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그 말을 들은 추길과 혜연의 낯빛이 변한 채 화가 나서 뛰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런데 엽연채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얼마나 꿇고 있으면 될는지요?”
진씨와 강심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들은 엽연채가 분명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소란을 피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어멈을 불러 그녀를 제압한 뒤 따귀를 냅다 올려붙일 계획이었다. 설령 그렇게까지 난리를 치진 않더라도 적어도 엽연채가 억울하다며 울고불고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엽연채가 이렇게 이상하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얼마나 꿇고 있으면 되냐고 물을 줄이야!
말문이 막힌 진씨는 대답을 안 했다가는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입에서 나오는 대로 뱉었다.
“한 시진 동안 그리하거라!”
“알겠습니다.”
엽연채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강심설은 엽연채가 순순히 따르는 것을 보며 벌이 너무 약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님, 한 시진은 너무 짧습니다!”
이 말에 진씨도 짧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이제 와서 말을 바꾸면 위엄이 손상될 터였다.
“됐다. 한 시진이라고 했으니 일단 한 시진으로 하자꾸나. 벌은 앞으로 천천히 주면 된다.”
그렇게 말하며 속이 후련했는지 진씨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흥, 귀한 가문의 적녀는 무슨. 이제 내 손에 들어왔으니 서자의 아내일 뿐이다. 내가 시어머니이니 괴롭히고 싶으면 괴롭히는 거지!’
엽연채과 추길, 혜연이 밖으로 나오자 녹지는 엽연채의 우스운 꼴을 보려고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셋째 마님, 소인이 모셔다 드릴게요!”
그러고 나서는 의기양양하게 앞장서서 걸어갔다. 일상원을 나서니 안뜰의 협문이 나왔다. 그들은 마당에서 남대청南大廳을 가로지른 후 수화문 앞에서 모퉁이를 돌아 동쪽으로 걸어갔다.
대여섯 개의 뜰을 지나쳐 일각쯤 더 걸어가니 주씨 가문 사당이 보였다. 녹지는 사당의 대문을 열어젖힌 후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다시 꽃무늬가 조각된 주실主室의 나무 문을 열자 주씨 가문 선열들의 위패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녹지는 문 앞에 서더니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외쳤다.
“셋째 마님, 그럼 안에서 무릎 꿇고 반성하고 계세요!”
엽연채는 안으로 들어가서 부들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추길과 혜연은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엽연채의 뒷모습을 보고는 온 가슴이 답답해졌다.
“너희 둘, 상전이 안에서 무릎 꿇고 계시는데 바깥에서 이렇게 서서 뭐 하는 거니? 너희 정안후부의 규율은 그런가 보지?”
녹지가 말했다.
“너희 가문은 규율도 참 많구나!”
추길이 어두운 낯빛으로 되받아쳤다.
“당연하지.”
녹지는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냉소를 지었다. 혜연은 얼굴을 찡그리며 추길을 잡아당겼고 창백한 얼굴의 추길은 녹지가 아니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엽연채는 이렇게 장성할 때까지 단 한 번도 무릎을 꿇는 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무릎은 엽이채가 자주 꿇었는데 무릎을 꿇어도 엽이채가 꿇는 거지 여종들은 무릎을 꿇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 녹지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저 자신들을 억압하려고 그러는 것이 분명했다.
추길은 분통이 터졌지만 현재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생각하며 가까스로 분을 참아 냈다. 더군다나 주인조차 불평 없이 벌을 받고 있었다. 그녀는 코를 벌름거리곤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본 녹지는 속으로 기쁨의 환호성을 쳤고 잠깐 구경을 하다가 돌아서서 가버렸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여종들은 방금 전 엽연채 일행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그들을 유심히 쳐다봤다. 엽연채가 주씨 가문에 들어왔을 때 노마님께서 갑자기 나타나 다른 상전들이 엽연채를 건드릴 엄두도 못 내도록 으름장을 놨었다.
그러나 노마님의 남은 위세는 언젠가는 사라질 테니, 모두들 셋째 마님이 마님과 첩실들에게 괴롭힘당하는 모습을 보려고 눈이 빠지게 기다리던 차였다. 그러던 와중에 엽연채가 갑자기 일상원으로 불려갔고, 이어서 녹지가 그들을 데리고 사당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다들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녹지가 사당 대문을 열고 나올 때, 마침 청소를 하는 하급 여종 몇 명이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피부가 거무칙칙하고 여윈 배짱 좋은 여종이 미소를 지으며 녹지에게 다가섰다.
“녹지 언니. 방금 전에 셋째 마님과 어디에 간 거예요?”
“사당에 갔었다!”
녹지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요 며칠 동안 마님께서 몸이 편치 않으셔서 첫째 마님께서 곁에서 병수발을 들었거든. 그런데 셋째 마님은 한가로이 밖을 돌아다니며 불효를 저지르셨지 않니! 법도도 모르시니 마님께서 사당에서 무릎을 꿇고 반성하라고 벌을 내리셨단다!”
말을 마친 녹지는 걸음을 옮겼다. 깜짝 놀란 여종들이 벌집을 쑤신 듯 들끓었고, 그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쯧쯧, 어엿한 대갓집 규수께서 마님께 저리 혼쭐이 나시다니.”
그러자 다른 여종이 말했다.
“대갓집 규수면 뭐 해? 주씨 가문에 들어왔으면 주씨 가문 며느리이지. 거기다 서자의 아내야. 그러니 어디서 방자하게 굴 수 있겠어? 앞으로는 꼬리 내리고 조용히 살아야지!”
