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녹지는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을 냈다.
“그래도… 사람을 때리면 안 되죠!”
그러자 엽연채가 말했다.
“어째서? 난 셋째 마님이고 이 집안의 어엿한 상전임에도 행동에 미흡한 부분이 있어서 사당에서 무릎을 꿇는 벌을 받았다.
비 이낭은 그저 노비 신분인 이낭에 불과하다. 그런데 내 방에 들어와 물건을 만지작거리더니 묻지도 않고 제멋대로 가져갔으니, 이게 도둑질이 아니면 무엇이더냐. 관아로 끌고 가 곤장을 쳐도 시원치 않을 일이다! 그런데 내가 저 사람의 뺨도 못 친다는 말이냐?”
“셋, 셋째 마님께서 벌을 내리고 싶으시면… 마님께 와서 그 사실을 알리면 됩니다. 그럼 마님께서 해결해 주셨을 겁니다.”
녹지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 그땐 나도 순간 화가 난 터라.”
엽연채는 진씨에게 몸을 살짝 수그리며 말했다.
“어머님, 그럼 어머님께서 해결해 주시지요!”
진씨는 화가 나 몸을 가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비 이낭을 돕는다는 핑계로 엽연채를 다시 한번 혼내 줄 생각이었다.
‘어쩌다가 엽연채를 위해 일을 해결해 줘야 하는 상황이 됐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비 이낭을 쏘아보았다.
‘쓸모없는 것!’
진씨는 절도죄로 비 이낭에게 중벌을 내리고 싶었다. 가장 좋은 벌은 정말로 관아에 넘겨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중벌을 내렸다가는 엽연채가 기고만장해질까 봐 가볍게 처벌하기로 했다.
진씨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비 이낭, 이건 자네 잘못일세! 저 아이가 손아랫사람이기는 하지만 말 한마디 없이 물건을 가져가서는 안 되지. 반년 동안의 생활비를 벌금으로 내고 『금강경』을 열 번 필사하게나.”
비 이낭은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반년 치 생활비를 이렇게 날려 먹다니, 자신은 엽연채의 상대가 못 됐다. 거기다 새된 목소리로 고함을 쳐 봤자 저쪽은 놀라지도 않았다. 생억지마저도 통하지가 않으니 그야말로 분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수치스러움과 노여움이 극에 달한 비 이낭이 벌떡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는데, 엽연채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이곳에 온 지 벌써 한 달이 되어 가는데 이제야 내 거처에 와서 물건을 가져간 것을 보니, 오늘 아침 어머님께 사당에서 무릎 꿇고 있으라는 벌을 받았다고 내가 만만하게 보였나 보죠?”
생각을 전부 읽힌 비 이낭의 안색과 표정은 실로 가관이었다. 엽연채는 이어서 말했다.
“내가 오늘 벌을 받은 이유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사당에서 무릎을 꿇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매를 맞으라 하셨어도 난 달게 받아들였을 겁니다! 어머님은 제 어머님이고 이는 어머님에 대한 존중이니까요. 하지만 난 어수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진씨와 강심설은 엽연채가 자신들의 악한 속마음을 규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들이 터무니없는 이유로 트집을 잡아 그녀를 괴롭혔다고 에둘러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이긴 해도 진씨는 그런 악명을 뒤집어쓸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입술을 바들바들 떨며 물었다.
“얘, 지금 그게 무슨 뜻이냐?”
“어머님,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무슨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엽연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큰 눈을 껌뻑거렸다. 그 모습에 진씨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체면 탓에 차마 숨겨진 진짜 뜻이 무엇인지 말해 보라고 닦달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 강심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께서 동서를 벌하신 것은 동서가 어머니께 효를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네. 어머님께서 동서에게 벌도 못 내린다는 말인가?”
엽연채가 강심설을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네요. 전 방금 전에 어머니께서 벌을 내리고 싶으신 대로 내리시면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형님은 어째서 벌도 못 내린다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강심설은 목구멍이 콱 막혀 뭐라 대꾸할 수 없었다. 아무리 들어봐도 자신들을 비꼬고 있는 것이었으나 도무지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엽연채는 다시 진씨를 향해 몸을 굽히곤 농담조로 말했다.
“어머님, 보세요. 형님께서 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하시네요. 어머님, 이 일로 또 저한테 벌을 주시면 아니 됩니다!”
‘또 벌을 준다.’라니! 그 말은 일전에 벌을 받은 것 역시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썼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니 엽연채가 농조로 가볍게 말하니 진지하게 따지고 들면 도리어 이쪽이 옹졸해 보일 것이었다.
진씨는 입꼬리를 올리고 억지로 웃음을 짜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난 규율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앞으로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누가 너를 벌하겠느냐! 됐으니 이만 돌아가 보거라!”
“예!”
엽연채는 시원시원히 대답하고서는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혜연과 추길은 그제야 한시름 놓고 엽연채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소연의 곁을 지나갈 때 추길이 표독스러운 얼굴로 다가서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병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뭘 안고 있는 게야? 어서 안 내놔!”
그러면서 병을 확 잡아채고는 일상원 밖으로 나갔다.
비 이낭은 분노가 치밀어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진씨는 새파랗게 질린 채로 발을 홱 걷고 방 안으로 들어가 침상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씨가 가슴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하는데, 또 다른 여종 녹엽이 머뭇거리며 앞으로 다가왔다.
“마님, 백 이낭이 돌아왔습니다……. 마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겠다고 하는데요.”
