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35화 (35/858)

제35화

추길이 물었다.

“마님께서 왜 셋째 마님을 부르시는 거냐?”

“일이 없으면 부르지 못하니?”

녹지는 입꼬리를 씩 올리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다. 추길이 미간을 찌푸리며 방 안으로 들어가니 엽연채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혜연아, 가서 준비한 선물을 가져오너라.”

엽연채도 진씨가 갑자기 자신을 왜 부르는지 까닭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번에 한번 찾아간 후로 연달아 두 번이나 더 뵈러 갔었으나 진씨는 몸이 안 좋아 볼 수 없다고 거절했었다. 모두들 속으로 훤히 꿰고 있었다. 병은 무슨, 그냥 엽연채를 보기 싫다고 대놓고 드러낸 것이었다.

그녀의 의중을 알아챈 엽연채는 더 이상 찾아가 귀찮게 굴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만나야 할 날을 대비하여 미리 선물을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다 가져가나요?”

혜연은 우물쭈물 망설였다. 엽연채는 원래 주씨 가문 모든 가족들에게 줄 첫인사 선물을 준비해 놓았다. 하지만 진씨가 이런 애매한 시간에 사람을 시켜 부른 것을 보니, 일가 전부가 그곳에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이 시간에 그곳에 모두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우선 가서 본 다음에 사람들이 많으면 더 가져오도록 하자. 그게 뭐 체면 깎일 일은 아니니 말이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 말을 덧붙였다.

“어머님께서 예물 옷감을 준비해 두셨는지 모르겠구나. 시어머니께서 첫 만남에서 먼저 선물을 하사하지 않는데 내가 먼저 드리면 도리어 난처하실 수도 있다. 이렇게 하는 게 낫겠구나. 원래 준비했던 것에 홍삼을 추가하자. 어머님께서 선물을 주시면 준비한 것을 첫인사 선물로 하고, 주시지 않으면 문병 선물로 하면 되지. 어떠니?”

“좋은 생각이세요.”

혜연은 미소를 지으며 작은 곳간에 들어가 물건을 가지고 나왔다.

엽연채는 단장한 뒤 여종 둘을 거느리고 오솔길을 따라 걸어갔다. 대략 일각쯤 걸어가자 일상원에 도착했다.

녹지가 견고한 이중 문발을 걷어 올렸다. 안으로 들어간 엽연채는 서차간으로 안내를 받았다. 구들 가장자리에는 보석 상자가 놓여 있었고, 오른쪽에는 다층 진열장이 서 있는데 그 위로 자기와 분경盆景이 놓여 있었다. 당연히 정안후부에는 못 미쳤지만 궁명헌과 비교했을 때는 그래도 제법 모양새를 갖춘 셈이었다.

홍목으로 만든 널찍한 평상 위에는 활짝 핀 꽃문양이 들어간 귀한 모포가 깔려 있었다. 경직된 표정을 지은 채 평상 위에 단정한 자세로 앉은 진씨의 시선이 마치 화살처럼 엽연채의 몸에 꽂혔다.

강심설은 진씨 옆에 서 있었는데, 남회색 바탕에 꽃문양을 넣은 비단 치마는 도리어 그녀의 모습이 더욱 칙칙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질투인지 조롱인지 모를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런 꺼림칙한 눈으로 엽연채를 휙 훑어봤고, 손에는 비단 손수건을 꽉 쥐고 있다.

엽연채는 아주 수수한 차림이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허리까지 오는 연보랏빛 겹옷과 매화 무늬가 들어간 담홍색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옷감도 지극히 평범한 것이라 진씨와 강심설이 입은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상함과 청아함을 풍기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빛을 뿜어냈다. 진씨와 강심설은 이런 엽연채의 고운 모습을 보니 한층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어머님과 형님을 뵙습니다.”

엽연채가 앞으로 다가서며 예를 올렸다.

“오늘은 무탈하신데 제가 늦게 찾아뵈었네요.”