여종들은 그렇게 계속해서 떠들어 댔다. 대부분이 남의 불행을 즐기는 눈치였다.
* * *
사당 안. 일각 정도 지나자 양 무릎이 아파 온 추길은 눈언저리가 시뻘겋게 변해 있었다.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목멘 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여기에 오는 게 아니었어.”
“됐어. 못 참겠으면 내일 정안후부에 가서 마님을 돌봐 드리든가!”
혜연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누가 돌아간대!”
지지 않고 받아친 추길이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난 그저 우리 아가씨 신세가 너무 억울하니까 그런 거지.”
이런 억울한 일은 자신도 겪어본 적이 없는데 엽연채는 오죽하랴!
“그만 지껄여!”
혜연이 언짢은 목소리로 타박했다. 이런 세월이 언제쯤 끝날까. 추길은 눈물을 닦았고 혜연은 고개를 더욱 숙였다. 그녀의 표정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 며느리가 서자의 아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친정이 떡하니 버티고 서 있으니 시집에서도 거리낌 없이 괴롭히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 온씨는 제 앞가림하기도 버거운 상황이고 둘째 일가 쪽이 득세했으니, 그들이 엽연채와 온씨를 압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셈이었다. 친정이 엽연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엽이채가 출가한 뒤 장씨 가문에서 자리를 잡으면 정안후부는 완전히 둘째 일가의 세상이 된다. 그렇게 되면 친정과 시댁 양쪽에서 압박해 올 것이다. 그럼 앞으로의 삶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혜연은 초조하고 불안해져 길게 탄식했다.
‘대체 어떡하면 좋단 말이야?’
한 시진이 지나자 엽연채는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버렸다.
“아가씨!”
혜연도 여태 무릎을 꿇고 있었기에 양 무릎이 마비되어 일어서기조차 힘들었으나 고통을 참고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괜찮다.”
엽연채는 혜연의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곱고 아름다운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온통 땀범벅이었다.
“아가씨, 걸으실 수 있으세요?”
추길이 무릎을 문지르며 앞으로 다가왔다.
“우선 좀 쉬자꾸나!”
엽연채는 숨을 내쉬었고 세 사람은 뜰에서 일각 정도 쉬고 나서야 거처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마주친 여종들은 그들을 보고선 귓속말로 속삭이기도 하고 비웃는 듯한 눈초리로 그들을 훑어보기도 했다. 추길은 그런 눈길을 받자 화도 나고 괴롭기도 했다.
* * *
세 사람은 어찌어찌 궁명헌에 도착했다. 엽연채는 나한상에 옆으로 누워 숨을 골랐고, 추길과 혜연도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엽연채는 숨을 고르다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더니 일어서서 다층 진열장과 보석 상자 위를 훑어봤다.
“아가씨, 뭘 찾으셔요?”
혜연이 물었다.
“어째서 분경이 비는 것이냐?”
엽연채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리고 백자병은 또 어디로 갔고?”
주운환의 방은 ‘누추하다’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단출해 장식품이 하나도 없었다. 하여 엽연채는 이 방에서 거주한 후로 그 썰렁한 분위기가 싫어서 그녀의 혼수품에서 자기와 분경 몇 개를 꺼내어 다층 진열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하니 삭막했던 방이 품위 있고 고상하게 변했다.
혜연과 추길은 순간 멍해졌다. 다층 진열장 위를 보니 정말로 장춘백석분경長春白石盆景과 성요백학병成窯白鶴甁이 사라져 있었다!
“추길 언니! 추길 언니!”
그때 정원에서 갑자기 추길을 부르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향아예요.”
추길이 얼른 소청으로 걸어가서 밖을 내다보니 열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빼빼 마른 여종이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엽연채가 추길에게 친하게 지내라고 일렀던, 막일을 하는 여종이었다.
향아는 몸을 낮추고 뛰어 들어왔다.
“방금 전 셋째 마님과 언니가 사당에 갔을 때 비 이낭께서 궁명헌으로 들어갔어요! 빈손으로 들어가더니 뭔가를 품에 안고 나오더라고요!”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추길의 낯빛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향아는 급히 말을 이어갔다.
“전 담이 작아서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어요. 그런데 배짱 좋은 다른 여종이 비 이낭께 왜 궁명헌에서 물건을 들고 나오시냐고 물었더니 글쎄, 비 이낭이 셋째 마님이 자신에게 효도하는 거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천박하기는!”
화가 난 추길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맙다, 향아야.”
밖으로 나와 있던 혜연이 동전 꾸러미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족히 동화 백 냥은 되어 보였다.
“아니에요……. 어떻게 이런 걸!”
향아는 본래 추길이 돈을 써서 알고 지내게 된 사이였다. 그런데 서로 오가면서 친해지자 향아는 돈을 받기가 민망했던 것이다.
“사양은 무슨. 넌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거란다.”
추길이 그녀의 손에 돈을 꼭 쥐여 주었다.
“어서 가렴. 다른 사람 눈에 띄었다간 너도 곤란해질지도 모르잖니.”
돈을 받은 향아는 기뻐하며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쏜살같이 달려갔다.
혜연과 추길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엽연채를 바라보았다. 엽연채는 냉소를 짓더니 몸을 일으켰다. 추길이 깜짝 놀라 물었다.
“아가씨, 어디 가시려고요?”
“가서 되찾아 와야지!”
엽연채가 그리 말하며 기지개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