현재 정국백부에는 비 이낭과 백 이낭, 이렇게 두 명의 이낭만 남아 있었다. 백 이낭과 비 이낭은 함께 예불을 드리러 갔었는데 비 이낭은 하룻밤만 자고 바로 돌아왔지만 백 이낭은 사찰에 더 머물다가 오늘에서야 돌아온 것이었다.
백 이낭은 원래 진씨의 여종이었다. 주씨 가문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는 후원에 꽃 같은 여인들이 넘쳐 났었다. 진씨는 그요부들이 남편을 홀릴까 걱정되어 백씨를 이낭으로 끌어올린 후 자신의 수족으로 삼았다. 이후 백 이낭은 딸만 하나 낳은 데다 고분고분히 자신의 분수를 지켰기에 오늘날까지 진씨의 눈 밖에 나지 않았다.
진씨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녹엽을 흘겨보자 강심설이 대신 말했다.
“어머님 피곤하신 거 안 보이니? 거처로 돌아가 쉬라고 해!”
녹엽은 움찔하더니 얼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 일행은 일상원의 대문을 나선 후 궁명헌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병을 품에 안고 걸어가는 추길의 눈썹과 눈은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추길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불평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전 아가씨가 울분을 참으며 기도 못 펴고 사시려는 줄 알았어요!”
“아가씨는 우선 예를 지키고 그게 안 되니 강경한 수단을 쓰신 거야.”
혜연은 엽연채의 뜻을 분명히 깨달은 듯 말했다. 그러자 엽연채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그저 잘 지내고 싶은 것뿐이란다. 다른 사람과 다투고 빼앗고 하려는 게 아니야. 그분은 이 집안의 적모嫡母이고 나는 서자의 아내이니 날 미워하시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분이 날 난처하게 하거나 지나친 행동만 하지 않으신다면, 나도 그분을 깍듯하게 대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날 받아들이실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이니 나도 더 이상 예의 차리지 않을 수밖에.”
오늘 아침 그녀는 진씨에게 후한 선물을 주며 성의와 선의를 충분히 표현했다. 그런데도 진씨는 뒤통수를 때리더니, 비 이낭의 일이 벌어졌을 때도 이쪽을 만만하고 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한술 더 떠서 괴롭히려고 했다. 만약 앞으로도 이렇게 행동한다면 그녀도 반격할 수밖에 없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엽연채 일행은 궁명헌에 도착했다. 추길이 돌아서서 말했다.
“경인아, 어서 돌아가거라!”
그러자 경인이 말했다.
“아가씨께서 절 부르지 않으셨지만 사실 아가씨께 전해 드리고 싶었던 일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데?”
엽연채가 묻자, 경인이 대답했다.
“오늘 아침 정안후부 둘째 마님께서 사람들을 데리고 밖에서 혼수품을 사러 다니셨답니다. 그러다가 녹지와 마주치셨고, 그 아이에게 아가씨의 혼수가 삼만 냥이나 된다는 이야기를 하셨다고 해요. 그 말을 들은 녹지는 낯빛이 변하더니 황급히 뛰어갔고요.”
그 말을 들은 엽연채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추길은 화가 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어쩐지, 일상원 사람들이 가만히 잘 있다가 갑자기 아가씨를 불러 괴롭힌 이유가 뭔가 했는데. 시샘 때문에 그런 거였구나! 둘째 마님은… 딸이 장씨 가문에 시집가기 전인데도 벌써부터 이런 못된 짓거리를 한단 말이지!”
“경인아, 이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느냐?”
혜연이 물었다.
“둘째 마님이 혼수품을 구입하러 가실 때 어멈들을 데려가셨어요. 그중 한 명이 제 어머니와 친합니다. 그 사람이 이 사실이 일상원 사람들 귀에 들어가면 아가씨가 분명 곤란한 일을 겪을 거라고 염려하면서, 저에게 아가씨에게 알려서 미리 대비하라고 귀띔을 해 주셨어요.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달해 드리기도 전에 아가씨는 이미 사당에서 벌을 받고 계셨지요.”
경인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녀의 입가에는 냉소가 번져 있었다. 엽연채는 본래 엽이채 쪽 사람들이 자멸하도록 내버려 둘 참이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손을 뻗칠 줄이야.
‘제대로 맞받아치지 않으면 내 이름은 이제부터 엽연채가 아니다!’
“무릎이 아직도 아프구나!”
엽연채가 입술을 사리물며 말했다.
“아가씨, 어서 안으로 들어가서 앉으시죠!”
혜연과 추길이 얼른 엽연채를 부축해 안으로 들어갔다.
* * *
주운환이 난죽거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있었다. 주운환을 본 여양은 얼른 밖으로 뛰어나왔다. 주운환은 밖에 나가서 일을 볼 때 대부분 여한만 데리고 다녔고 여양은 남아서 집을 봤다.
“셋째 도련님, 오셨군요! 오늘 집에서 일이 났었습니다.”
“무슨 일?”
여한이 물었다.
“마님께서 셋째 마님께 사당에서 무릎을 꿇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무려 한 시진이나요!”
여양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주운환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일단 궁명헌으로 향했다.
궁명헌 안으로 들어서자 방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실내로 들어선 주운환은 어안이 벙벙했다. 엽연채가 나한상에 기댄 채 화본을 읽고 있었는데, 도대체 얼마나 재밌는 내용인지는 몰라도 깔깔 소리까지 내며 웃고 있었다.
주운환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삐죽거렸다. 저게 무슨 무릎 꿇는 벌을 받아 고생한 사람의 모습이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