엽연채는 그렇게 말하며 잽싸게 곁눈질로 진씨를 살폈다. 진씨는 불만이 섞인 굳은 표정을 지은 채 허리를 꼿꼿이 세워 앉아 있었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해 문가에 서 있는 혜연과 추길은 긴장감에 온몸이 경직되었다. 특히 추길이 그랬는데, 그녀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아가씨는 정안후부의 적장녀라 집안에서 늘 다른 사람들이 아가씨의 눈치를 봤지, 이렇게 스스로를 낮추고 굽신거리며 다른 사람에게 선물을 갖다 바치신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하지만 추길도 현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과거와 상황이 달랐다. 주씨 가문에 떨어진 이상 아가씨는 주씨 가문 사람이었다. 서자의 아내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어엿한 진씨의 며느리여도 시어머니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나 엽연채가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는 것을 추길과 혜연은 익히 알기에 그녀가 분을 참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다.

혜연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엽연채를 바라봤다. 그런데 그녀는 아주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얼굴에 억울한 감정 따윈 보이지 않았다. 혜연과 추길은 몰랐다. 전생의 엽연채가 장씨 가문에서 당했던 냉대와 학대는 지금보다 훨씬 심했다는 것을 말이다. 엽연채는 이미 태산이 무너져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침착함과 태연함을 몸으로 익힌 후였다.

엽연채는 진씨의 어두운 표정을 보더니 자신에게 선물을 하사할 뜻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렇게 말했다.

“그저께 어머님이 몸이 안 좋으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삼을 구입했습니다. 어머님께 보내 드리려던 참에 마침 어머님께서 사람을 보내 절 부르셨기에 가져왔습니다.”

혜연과 추길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진씨와 강심설이 고개를 드니 여종 둘이 손에 물건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혜연은 천 두 필을 들고 있었는데 하나는 연한 녹색 빛깔 비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른 바탕에 백모란 문양이 들어간 비단이었다.

진씨는 한때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았던 사람이라 직접 만져보지 않고 눈으로만 봐도 귀한 물건임을 알아차렸다. 몇백 냥은 족히 나갈 물건이었다.

추길은 상자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위에 놓인 상자는 꽃무늬가 새겨진 기다란 형태의 백옥 상자였고, 아래에 놓인 상자는 붉은 바탕에 검은 상운祥雲 문양이 들어간 나무 상자였다.

진씨는 안에 든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해 안달이 났지만 겉으로는 뜨뜻미지근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에 무엇이 들었느냐?”

“마님, 위쪽 상자에는 인삼이 들어 있고 아래 상자에는 말액抹額(이마에 묶는 부녀자들의 장식용 머리띠)이 들어 있습니다.”

추길이 말했다.

“말액은 제가 어머님께 드리려고 만든 것입니다. 어머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덧붙이며 엽연채는 먼저 옥 상자부터 열었다. 그 안에는 타오르는 듯이 새빨간 홍삼이 들어 있었는데, 구불구불 자라난 실뿌리는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사람의 형상과 매우 흡사했고 향기로운 냄새를 풍겨, 딱 봐도 구하기 힘든 상등품임을 알 수 있었다.

엽연채는 홍삼이 든 상자를 추길에게 건넨 후 아래에 놓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나무 상자에는 진홍색 무늬 비단이 깔려 있었고, 그 위로 말액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푸른 바탕에 상운祥雲 문양을 넣고 묘안석猫眼石을 단 말액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취를 달고 암화暗花 문양으로 장식한 짙은 남색 말액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진씨는 이 선물들을 보고 분명 기분이 풀어졌을 것이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을뿐더러 선물까지 들고 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엽연채가 무려 삼만 냥의 혼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겨우 이까짓 선물을 들려 주고서는 비렁뱅이 보내듯 먹고 떨어지라는 건가? 그 많은 혼수가 전부 그 비천한 서자에게 넘어갔는데!’

