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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31화 (31/858)

제31화

이때, 검은 옷을 입은 종복이 걸어오더니 몸을 낮추고 양왕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닥거렸다. 싸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잘생긴 양왕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그는 곧 이를 악물었다.

“응수죽, 이 쓸모없는 놈.”

백옥 잔을 들고 있던 주운환의 손이 멈칫했다.

“응 시랑侍郎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보고를 하던 종복이 말했다.

“공자님께서도 아시겠지만 병부상서兵部尚書가 곧 사직합니다. 양왕 전하께서는 좌시랑左侍郎 응수죽 대인을 후임자로 적극 천거하셨습니다.”

그러자 주운환이 말했다.

“능력으로 따지면 우시랑右侍郎 오봉이 더 뛰어날 텐데요? 작년에 그자가 군사개편을 제시했을 때 황제 폐하께서 그것을 채택하지는 않으셨어도 크게 칭찬하셨잖습니까.”

양왕의 고상한 눈에서 순간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인재지.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난 문무를 겸비한 장수가 사십이 다 되어서야 기회와 인연을 만나게 되었고 말이야. 안타깝게도 태자의 사람이지만.”

나무 위에 있던 엽연채는 소리 없이 하늘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이야기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잖아! 앉을 때만 해도 유유자적 술 마시며 운문韻文을 읊겠다더니 왜 안 하는 거야? 어째서 화본에서 봤던 간당奸黨(간사한 무리)을 따르고 모반을 꾀하는 반신叛臣들이랑 아주 흡사한 분위기냐고?’

“방금 전 양춘의에게서 소식이 왔는데 황제 폐하께서 붉은 붓을 들고 동그라미를 치며 오봉으로 낙점했다고 합니다.”

양왕은 뼈마디가 선명히 드러나는 손가락으로 상 위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응수죽이 못 오르면 오봉도 승직해서는 안 되지.”

그러자 종복이 말했다.

“전에 오봉이 자기 처남이 토지를 불법으로 착복하고 양민들을 핍박한 것을 눈감아 준 일을 막료들이 밝혀내지 않았습니까? 언관들이 어제 그 문제를 탄핵했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오봉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걸까요?”

이에 양왕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없는 법이지. 황제 폐하께 필요한 사람이니 언관들이 탄핵을 한 게 뭐 그리 대수겠더냐? 처남과 연을 끊기만 하면 폐하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시겠지.”

그러자 주운환이 말했다.

“전하, 그럼 궁녀들에게 소문을 퍼뜨리라고 지시하면 어떨까요? 오봉의 처가 황후 마마를 세 번이나 만나 뵙고 자기 여식을 태자 측비側妃 후보에 올렸다고 말이죠.”

양왕은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것참 좋은 생각이구나!”

“정말 오봉을 남겨두지 않을 생각이신지요?”

“수차례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모두 거절하더니 스스로 태자를 찾아갔지. 내 사람이 되지 않는 자는 반드시 없애 버려야 한다!”

주운환에게 단호하게 대답하는 양왕의 고상한 눈동자에서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주운환도 그에 동조했다.

“그러는 편이 더 낫죠.”

두 사람은 가까이 붙더니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은 어떻게 제거하고 자기 사람에게는 어떻게 길을 마련해 줄 것인지, 또 태자는 어떻게 견제할 것인지 등에 대해 속닥거리며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무 위에서 아래에 있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엽연채는 이제 온몸이 마비돼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감히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전신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고 가슴은 차갑게 식는 것 같다가도 다시 쿵쿵 뛰며 벌렁거렸다. 나무 아래서 한참 말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흥이 올랐는지 술잔을 부딪쳤다.

“역시 본왕과 마음이 제일 잘 통하는 사람은 운환뿐이구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주운환은 술잔에 든 술을 싹 비웠다. 양왕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날이 슬슬 어두워지는구나.”

나무 위에서 숨죽이던 엽연채는 이 말을 듣고는 심장이 다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바로 그때였다.

“누구냐!”

한쪽에 서 있던 시위가 큰 소리로 호통쳤다.

“크흥…….”

깜짝 놀란 엽연채는 숨이 막히는 바람에 콧소리를 냈고, 안 그래도 경직되어 있던 몸은 균형을 잃고 그대로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철퍼덕’ 소리를 내며 황폐한 좌원 앞에 떨어진 엽연채의 눈앞에 별이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엽연채는 이내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다 허물어진 담벼락 쪽으로 달려가 구멍을 비집고 나갔다. 구멍을 통과해 막 뜀박질하려는 순간, 엽연채는 그 자리에서 그만 온몸이 굳어 버렸다.

검은 옷을 입은 시위가 손에 칼을 들고서는 싸늘한 얼굴로 한 걸음 한 걸음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냐?”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양왕이었다. 양왕과 주운환은 앞뒤로 서서 걸어오고 있었는데, 엽연채의 얼굴을 본 주운환은 어안이 벙벙해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어둡고 창백해진 얼굴을 한 채 저도 모르게 옷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보아하니 예불을 드리고 향불을 피우러 온 귀족 아가씨인 듯합니다.”

