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아니요.”
주운환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그녀를 아내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엽연채는 낮은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럼 그분께는 어떻게 말씀드릴 건가요?”
“소저와 나의 관계는 그분께서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능청스레 부부 행세를 할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실 거면 오늘 왜 절 구해 주셨습니까?”
“충동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그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었다. 그런 자신이 좀 우습게 느껴졌으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 일은 없었던 셈 치면 됩니다. 전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이후에… 대사大事가 정해지면 각자 자기 갈 길을 갑시다. 제가 소저를 보호해 드렸으니 소저께서도 절 실망시키지 말아 주세요.”
주운환의 당부에 엽연채는 호쾌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주운환도 알겠다고 말하고는 그길로 식사 자리를 떠났다. 문을 열자 문 앞에는 혜연과 추길, 여양과 여한 네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주운환은 문밖을 나선 후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혜연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그만 그의 뒤를 쫓아가며 외쳤다.
“셋째 공자님!”
“무슨 일이냐?”
주운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혜연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오늘 셋째 공자님과 아가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은 꼭 말씀드려야겠어요. 방금 전 방 안에서 공자님은 아가씨가 공자님을 이용해 장씨 가문을 피했다고 아가씨를 질책하시고, 신분이 낮은 도련님께 시집온 거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하셨죠.
셋째 공자님께서는 아가씨도 강요를 받아 어쩔 수 없이 순종한 점은 왜 고려도 안 해 주십니까? 주 백야께서 이 혼사에 응하신 겁니다. 나리께서 응하지 않으셨으면 아가씨께서 어떻게 주씨 가문에 발을 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어찌 됐든 부모님의 명령에 따랐을 뿐인데, 어떻게 저희 아가씨를 탓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여양이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 후에 우리 셋째 도련님께서 소저와 너희들에게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더냐? 어째서 다시 돌아온 게냐?”
“네 생각에는 우리 아가씨가 돌아오고 싶어서 돌아온 것 같니? 공자님은 모르십니다. 저희 마님께서는 아가씨를 주씨 가문에 돌려보내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대충 방계 아가씨 한 명을 골라 대신 시집보내려고 하셨죠. 이 일이 잊혀질 때까지 아가씨는 일 년 반 정도 별채에서 조용히 숨어 지내게 하실 요량으로요. 저 용모로 어디든 시집을 못 가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아가씨께서는…….”
“혜연아!”
그때 엽연채가 계단에 서서 호통을 치며 그녀의 말을 막았다. 혜연은 늘 말을 가장 잘 듣는 여종이였으나 이번만큼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입술을 꽉 물고 말했다.
“아가씨께선 셋째 공자님께서 손해를 보게 할 수는 없다고 하셨어요! 셋째 공자님이 이 일로 억울함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염려하셨단 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주운환은 마음이 흔들렸다. 엽연채가 하얀 달빛을 맞으며 날렵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그녀가 허리를 깊이 숙였다.
“어찌 됐든 제가 공자님께 폐를 끼쳤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앞으로 저 때문에 벌어지는 일은 제가 스스로 해결하겠습니다. 공자님을 곤란하게 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서 가 버렸고, 옆에 있던 여양과 여한도 얼른 그를 따라 걸어갔다.
세 사람은 희미한 달빛을 받으며 수양버들이 서 있는 오솔길을 따라 난죽거 안으로 들어섰다. 등불이 켜져 있지 않은 난죽거는 칠흑같이 어두웠고 산들바람이 불자 시커먼 대나무 그림자가 흔들렸다.
여한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 오늘 아가씨를 살려 두는 모험을 해선 안 되셨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누가 그걸 모르나?’
자신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엽연채를 진짜 아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도 어쩔 수 없이 시집온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그녀가 당초 저에게 시집온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자신에게 가장 마음을 써 준 사람 역시 바로 그녀였다.
함께 지낸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짠 것을 좋아하는지 아니면 싱거운 것을 좋아하는지 눈치채고 끼니때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씩 준비해 주었다.
아까 낮에는 몰랐지만 밥상 앞에 앉아 그녀와 마주하는 순간, 이 삭막한 집안에 그녀가 있기에 자신이 조금의 온기라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 * *
주운환이 떠나자 추길과 혜연은 재빨리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
“아가씨, 셋째 공자님하고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엽연채는 방 안으로 들어가며 답했다.
“…내가 어제 공자님께 함께 외출하자고 제안하지 않았니. 공자님께서 벗과 선약이 있어 시간이 없다고 하셔서 다음으로 미뤘지만. 그런데 오늘 법화사에서 여한을 데리고 한가로이 돌아다니시는 모습을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
그래서 내가 그쪽으로 달려가 공자님과 말다툼을 했단다. 나와 함께 외출하기 싫어서 그랬다고 하시더라. 돌아와서 또 말다툼을 하지 않았니?”
그 말을 들은 혜연과 추길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혜연이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 아가씨께서 잘 계시다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셨다고. 셋째 공자님을 찾으러 가셨던 거였구나.”
