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그럼 이따가 각 처소에 들러서 혼수를 꼼꼼히 확인하겠습니다.”
손씨의 말에 묘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늦었으니 이만 돌아들 가거라!”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엽승신 내외와 엽이채는 얼른 가서 혼수를 점검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그들이 온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간 반면, 엽미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본 엽연채가 말했다.
“나중에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내가 채워 줄 것이니 조급해 말거라.”
코를 훌쩍이던 엽미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큰언니.”
온씨는 둘째네 식솔들이 득의양양해 설쳐 대는 꼴을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안녕당을 나온 온씨는 딸과 함께 영귀원을 향해 걸어가면서 손씨에게 욕을 퍼부었다.
“손씨 그 천한 것이! 뭐? 혼수를 조금도 모으지 못했다고? 집안 여식들의 혼수는 이미 다 분배되었는데 엽이채가 기어코 그 난리를 쳐서 혼수를 가져가면서 대체 누구를 탓하는 거야?
방금 전에 내가 아무 말도 못했던 건 엽이채의 혼수가 너한테 갔기 때문이다. 괜히 아버님께서 그 사실을 다시 떠올려 네가 또 미움을 살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다행히 손씨도 그 생각을 못해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만약 꺼냈다면 아버님이 널 또 얼마나 미워하시겠니.”
“감히 그 이야기를 꺼낸다면 저도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 걔 혼수를 제가 귀하게 여기기라도 해야 한답니까?”
딸의 거침없는 태도를 보며 온씨는 또다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말은 너와 나만 있을 때는 해도 되지만, 다른 사람들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아니꼬워도 지금은…….”
대세는 이미 기울었으니 지금으로서는 꼬리를 내리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다.
“앞으로는 성질 좀 죽이고 나긋나긋하게 행동하거라. 그들에게 네가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만약 장씨 가문에서 작정하고 괴롭히려 든다면 네 남편 처지가 더욱 곤란해질 거야.”
엽연채는 말없이 냉소를 지었다.
‘장씨 가문이 엽이채를 도와 주씨 가문을 압박할 거라고요? 그 일이 생기면 아마 제 앞가림하기도 바쁠 건데요!’
엽연채는 그 시간에 자기 가족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첩실을 상대할 방법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 내야만 했다. 만약 정말 안 되겠다 싶으면 어머니라도 빼내 와야 하니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그건 그렇고, 오늘 네 남편은 왜 같이 오지 않은 것이냐?”
온씨는 이 말을 꺼내는 게 별로 내키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주씨 가문 셋째 공자, 즉 자신의 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언제까지고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한 번쯤은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오늘 분명 한바탕 난리가 날 것을 알고 있었어요. 무슨 좋은 일이라고 그 사람을 데려오겠어요. 다음에 데려올게요!”
엽연채의 대꾸에 온씨는 입을 오므리고는 생각했다. 딸의 말이 옳았다. 지금 엽이채 식구들은 제 뜻대로 일이 풀려 한창 기고만장해져 있는데, 이런 때 주씨 가문 셋째 공자를 데려왔다면 그들은 그 앞에서 자신과 딸을 조롱하며 못살게 굴었을 것이다.
온씨는 잠시 더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면 이렇게 하자꾸나. 내일이 보름이라 법화사法華寺에 가서 예불을 드릴 참이었다. 너도 네 남편과 함께 나오거라. 성 밖에서 만나자꾸나.”
“네, 그럴게요.”
* * *
엽연채는 점심을 먹은 후 마차에 올랐다. 푸른 덮개를 씌운 조그마한 마차가 왁자지껄한 대로를 지나갈 때, 답답했던 엽연채는 줄곧 마차의 발을 걷어 올려 두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로를 휘둘러보던 엽연채는 순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낯익은 형체가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저기 셋째 공자님 아니냐?”
“네? 어디요?”
엽연채의 말에 혜연이 다가서며 되물었다.
“저기 골목으로 들어가는 사람 말이다.”
