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주운환의 뒤를 따라가던 엽연채는 그가 일부러 외진 길을 골라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젯밤 함께 외출하자고 하니 벗과 선약이 있어 안 된다고 딱 잘라 거절했으면서, 벗을 주루酒樓나 요릿집이 아닌 사찰에서 만난다고?
불쾌했던 전생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바로 자신이 병으로 몸져누웠을 때의 기억이었다. 회임한 엽이채가 기분이 울적하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찾아오더니 담소를 나눈답시고 자신의 과거사를 늘어놓았다.
“언니, 저랑 장박원이 어떻게 만난 줄 알아요? 사실 언니가 우리의 사랑을 맺어 준 다리 역할을 했어요! 제가 열세 살이던 그해 유월 초에 언니가 서운사에 탑이 지어졌으니 함께 보러 가자고 했죠. 전 하나도 관심이 없었는데 언니가 기어코 절 끌고 갔던 거 기억나요?
그날 사찰에서 우연히 어머님과 장박원 일행을 만났죠. 언니와 어머님이 대웅보전에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전 눈치를 보다가 빠져나와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요. 그러다 그만 발을 삐끗했는데 장박원과 마주친 거예요. 그 사람이 절 부축해서 방으로 데려다주지 뭐예요.
처음에는 정말 어색했는데 이야기를 나눠 보니 마음이 잘 통하더라고요. 언니가 어머님과 보전에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저는 방에서 장박원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던 거죠.”
말을 마친 엽이채는 부끄러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그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에게 중독이라도 된 듯이 틈만 나면 서운사에서 몰래 만났고, 그러면서 서로에 대한 감정이 점점 깊어졌다고 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연정을 주체 못해 은밀히 만남을 이어갔다고 말이다.
그때부터 엽연채는 사찰에 혐오감이 들었고, 사찰을 신성하고 엄숙한 예불 공간이 아니라 남녀들이 밀회를 즐기는 방탕한 장소로 여기게 되었다.
물론 환생을 한 후로는 신비롭고 기이한 일을 믿게 됐지만, 그럼에도 사찰에서의 밀회는 그녀에게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겼기에 아무리 잊어 보려고 해도 잊히지가 않았다. 오늘도 어머니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아 온 것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에 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주운환이 번화한 주루나 요릿집이 아닌 굳이 교외의 사찰에서 벗을 만나고, 거기다 수상쩍게 인적이 드문 길만 골라서 걸어가고 있으니 엽연채의 마음은 절로 무거워졌다.
설마 오늘 이곳에서 여인과 밀회를 하는 걸까? 전생의 자신은 사랑하는 두 남녀를 갈라놓는 역이었다. 설마 이번 생에도 또 그런 역할인 것은 아니겠지? 엽연채는 점점 더 마음이 괴로웠고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오해하는 걸지도 몰라. 친한 벗이라는 사람이 사실 스님일 수도 있잖아. 그런지 아닌지는 가서 확인해 보면 돼. 만약 밀회를 하는 것이라면 속히 대응책을 세워야겠지. 안 그러면 전생에서처럼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당할 거야. 반격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겠지.’
앞에서 걷던 주운환은 모퉁이를 돌자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내밀어 보니 모퉁이 뒤는 막다른 골목이었는데, 그곳에는 맞닿은 좌원坐院 두 곳밖에 없었다. 주운환은 앞쪽에 위치한 좌원으로 들어갔는데, 키가 크고 건장한 사동 둘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엽연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상대가 지체 높은 가문의 여식인 건가? 아니면 대갓집의 귀부인?’
엽연채는 마음이 답답하고 초조해서 고양이처럼 몸을 긁어 대고만 싶어졌다. 주저하던 엽연채는 주운환이 방금 들어간 좌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끝자락의 다른 좌원을 향해 두 눈을 번뜩였다. 이 좌원들은 외진 곳에 위치해 참배자들은 이곳에서 묵기를 꺼려했다. 특히 맨 끝에 위치한 저 좌원은 더더욱 말이다.
맨 끝에 위치한 좌원은 불길한 장소로 여겨졌다. 저곳에서 사람이 묵으면 넘어지거나 다치는 등 늘 사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저 좌원이 마침 사찰의 상문傷門(길흉을 판단하는 팔문八門에서 흉하다고 여겨지는 문임)에 위치해 터가 안 좋고, 살기가 강해 부처님의 광명이 보호해 준다 하더라도 죽음만 면하는 게 고작이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그런 소문이 퍼졌으니 저곳에서 묵어가고자 하는 참배객은 당연히 없었다. 사찰에선 아예 좌원을 폐쇄해 버렸다.
전생에서 온씨가 세상을 떠난 후, 엽연채는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병든 몸을 이끌고 법화사에 가서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그런데 장씨 가문은 사찰에 부탁해 그녀가 묵을 곳으로 저 불길한 곳을 배정해 달라고 했다. 그녀에게 불길한 기운이 가득하니 불길한 기운은 불길한 기운으로 제압해야 한다며 말이다.
그렇게 그곳에 머물게 된 엽연채는 혜연과 추길에게 꼼꼼히 청소하라는 분부를 내렸다. 추길은 주변을 정돈하던 중에 무성한 수풀로 가려진 뒤쪽 담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사람이 안팎으로 비집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추길은 이 일로 길 안내를 해 주는 승려에게 한바탕 난리를 쳤고 그러고 나서야 엽연채는 다른 곳에서 묵을 수 있었다.
엽연채가 기억을 곱씹으며 뒤쪽 담을 돌아 들어가 수풀을 헤쳐 보았다. 그 자리에는 아직도 구멍이 있었다. 그녀는 조그마한 몸으로 그곳을 비집고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기억 속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었다. 황폐한 좌원 주위로는 잡초가 무성했고 좌원 바로 옆에 있는 높은 담벼락 부근에는 크고 튼실한 대추나무가 서 있었다. 그리고 대추나무의 가지는 옆에 자리한 좌원 쪽으로 곧게 뻗어 있었다.