“그럼… 지금은 어떤 상황인 거예요?”
추길이 물었다.
방금 전 부부가 방 안에서 하던 이야기 중 혜연과 추길이 들은 건 주운환이 엽연채와 부부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고 한 부분뿐이었다. 과연, 그래서 장모를 보러 가고 싶어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엽연채는 자조의 웃음을 지었다.
“이야기를 나눈 후 합의해서 갈라서야지. 내가 너무 거만하게 굴기는 했어. 혼례식 당일에 공자님께 제대로 이야기를 했어야 했는데.”
“아가씨, 어째서 자책하시는 겁니까.”
추길은 당장에 주인의 편을 들고 나섰다.
“제대로 말했어야 했던 쪽은 공자님입니다. 아가씨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면 그렇다고 말씀을 했어야죠. 뭣 하러 가식적으로 우릴 도와줍니까. 그러기에 저희는 당연히 아가씨를 아내로 받아들이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죠.”
“다 네가 한 짓 때문이야!”
혜연이 추길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날 밤 셋째 공자님께서 방으로 들어오시려 할 때 네가 문 앞을 막아서며 공자님을 쫓아냈잖아. 그러니 공자님께서는 아가씨가 공자님을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신 게지. 주씨 가문으로 하룻밤 피해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신 게야. 사실… 그땐 나도 하룻밤 피해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혜연은 말하면서 조심스러운 눈길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엽연채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두들 자신이 잠시 비바람을 피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은 한사코 그 반대로 행동하려 했는데 그 와중에 한 가지 잊은 게 있었다. 바로 자신이 시집가기를 원해도 상대방은 저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무엇이 내게 이런 자신감을 심어 주을까? 그래, 나는 부귀한 가문의 적녀이지만 상대는 몰락한 가문의 서자라고 얕잡아 봤던 거야. 또 스스로의 미모를 과신하고 교만하게 굴었던 거고. 더욱이 인생을 다시 한번 살게 되었다는 이유에서…….’
주운환이 오늘 밤에 한 말은 전부 옳은 말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뼈아픈 교훈을 주었다. 그 교훈을 통해 자신이 환생한 것은 다른 이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이 세계는 그것을 이유로 자신에게 관대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환생했을지라도 교만함과 성급함은 경계하고, 언행에 신중을 기하며… 앞으로는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해야지.’
엽연채는 나한상에 앉은 후에야 추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추길아.”
“예?”
추길이 앞으로 다가섰다.
“넌 지금도 분명 셋째 공자님에게 화가 나 있을 게다. 그렇지?”
엽연채가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추길은 말문이 막혔다. 아가씨는 분명 화가 난 것이다. 엽연채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 너에게 분명히 말해 두겠다. 이 일은 공자님께서 잘못하신 게 아니다. 한번만 더 얼굴에 노기를 띠면 정안후부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아가씨!”
깜짝 놀란 추길은 얼른 바닥에 무릎을 꿇고 훌쩍였다.
“앞으로는 아가씨 말씀을 잘 듣겠습니다.”
“그래.”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미 해시亥時(밤 9시~11시) 이각이라 밥 생각이 없어진 엽연채는 양치질을 한 뒤 바로 침상에 올라 잠을 청했다. 저도 모르게 낮에 사찰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 불온한 일에는 결단코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주운환이 선 곳은 하필 절대적으로 열세인 쪽이었다. 하지만 그가 이쪽의 목숨을 살려 주었으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든 간에 자신은 그의 편에 서야 마땅했다.
* * *
엽연채가 낮에 법화사를 떠난 후, 엽영교와 온씨는 예불을 올릴 마음이 달아나 대충 하룻밤만 보낸 후 이튿날 아침 귀가했다.
자기 처소에 도착한 엽영교는 엽연채의 몸 상태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정국백부로 막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거처에서 일하는 한 이등二等 여종이 그녀 앞으로 다가서며 고했다.
“아가씨, 어제 아가씨가 사찰로 떠나신 후 둘째 마님께서 아가씨 혼수에서 모란 무늬가 들어간 채색 도자기 병 한 쌍을 또 가져가셨습니다.”
엽영교의 작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천박한 여편네!”
“저희가 가서 다시 돌려달라고 말씀드릴까요?”
여종이 말했다.
“그 병은 작년에 아가씨께서 엄청 공을 들여 손에 넣으신 거잖아요.”
“다시 가져올 수 있겠니?”
엽영교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째 새언니가 스스럼없이 그것을 가져간 것은 우리 어머니 허락을 받았기 때문이야. 어머니도 참. 굳이 그 사람들을 추켜세워 줄 필요가 있나!”
엽영교는 이를 갈며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버지 앞에서 소란을 피워 보았자 아버지께서는 그 사람들 편을 들어 줄 테니 우선은 참고 지켜보자꾸나!”
손씨가 모란 무늬가 들어간 채색 도자기 병을 가져갔다는 것은, 엽이채가 예상했던 것만큼 어마어마한 혼수를 준비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