검은 옷의 시위는 죽은 이를 보는 듯한 스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양왕은 새파랗게 질린 엽연채를 쳐다봤다. 그녀의 특출나게 아름다운 얼굴을 보곤 다소 놀라워했지만, 조금도 측은해하지 않고 이내 차디찬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죽여라!”

그 말이 귓가에 울리자 엽연채의 머릿속에선 굉음이 울렸고 온몸의 피가 조금씩 차갑게 식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두려움에 그 자리에서 석상이 되어 버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주운환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굳힌 채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엽연채는 얼음 창고에 떨어진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앞으로 다가선 검은 옷의 시위가 칼을 휘두르자 허공을 가르며 일으키는 서늘한 바람이 엽연채의 얼굴에 확 느껴졌다. 놀란 그녀가 두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엽연채에게 칼날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운환.”

양왕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는 그제야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주운환이 자신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고선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제 앞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운환아,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양왕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는 주운환이 막아 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주운환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전하, 이 사람은 제 내자內子(남 앞에서 자기 아내를 이르는 말)입니다.”

“내자라고?”

양왕은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이내 입꼬리를 올리며 매정한 웃음을 지었다.

“아, 이 아가씨가 새신랑이 도망가서 어쩔 수 없이 신분이 낮은 너에게 시집온 그 정안후부 적장녀로구나?”

“예.”

주운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없애야 한다.”

양왕의 눈에 담긴 살기는 수그러지지 않았다.

“아니 되옵니다.”

주운환은 엽연채를 잡아끌더니 무릎을 꿇고 자비를 빌었다.

“용서하십시오, 전하.”

“주운환, 네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고 이리 행동하는 것이냐?”

양왕의 수려한 얼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고 눈빛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어찌 모르겠는가? 자신들이 지금까지 좌원에서 나눈 이야기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불충과 역심, 조정의 세력, 태자와 황제 주변의 염탐꾼에 관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언급했다. 어떤 정보는 양왕의 막료조차도 모르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이 하나하나 그녀의 귀로 흘러든 것이다.

설령 그녀가 비밀을 엄수한다 하더라도 실언이라도 해 조금이라도 이 이야기를 흘렸다간 다 함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를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이었다.

엽연채를 본 순간, 주운환은 그녀의 말로를 떠올렸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이 처리 방법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시위의 칼날이 그녀를 향하는 순간 주운환은 머리가 멍해졌다.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칼을 든 시위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양왕은 주운환의 대답이 ‘알고 있습니다.’일 거라곤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지더니 뼛속을 파고드는 듯한 싸늘한 시선으로 엽연채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이름이 무엇이냐?”

엽연채는 아직도 새파랗게 질린 채였으나 묻는 말에는 또박또박 답했다.

“엽연채입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

“열다섯입니다.”

그녀는 핏기를 잃었음에도 여전히 아리따운 얼굴을 살짝 숙이고 있었고, 위로 말린 기다란 속눈썹이 눈꺼풀에 흐릿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채 두려움에 떨면서도 자세는 곧게 유지했다.

보통의 소녀들이라면 놀라고 당황하여 눈물을 쏟고 눈알을 굴릴 텐데, 그런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이에 양왕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으나 그는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영특한 아이 같구나. 주관도 있고, 배짱도 있는 것 같고.”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엽연채는 그의 차가운 말투에서 ‘그러니 더더욱 살려둘 수 없다!’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최근 도성의 정세를 떠올렸다.

황제의 슬하에는 총 네 명의 황자가 살아 있는데, 바로 1황자 노왕魯王, 태자인 3황자, 4황자 양왕梁王, 5황자 용왕容王이었다. 그중 양왕의 처지가 가장 난감했다. 그의 생모는 소 황후였는데 소씨 가문이 적과 내통해 반역을 일으켰다는 죄로 폐위되어 소 미인으로 강등됐다.

황제는 양왕을 임신하고 있는 소 미인에게 첫째 공주를 데리고 동주桐州로 가 선황제의 능을 지키라고 명했다. 그리고 이듬해 봄, 소 미인은 동주 땅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양왕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소씨 가문의 이적 행위 및 반역 사건에 억울한 사연이 있었음이 밝혀지며 누명이 벗겨졌고, 황제는 이에 크게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하여 ‘죄이조罪已詔’를 내려 소씨 가문과 관원 및 백성들에게 사죄했다. 또 세상을 떠난 소 미인을 다시 황후로, 소씨 가문 선열들을 왕에 추서했고, 양왕을 도성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궁에는 이미 정 황후가 있었고 3황자가 태자로 책봉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양왕은 생모와 외척을 잃었으니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태자는 명성과 위세가 드높았다. 밖으로는 외척이 군대를 주둔시켜 대제大齊와 요새를 지켰고 안으로는 조정의 고굉지신股肱之臣(황제의 신임을 받는 중신)인 처족妻族이 도움을 주고 있었다.

더군다나 최근 황제의 옥체가 미령하여 좋아졌다 나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태자가 조정을 돌보고 관원과 백성들은 성심을 다하여 순종하고 있으니 판세는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짧으면 3년에서 길면 5년이었다. 황제가 붕어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태자는 순조롭게 보위에 오르게 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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