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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32화 (32/858)

제32화

전생의 엽연채는 여인들의 암투에서 진 후 자신의 불리한 처지를 바꾸지 못했다. 제 코가 석 자인데 조정의 급변하는 정세에 관심을 가질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그러나 전생에서 그녀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 황제가 붕어했다는 소식을 듣지는 못했으니, 앞으로 판세가 어떻게 바뀔지는 모를 일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든 똑똑한 사람이든 간에, 양왕의 야심을 알게 되면 제일 먼저 보일 반응은 비슷할 것이다. ‘양왕 전하, 대체 무엇으로 태자와 맞서실 수 있나요?’ 그리고 엽연채는 꽤 영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양왕의 열악한 처지를 알게 되면 그에겐 승산이 거의 없음을 곧 파악하게 될 터였다.

또 그녀는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기에 부위부강夫爲婦綱(부부 사이에서 아내는 남편을 섬겨야 한다는 삼강三綱의 도리)을 이유로 남편에게 협력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만약 협력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주운환이 자신에게 살수를 보낸다면? 그럼 곧장 태자에게 찾아가면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럴 배짱이 있었다. 그런 후에는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양왕이 태자와 황제 주변에 염탐꾼을 깔아 놓았다는 이야기만 꺼내면 안전하게 보호받으면서 후한 상도 받을 테니까.

“운환아, 비키거라!”

양왕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분명 이 사람의 존재가 위험한 건 맞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는 절 믿으시듯 이 사람을 믿으시면 됩니다. 전 이 사람의 성품을 믿습니다.”

양왕은 어두운 표정을 지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주운환은 이어서 말했다.

“열 살 때 초미금蕉尾琴을 계기로 은혜롭게도 전하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매년 생일 때마다 제게 초미금을 선물해 주셨죠. 전하는 다른 것을 원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하셨지요. 곧 제가 열여덟이 되니 올해 생일에는 이 사람의 목숨을 선물로 주십시오!”

양왕의 어두운 눈빛이 살짝 흔들리나 싶더니, 매정하게 돌아서서 소매를 휘날리며 가 버렸다. 온몸에 힘이 쭉 빠진 엽연채는 마비라도 된 양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옷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먼저 돌아가세요.”

주운환은 일어서더니 양왕이 걸어간 방향으로 떠나갔다.

엽연채는 자신이 어떻게 일어나서 그 외진 곳을 걸어 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곳에 다다른 엽연채는 기둥을 잡고서는 심호흡을 했다.

“얘, 연채야!”

“아가씨!”

그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엽영교와 혜연이었다.

“아가씨, 어디 가셨던 거예요?”

혜연이 달려오며 물었다.

“마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데요.”

보전 밖에서 즐겁게 담소를 나누던 그들 일행이 고개를 돌렸을 때, 엽연채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으리라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녀들은 여기저기 다니며 엽연채를 찾고 있었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다니다 길을 잃었어요. 으… 머리가 좀 어지러워서 돌아가 쉬고 싶어요.”

엽연채가 급히 둘러대자 엽영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도 참! 그렇게 말 한마디도 없이 가 버리면 어떡하니. 그래, 어지럽다니 일단 돌아가 쉬어.”

그러자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집에 가서 쉴래요.”

그러면서 그녀는 혜연에게 손짓했다. 혜연이 얼른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는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 물었다.

“아가씨, 괜찮으신 거죠?”

“응, 괜찮아.”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고모, 죄송한데 향불 냄새를 맡고 있으니 머리가 어지러워 더는 못 있겠어요. 먼저 돌아간다고 어머니께 전해 주세요.”

“아이고, 너도 참…….”

어딘가 불안해 보이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엽연채의 모습에 엽영교는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타고 온 마차 중 하나를 타고 가렴!”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고 혜연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떴다. 마차에 오른 후 엽연채는 벽에 기대어 잠시 눈을 붙였다. 그녀가 말할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안 혜연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여러 질문을 그대로 삼켜 버렸다.

* * *

정안후부에 도착하자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엽연채와 혜연이 궁명헌으로 들어서자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추길이 그들을 향해 뛰어왔다.

“아가씨, 왜 벌써 돌아오신 거예요? 절에서 이틀간 묵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향불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워서 돌아오신 거야.”

혜연이 말했다.

“얼른 가서 씻을 물 좀 준비하라고 해.”

“알겠어.”

추길이 물러갔다.

이각쯤 지나자 물이 준비되었다. 세수와 양치질을 마친 엽연채는 추길이 소청에서 밥상을 차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오늘 주방에서는 엽연채의 식사를 준비해 놓지 않았지만, 똑똑한 추길은 엽연채가 돌아오자마자 경인에게 밖에 나가 전에 자주 사던 찬거리를 사 오라고 했다.

“아가씨, 식사하고 쉬세요.”

식사를 한 상 가득 차린 추길이 어두워진 하늘을 쳐다보며 불평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곧 술시戌時(저녁 7시~9시)인데 공자님께서는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궁명헌의 식사시간은 유시酉時(오후 5시~7시)였고 엽연채가 시집온 후 대략 보름 동안 주운환은 매일 일정한 시각에 식사를 하러 왔다. 엽연채는 조그마한 둥근 걸상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가씨, 피곤하시죠? 먼저 드세요!”

혜연이 권하기 무섭게 추길이 알려 왔다.

