앉으라니?
강심설의 안색도 변했다. 그녀는 속으로 주묘서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이 어린 아가씨는 교활한 사람이었다. 평소 셋째 도련님, 즉 서자인 오라비를 업신여기더니 오늘은 어째서 그 부인에게 이리 살갑게 구는 것일까?
“그럼 앉겠습니다, 어머님.”
엽연채는 미소를 짓더니 강심설 바로 옆에 권의에 앉았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주묘서가 말했다.
“며칠 전에 새언니께서 법화사에 갔다고 들었는데 재미있게 노셨나요?”
“사찰에선 불경을 듣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놀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요?”
엽연채의 대답에 주묘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새언니, 그럼 우리 이따가 거리로 구경 가요!”
진씨는 화가 나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주묘서를 꼬집으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새언니는 며칠 전에 친정도 가고 사찰에 예불도 올리러 가서 아주 피곤하단다. 거리 구경을 가고 싶으면 묘화랑 같이 갔다 오너라. 묘화가 안 되면 네 큰 새언니와 함께 갔다 오든가.”
주묘서는 ‘에휴’ 하고 한숨을 쉬더니 도끼눈을 뜨고 진씨를 흘겨봤다. 엽연채는 남몰래 실랑이를 벌이는 두 모녀가 참으로 우스웠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묘화 아가씨는 어디 가고픈 곳이 있으세요?”
“적성대摘星臺요!”
줄곧 바닥을 보고 있던 주묘화가 입을 열더니 고개를 들고서는 두 눈을 반짝였다. 주묘서도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두 눈을 반짝이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적성대?’
진씨와 강심설은 어리둥절했다. 적성대는 도성의 규수들과 귀공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일반 백성들도 드나들 수 있는 장소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장료로 은화 열 냥을 내야만 했다.
규수들 용돈이야 은화 한두 냥 정도라지만 가족들은 딸이 적성대에 가고 싶다고 하면 열 냥을 흔쾌히 내주었다. 귀족들에게 이 정도 입장료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평범한 백성들에게는 몇 년 동안의 생활비였다. 그러니 적성대는 자연히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만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매월 초면 적성대에서는 재예才藝 모임이 한차례 열렸다. 사람들은 한자리에 모여 학문에 대해 토론하거나 대결을 벌였는데, 아주 시끌벅적했다.
주묘서와 주묘화도 적성대에 가고 싶었지만, 곤궁한 집안 형편 때문에 주묘서는 한가하게 구경이나 하려고 은화 열 냥을 쓸 바에야 차라리 의복이나 장신구를 더 사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차일피일 미루다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것이다.
엽연채는 적성대라는 세 글자를 듣고 웃음이 나왔다. 마침 그녀도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던 참이었다. 엽연채가 말했다.
“지금은 적성대에 가도 볼거리가 없으니 월초에 함께 가요. 가서 우리도 실컷 구경해요.”
주묘서와 주묘화는 그 말을 듣곤 뛸 듯이 기뻐하며 얼른 좋다고 대답했다. 엽연채는 그렇게 잠깐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내 자기 거처로 돌아갔다.
주묘서가 진씨에게 팔짱을 끼며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보세요. 곧 적성대에 가게 생겼어요.”
그러나 진씨는 눈살을 찌푸리며 싫은 소리를 했다.
“네가 그곳에 가고 싶다고 하면 내 너에게 은화 열 냥을 줄 것이다. 굳이 저 아이에게 부탁할 것이 뭐가 있느냐!”
그러자 주묘서가 말했다.
“은화 열 냥이면… 장신구를 더 살 수 있는데요.”
그 말을 들은 진씨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는 딸의 좀스러운 면이 한두 번 눈에 거슬렸던 게 아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주씨 가문이 가장 번성했을 때 주묘서는 겨우 네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었다.
그때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을 테니 명문대가 규수로서의 기품을 가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주씨 가문이 몰락하고 집안 형편이 기울자 일가는 절약할 수 있는 건 모두 절약하게 됐고, 주묘서는 자연스레 인색하고 이득을 챙기는 나쁜 습성이 생겼다.
“하하, 전 이만 가 볼게요!”
주묘서는 신이 나 자리에서 일어섰다. 적성대에 입고 갈 옷을 준비해야 했다.
“묘화야, 가자.”
주묘서는 고개를 돌려 주묘화를 쳐다봤다. 그러자 주묘화는 얼른 일어나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진씨는 주묘서가 신이 나 폴짝폴짝 뛰어가는 모습을 보며 울화통이 터졌다.
“어휴, 저놈의 계집애!”
이때 주렴이 차르륵 걷어 올려지더니 삼십 대로 보이는 곱고 얌전하게 생긴 부인이 안으로 들어와 진씨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마님, 문안 인사 드립니다.”
진씨가 그녀를 흘끗 쳐다보며 말했다.
“백 이낭, 앉으시게.”
이 부인은 바로 어젯밤에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던 백 이낭이었다. 백 이낭은 옆에 놓인 권의에 앉으며 말했다.
“어젯밤 정국백부에 도착하자마자 마님께 인사를 드리려 했는데 마님께서 피곤하다고 하셔서 이제야 찾아뵙습니다.”
진씨는 살짝 코웃음을 치더니 손에 든 찻잔 뚜껑으로 찻잎을 살살 걸러내었다.
백 이낭이 말을 이었다.
“방금 들어오다가 보니 큰아가씨와 둘째 아가씨께서 웃으면서 지나가시던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가 봅니다?”
“방금 전에 셋째 마님이 오셨었는데 월초에 두 아가씨를 모시고 적성대에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녹지가 대신 답하자 백 이낭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부인이요? 아, 그분이시군요! 어제 돌아와서 셋째 도련님이 아내를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마지막 말에는 걱정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엽연채의 이야기가 나오자 진씨는 이를 갈며 말했다.
“그 아이 이야기는 더는 꺼내지 마시게. 가서 식사나 하세!”
그러자 백 이낭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님께서 제게 화를 내실 수도 있겠지만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됐으니 셋째 부인께 심술을 부리셔 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진씨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걸 누가 모르나!’
백 이낭이 이어서 말했다.
“집안에 그런 사람이 들어왔으니 제대로 활용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