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하지만…….”
혜연이 조심스러운 눈길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방금 전에 마님께 혼쭐이 났는데 지금은 우선 참으시는 것이…….”
“참길 뭘 참느냐? 난 여태껏 참을성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엽연채가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혜연은 어리둥절했다. 오늘 마님 앞에서 꾹 참고 순순히 벌을 받지 않았던가?
“내 혼수가 바다를 다 메울 수 있을 정도로 많지만, 그 누구도 손끝 하나 대지 못한다.”
엽연채는 그리 말하며 문밖을 나섰다.
“내 혼수를 가로채려는 사람은 그 누구도 좋은 꼴을 못 볼 것이다! 추길아, 가서 경인이를 불러오너라!”
엽연채가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 일렀다. 추길과 혜연이 깜짝 놀라 잠시 서로를 쳐다봤다. 추길은 곧 황급히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 * *
비 이낭은 진작부터 엽연채가 마차 세 대에 가득 실어 온 혼수를 보고선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 노마님께서 으름장을 놓으셨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진씨가 갑자기 엽연채를 불러들이더니 사당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벌을 내린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비 이낭은 뛸 듯이 기뻤고, 엽연채가 진씨에게 꼬리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진씨가 선봉에 선 이상 자신도 뒤처질 순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궁명헌으로 달려갔고 그곳에 놓인 장식품을 보자마자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비 이낭은 장춘백석분경을, 그녀의 여종 소연은 성요백학병 한 쌍을 들고 자기 처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낭, 정말 물어보지도 않고 이렇게 셋째 마님의 물건을 가져가도 될까요?”
소연이 주저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겠느냐!”
비 이낭은 냉소로 대답했다.
“부인 앞에서 꼬리를 내리는 것이 내 앞이라고 패악을 부릴 수 있겠느냐?”
소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곧 미소를 지었다.
‘하긴 그렇긴 하지!’
비 이낭은 주씨 가문에 들어오기 전에 시정 출신이었다. 후에 주씨 가문에 여종으로 팔려 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낭으로 승격됐다. 과거 백부가 한창 잘나갈 때, 비 이낭은 제 분수에 맞게 행동했었다. 본분에 맞게 행동하고 언행에 신중을 기했다.
하지만 그 후 백부는 몰락하고 존엄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런 판국에 규율을 챙길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그때부터 비 이낭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점점 더 도를 지나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비 이낭은 본래 앙칼지고 성질이 사나운 사람인 데 반해, 진씨는 예교禮敎를 중시하는 학자 집안 출신이라 스스로 인품이 고결하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매번 일이 생길 때마다 비 이낭은 주 백야 앞에서 소란을 피웠는데 백야는 그저 ‘됐다, 어지간히 해라.’라는 말로 대충 넘어갔다.
진씨 또한 본래 날카로운 사람이 아닌 데다, 체면을 중시해서 비 이낭에게 트집을 잡으면 자신의 위신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그녀의 행동이 너무 지나치지만 않으면 참고 넘어가곤 했다.
비 이낭이 말했다.
“눈치가 있는 사람이면 알아서 더 선물을 보내겠지.”
비 이낭은 오늘 벌어진 일을 통해 엽연채가 만만하고 연약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었고, 그녀의 대단한 혼수를 떠올리며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앞으로 자기 손에 들어올 물건들이 눈앞에 선했다.
잠시 후 비 이낭의 거처인 진취원珍翠院이 눈앞에 보였다. 그녀의 한쪽 발이 문턱을 넘어서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어떤 도둑년이 감히 내 방에서 물건을 훔쳐가는 것이냐!”
비 이낭과 소연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고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벼운 옷차림의 엽연채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비 이낭의 눈에 그녀를 깔보는 듯한 기색이 살짝 비쳤다.
“무슨 망발을 하는 것이냐! 누가 네 물건을 훔쳐갔다는 것이야?”
엽연채는 냉소를 짓더니 그녀의 앞으로 달려들어 철썩철썩 따귀를 두 대 올려붙였다. 따귀를 맞은 비 이낭은 눈앞에 별이 보였다. 비 이낭은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손에 들고 있던 분경을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뜨렸다.
“이, 이낭……!”
소연은 점잖고 고상해 보이는 명문가 아가씨가 갑자기 달려들어 제 주인을 손찌검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아리따운 얼굴에 냉소를 띤 채 한 발짝씩 바싹 다가붙는 엽연채의 모습에 질겁하여 뒷걸음질을 쳤다.
“네, 네가 감히 날 쳐!”
비 이낭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카롭게 소리쳤고 자신도 대갚음해 주려고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경인이 앞으로 다가서더니 비 이낭을 밀쳐 버렸다.
“아이고!”
비 이낭은 소리를 지르며 팽이처럼 한 바퀴를 돌더니 땅바닥에 ‘꽈당’ 하고 넘어졌다.
떠밀려 넘어진 비 이낭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엽연채가 두 여종과 사동과 함께 앞으로 다가와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비 이낭에게는 고작 여종 한 명과 막일을 하는 어멈 한 명밖에 없었으니 몸싸움을 한다 해도 승산이 없었다.
“이 불효막심한 것! 감히 날 치다니!”
비 이낭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일상원을 향해 뛰쳐나가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이런 법이 어디 있답니까! 셋째가 저에게 손찌검을 했습니다! 마님! 마님께서 해결해 주십시오!”