강심설은 엽연채가 대수롭지 않게 가져온 물건들이 자신이 전에 시어머니께 드린 것보다 더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스스로가 구차하게 느껴졌고, 수치스러움에 화가 났다. 강심설은 진씨가 엽연채를 손봐 주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동서는 효심이 참 지극하기도 하네. 이건 최고급 홍삼 아닌가! 하지만 동서가 모르는 게 있어. 의원이 어머님은 마음이 초조하고 어혈이 진 상태라 평범한 백삼白蔘으로 충분하다고 했다네. 홍삼이 보양에 좋기는 하지만 심한 조열감燥熱感을 느낄 수 있거든.”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순간 멍해졌고 마음이 점점 내려앉았다. 추길과 혜연은 속으로 화가 났다. 마님이 병을 앓는 건 사실이나 그게 다 마음의 병이며, 병의 원인이 서자가 대단한 가문의 적녀를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인 것을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 때문에 지금 애먼 아가씨한테 화풀이하고 있는 것이고 말이다.

참다못한 추길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님, 저번에 셋째 마님께서 찾아뵈었을 때 마님께서 몸이 편치 않아서 보지 못하신다 하셨습니다. 셋째 마님께서는 마님께서 편안히 쉬시는 데 방해가 될까 염려되어 찾아뵙지 못했죠. 그래서 마님 상태가 어떤지 알 수가 없었던 겁니다.”

“어머님께서 몸이 안 좋아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신 까닭은 동서가 새색시인 것을 배려했기 때문일세! 어떻게 안 부르신다고 안 와 볼 수가 있는가? 며느리가 돼서 어찌 그리 불효를 저지를 수 있어!”

강심설이 냉소를 지으며 꾸짖었다. 이에 녹지가 얼른 공격에 가세했다.

“첫째 마님 말씀이 맞습니다! 마님께서 몸져누워 계시는 동안 첫째 마님은 매일같이 곁에서 병수발을 드셨어요!”

추길은 분노가 치밀었지만 엽연채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는 감히 화를 낼 수가 없어 이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첫째 마님, 셋째 마님이 한 번만 찾아뵌 게 아닙니다. 세 번씩이나…….”

추길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마님께서 셋째 마님께 병수발을 들게 할 생각이셨으면 왜 못 들어오게 하셨어요? 마님께서 그리 거절하시기에 일부러 셋째 마님을 곤란하게 하시려는 거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추길은 생각 끝에 비교적 완곡하게 말했다.

“마님께서 정말 조용히 쉬고 싶으셨나 보네요!”

그 말에 강심설과 진씨의 낯빛이 확 변했다. 엽연채는 분명히 세 번이나 방문했지만 강심설과 진씨는 그녀를 문전박대했다. 이제 와서 며느리를 배려했던 것인데 며느리는 예의를 모른다고 말하는 건 자기 뺨을 때리는 것과 같았다. 스스로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강심설은 눈알을 굴리더니 다시 냉랭하게 웃었다.

“아니, 동서가 정말로 마음이 있었다면 설령 만나 뵙지 못하더라도 하인들에게 어머님의 병세를 물어볼 수도 있지 않은가? 어머니가 쾌차하신 지 사오일이 지나 밖에서 정원 청소를 하는 어멈들도 다들 알고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었네. 직접 심은 꽃도 가지고 왔었지.

그런데 동서는 어머님의 병세를 아예 신경도 안 쓰더군. 언제 쾌차하셨는지도 모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 하고! 친정도 가고 친정어머니와 사찰에 가 예불도 드리고 아주 효성이 지극하던데! 고귀한 출신인 동서가 신분이 낮은 사내에게 시집을 와서 속으로 어머님을 얕잡아 보나 봐?”

진씨는 콧방귀를 뀌더니 손에든 찻잔을 항탁 위에 ‘쾅’ 하고 내려놓고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효막심한 것. 예의범절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모르는구나. 사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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