엽연채는 속으로 환호했다. 그녀가 찾던 것이 바로 이 나무였다. 낑낑거리며 나무 위로 올라가니 옆 좌원의 풍경 일부가 눈에 들어왔다. 정교하기 그지없는 돌의자와 돌탁자가 보였으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돌아가서 문을 두드려 봐? 아니면 내일 사람을 시켜 조용히 뒤를 밟으라고 할까?’
고민하던 엽연채가 돌아가려는 순간,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최근 들어 그자에게서 연락이 왔느냐?”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낮고 묵직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는데 이 목소리는 엽연채가 아는 목소리였다. 바로 남편 주운환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숙인 채 자세히 보니 두 사내가 앞뒤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뭇잎이 앞을 얼마간 가리고 있어 엽연채는 그들의 가슴 아래만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엽연채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남편은 여인이 아니라 진짜 벗을 만나고 있었던 것이다.
엽연채는 즉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내가 오해했네!’
그러나 그녀는 이내 입을 삐죽거렸다.
‘그러길래 누가 몰래 벗을 만나라고 했나? 떳떳하지 못한 짓을 벌이는 사람처럼 말이야! …음, 그렇다곤 해도 어쨌든 생사람을 의심한 건 잘못한 거지. 앞으로 끼니때마다 닭다리를 하나씩 더 올려 줘야겠어.’
어쨌든 남편이 어느 집 소저나 부인과 밀회를 즐기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님을 확인했으니, 엽연채도 더 이상 남의 이야기를 엿듣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려다 나무 위에서 인기척이라도 내면 필시 저쪽의 시선을 끌게 될 것이었다.
‘그런 난처한 처지를 자처할 수는 없지.’
결국 그녀는 나무 위에 가만히 엎드린 채 그들이 떠나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아래에 있는 주운환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여기 경치가 참 좋네요.”
그러자 사내가 동조했다.
“참 근사하지. 언동아, 가서 술 좀 가져오너라.”
그러더니 앉아서 천천히 술맛을 음미하며 경치를 즐기고 운문韻文을 읊으며 인생 철학을 논하려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엽연채는 하마터면 나무 위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이런 식으로 아내를 곤경에 빠뜨리는 남편이라니, 이러다 정말로 저들에게 들키게 되면 자기도 함께 망신을 당할 텐데.
그러나 이런 엽연채의 애끓는 마음을 눈곱만큼도 모르는 두 사람은 아예 돌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엽연채는 그제야 그 벗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 엽연채는 놀라고 말았다.
스물서넛 정도로 보이는 그 사내는 이무기가 수놓아진 짙은 자주색 비단 도포를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옥대를 두르고 금록석金綠石(햇빛 아래서는 녹색, 백열등 아래에서는 적색으로 변화는 것이 특징인 알렉산더 보석) 궁조宮絛(패옥佩玉 따위의 길게 늘어뜨린 장식물을 뜻함)를 달아 맵시를 살렸다.
어깨를 따라 흘러내린 흑옥 같은 긴 머리칼을 따라 시선을 올리면 풍류가 느껴지는 수려한 얼굴이 자리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가늘고 긴 눈은 차가운 빛을 번뜩이고 있었고 입꼬리에는 싸늘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그는 온몸으로 ‘존귀’라는 두 글자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 함께 앉아 있는 주운환은 그의 풍채에 압도당하기는커녕 희고 밝은 달처럼 눈부시게 빛났고, 동시에 안개 물방울이 흩날리는 것 같은 정결하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때, 시위 복장을 한 사람이 술 주전자와 백옥 유리잔 두 개를 들고 걸어와 상 위에 올려놓았다. 존귀해 보이는 사내가 직접 술 주전자를 들고선 잔에 술을 따랐다. 주운환이 잔을 들어 올리자 투명하고 맑은 술이 찰랑거렸다.
“양왕梁王 전하, 이건 무슨 술이옵니까?”
나무 위에 있던 엽연채는 기겁했다. 사내의 신분이 범상치 않다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설마 그 명성도 자자한 양왕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는 도성 제일의 미남이라고 칭송이 자자한 4황자였다.
과연 그 명성을 헛되이 하지 않는 찬란한 외모였으나, 지금 보니 엽연채의 남편도 그 명성을 두고 겨룰 수 있을 만큼 수려했다. 그러나 주운환은 주목받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여태 그런 찬사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신분 격차가 어마어마한 두 사람이 어떻게 교분을 맺었을까?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사소한 궁금증에 목맬 때가 아니었다. 두 사내의 분위기가 묘했다. 그녀는 그들 사이의 일을 알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거기다 엎드린 자세를 오래 유지하자니 온몸이 저려와 얼른 돌아가서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양왕이 대답했다.
“북연北燕에서 보내 온 상락주桑落酒(수수, 완두, 녹두 등을 주재료로 한 바이주)다.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술까지는 아니다만, 새로운 것을 마셔 보고 싶어 가져왔지.”
주운환이 한 모금 들이켜더니 감탄했다.
“입 안에 들어가자마자 순하고 달콤한 향을 풍기며 끝에는 짙은 잔향이 남는 게 제법 괜찮습니다.”
“입에 맞나 보구나. 내 거처에 한 동이가 더 있으니 너에게 주마. 그건 그렇고 최근 네 쪽에서는 무슨 소식이 있느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니 차분히 좋은 소식을 기다리시면 됩니다.”
나무 위에서 이야기를 듣던 엽연채는 놀라서 얼이 빠졌다.
‘…어째서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