“공자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엽연채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드니 주운환이 달빛을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평소에 자주 입는 연청색 도포를 입고 있었으나 검은 머리칼은 번개라도 맞은 사람처럼 마구 헝클어져 있었다. 잘생긴 얼굴은 평소처럼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오늘은 왠지 서릿발같이 차갑게 느껴졌다.

“술시가 다 됐는데…….”

추길은 입을 삐쭉 내밀며 은근히 불만을 드러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선 주운환이 온몸에서 서늘한 기운을 발하는 탓에 추길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도포를 걷어 올리고 자리에 앉은 주운환은 싸늘한 눈빛으로 추길과 혜연을 쓱 쳐다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여기서 시중들 필요 없으니 밖으로 나가거라!”

“저…….”

추길이 얼빠진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려 하자 혜연이 그녀를 잡아당겼다. 무표정한 엽연채의 얼굴을 본 추길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혜연과 함께 물러난 후 소청의 문을 닫았다.

방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한쪽에 놓인 촛불이 등갓을 뚫고 방에 놓인 기물들을 따스한 담황색으로 물들였음에도 엽연채는 방 전체에 싸늘한 냉기가 감도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별안간 주운환이 젓가락을 들더니 표고버섯을 집어 그녀의 밥그릇 위에 올려 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입꼬리를 살짝 당기며 말했다.

“지체 높은 가문의 귀한 여식께서 어찌 나무 위에 올라가신단 말입니까?”

“어제 제가 오늘 함께 외출하자고 말씀드렸더니 공자께서는 시간이 없다고 하셨죠. 그런데 아까 사찰에서 공자님을 본 겁니다. 대체 어떤 벗을 만나기에 사찰에서 만나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공자께서 어떤 아가씨와 밀회를 하시는 줄 알고 뒤를 따라가 본 겁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밥을 먹으며 대화를 나눈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전에는 아무 말 없이 그저 묵묵히 수저를 놀릴 뿐이었다.

그러자 주운환이 ‘허’ 하며 냉소를 날렸다.

“아가씨와 밀회를 한 게 아니라 실망시켜 드렸겠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비꼬는 말에 엽연채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말을 거의 안 하시더니 말마다 가시가 돋아 있어서 그러셨나 보네요?”

“그래서요?”

주운환은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리깐 후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셨는데요? 나긋나긋해서 소저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소저께 빌붙어서 살아가는 하찮은 인간으로 생각하셨는가 보죠?”

엽연채의 아리따운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

“이렇게 된 거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합시다.”

순간 멍해진 엽연채는 매정한 어조로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신분이 낮은 저에게 시집온 건 절 이용해 장씨 가문에서 보낸 가마를 피하려는 것뿐이었겠죠. 그리고 자신이 현명하다고 자만하며 혼수도 넘치게 가져왔으니, 이리와 호랑이가 도사리고 있는 이곳 주씨 가문을 두려워하지 않았을 테고요. 그러나 소저께서는 아직도 자신이 어떤 처지인지 잘 모르고 계십니다!”

엽연채는 조용히 그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주씨 가문에서 지내는 건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면서 어머님과 큰형수의 괴롭힘에 어떻게 대응할지 궁리하기 전에 소저께서 어떤 사람에게 시집왔는지부터 먼저 알아보시죠!”

말을 마친 그는 음산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전 서자에 불과합니다. 비천한 신분이죠. 그러니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뭔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이었다. 그렇다. 주운환은 서자였다. 모든 이의 핍박과 멸시를 받고 자란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주종과와 마찬가지로 야심이 가득한 사내였다. 그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자신이 남들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다만 노력의 방향이 달랐을 뿐이었다.

주운환이 자신의 남편이라는 이유로 그가 특별하고 남들과는 다르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었다. 자신에게 적당히 맞춰 주기 위해 제 분수에 만족하고 고분고분 얌전히 지내며 이쪽의 뜻대로 움직이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엽연채는 고개를 숙이곤 살짝 미소를 짓더니 경직되어 있던 어깨의 긴장을 풀며 말했다.

“제 잘못이었네요. 셋째 공자님께 폐를 끼쳤어요.”

“네, 확실히 폐를 끼쳤죠.”

주운환은 엽연채의 말을 반복했다. 그는 지금까지 주씨 가문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머님과 큰형수님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인들조차도 상대하기 귀찮아하는 존재. 그러나 투명인간처럼 칩거한 채 이 수모를 참아 내고 있었기에 하고자 하는 일도 편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엽연채를 아내로 맞이한 후부터 어머님은 자신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봤고, 서자인 형님도 수업할 때 괜히 핑계를 대 가며 트집을 잡고 성가시게 굴었다. 최근 할머니께 혼쭐이 났기에 감히 대놓고 수작을 부리지는 못했지만, 어머님은 사람을 보내 하루 종일 자신을 주시했다.

자신이 집 밖을 나서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사람들이 자신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켜 엽씨 가문 장남의 적녀를 아내로 맞은, 한마디로 말해 하늘에서 뚝 떨어진 떡을 잡아챈 주씨 가문 서자라고 일컬었다.

창피를 당하든 말든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렇게 지내 왔으니 말이다. 골치 아픈 건 바로 하는 일에 방해가 된다는 점이었다.

엽연채는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저와는 계속 부부로 지내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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