비 이낭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추길과 혜연은 안색이 변하더니 머뭇머뭇하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러나 엽연채는 오히려 하하 소리 내 웃을 뿐이었다.
“가자. 우리도 가 보자꾸나.”
비 이낭은 원래 뻔뻔스럽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마치 자신이 당한 억울함을 다른 사람들이 모를까 봐 속이라도 타는 듯 그녀는 소리 높여 울부짖으며 달려갔다. 비 이낭이 일상원으로 뛰어 들어가자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하인들이 금세 문밖을 에워쌌다.
“마님, 마님께서 해결해 주십시오! 셋째가 저에게 손찌검을 했습니다!”
비 이낭이 일상원 안에서 울부짖었다.
진씨와 강심설은 엽연채를 손봐 주고 속이 후련하던 참이었다. 그들은 엽연채가 선물한 비단을 만지며 어떻게 재단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밖에서 들려오는 비 이낭의 부르짖는 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 이낭, 방금 뭐라고 했느냐?”
진씨와 강심설이 문턱을 넘으며 말했다.
“마님, 마님께서 해결해 주셔야 합니다! 셋째가 절 때렸습니다! 절 때렸다고요!”
비 이낭이 목청을 더욱 높였다.
“뭐라?”
고부는 깜짝 놀랐다. 오늘 엽연채를 손봐 준 그들은 엽연채가 연약하고 만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손찌검을 했다? 게다가 비 이낭을! 진씨도 골머리가 아파 꺼려하는 비 이낭이 엽연채에게 손찌검을 당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때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 정국백부의 이낭이었군요. 전 손버릇 나쁜 천박한 여종인 줄 알았죠!”
진씨와 강심설이 고개를 들어보니 가벼운 옷차림을 한 소녀가 장미처럼 요염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매화 꽃잎 무늬가 들어간 치맛자락을 살랑거리며 문턱을 넘어 들어섰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사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벌을 받은 터라 귀밑머리가 좀 부스스하고 얼굴이 살짝 창백했다. 그런데도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을 정도로 고왔다.
진씨와 강심설의 낯빛이 변했다.
‘방금 전에 벌을 받아 놓고 이리 오만방자하게 굴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냐?”
진씨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마님, 셋째를 혼쭐내 주세요!”
비 이낭이 한마디 하자마자 추길은 악인에게 선수를 뺏기지 않으려고 얼른 입을 열었다.
“저희가 사당에서 궁명헌으로 돌아와 보니 분경 하나와 병 한 쌍이 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비 이낭이 훔쳐가는 것을 본 자가 있었고요. 그래서 비 이낭을 찾아가 따져 물으려고 했죠! 오, 마님, 저기 보세요. 바로 저 병입니다!”
소연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방금 전 급히 쫓아오는 바람에 병을 내려놓는 것을 깜빡했던 것이다.
진씨와 강심설은 그 한 쌍의 병을 보고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저걸 눈앞에 가져오다니!’
“훔치다니!”
비 이낭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그러곤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훔칠 요량이면 대낮에 궁명헌으로 들어갔겠느냐? 그것도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서? 난 그저 그 물건들로 나한테 효도하라는 뜻이었다. 그것도 안 되느냐? 넌 불효를 저질러 방금 전 마님께 벌을 받아놓고 그새 잊은 것이냐?”
진씨는 남의 불행을 보고 고소해하는 눈빛을 보였다. 그녀는 비 이낭과 엽연채 둘 다 싫었지만 비 이낭보다 엽연채가 훨씬 더 싫었다. 비 이낭을 도와주며 엽연채를 눌러 놓으려고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이 뭔데 나에게 효도를 하라고 합니까?”
그러자 순간 멍해진 비 이낭이 화가 나 소리를 질렀다.
“난 정국백부의 이낭이다. 어찌 됐든 윗사람이란 말이다!”
“아, 난 몰랐네요. 언제부터 이낭이 윗사람이 된 거죠? 내 부군이 서자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집안의 아드님이며 어엿한 상전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체면을 살려 주고자 사람들이 이낭이라고 불러 주는 사람일 뿐,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팔려 갈 수 있는 노비에 불과합니다!”
“뭐라……!”
그녀가 비 이낭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자 화가 난 비 이낭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진씨는 다소 어두워진 낯빛으로 끼어들었다.
“얘야, 어찌 됐든 그 사람은 둘째를 낳은 사람이다. 평범한 노비라고는 볼 수 없으며, 내 시중을 드는 사람이기도 하다.”
“맞습니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저 사람은 이낭이며 어머님 시중을 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사당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데 녹지가 말하길 제가 무릎을 꿇으니 여종들도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국백부는 규율을 중시하니 건성건성 넘어가서는 안 된다면서 말이죠. 그런데 지금 비 이낭이 제 거처에서 물건을 가져갔습니다. 이건 대체 무슨 규율에 해당하는 거죠?”
그 말을 들은 녹지와 진씨의 안색이 변했다. 뺨따귀를 사정없이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오늘 그들은 규율을 들먹이며 엽연채에게 트집을 잡아 화풀이했다.
그런데 비 이낭이 도둑질을 했으니 그야말로 자가당착에 빠진 꼴이었다. 게다가 진씨는 방금 비 이낭이 자신의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고 했으니, 그녀가 비 이낭에게 며느리의 거처에 들어가라고 시켰다고 의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