“내려서 한번 찾아볼까요?”
엽연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다. 가자꾸나! 진귀루에 가서 맛있는 거나 사 가지고 들어가자꾸나!”
마차는 진귀루로 향했다. 경인이 내려 먹을 것을 사 온 후에 엽연채 일행은 주씨 가문으로 돌아갔다. 엽연채가 옷을 갈아입고 잠시 화본話本(민간의 구두연예口頭演藝였던 설화의 원본을 뜻함)을 보는 동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여 혜연과 추길은 밥상을 차렸다. 그때 주운환이 안으로 들어오자 엽연채가 고개를 들며 인사했다.
“오셨군요.”
그녀는 나한상에서 몸을 일으킨 후 소청으로 걸어갔다.
“오늘 친정에 갔다 오는 길에 큰길에서 공자님을 보았습니다.”
주운환은 도포를 걷어 올린 후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극을 보러 회방루懷芳樓에 갔었습니다.”
“극을 좋아하세요?”
엽연채는 살짝 놀랐다. 주운환은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처럼 보여 그런 시끌벅적한 곳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아합니다.”
이에 엽연채는 엷게 미소 지으며 말을 받았다.
“도성에서 가장 유명한 극단을 꼽자면 역시 덕명극단이지요. 언제 한번 같이 가서 함께 봐요.”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엽연채는 이어서 말했다.
“아 참, 내일 함께 외출하는 건 어때요?”
“내일이요?”
주운환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다른 날은 안 될까요?”
그러자 엽연채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바쁘신가요? 내일 저희 어머니께서 외출하시는데 공자님을 모셔오라고 하셨거든요.”
이를테면, 사위가 처음으로 장모를 만나는 중요한 날이었다. 그러나 주운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재차 거절했다.
“내일은 벗과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어 취소하기 힘들어요. 기왕 장모님을 뵙는데 며칠 후에 선물을 준비해서 뵈러 가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엽연채는 심기가 언짢아 냉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가 중간에서 제 역할을 못했으니 별수 없죠. 공자님께서 시간이 없을 줄은 모르고 어머니께 그러겠다고 대답부터 했어요. 그럼 다음에 어머니를 뵈러 가요!”
추길은 온씨를 쉽게 여기는 듯한 주운환의 말을 듣고선 화가 치밀어 올라 장주자醬肘子(돼지 앞다리 조림)가 담긴 접시를 ‘탕’ 소리를 내며 상 위에 올려놓았다.
주운환은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상 위에는 재료를 넉넉히 쓴 백채소육사가 올려져 있었고, 그 외에도 두 가지 요리와 국이 차려져 있었다. 장주자와 청증계화어, 국 모두 엽연채가 밖에서 사 온 것들이었다.
부부는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엽연채는 추길에게 정안후부로 가서 온씨에게 말을 전하라고 했다. 주운환이 공교롭게도 고뿔에 걸려 내일은 나갈 수 없다고 말이다.
엽연채가 목욕을 마칠 무렵 추길이 돌아왔다.
“마님께서 이미 법화사에 방을 잡아 두었다고 하셨습니다. 사위가 못 오는 건 괜찮으니 내일은 모녀가 함께 바람이나 쐬자고 하셨어요. 그리고 마님께서 아가씨를 데리러 오실 것이니 따로 마차를 빌릴 필요 없다고 일러주셨어요.”
엽연채는 입꼬리를 곱게 당겼다. 오랜만에 바람 좀 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머니 온씨 역시 집 안에 콕 박혀 손씨네가 잘난 척하는 꼴을 보는 편보단 훨씬 나을 테니까.
엽연채는 혜연을 시켜 내일 예불을 드리러 외출한다고 진씨에게 알렸고, 엽연채 이름만 들어도 속이 메스꺼운 진씨는 알겠다는 말만 하고선 서둘러 혜연을 보내 버렸다.
* * *
다음 날 아침, 엽연채와 혜연은 외출하고 추길은 궁명헌에 남아 집을 보기로 했다. 서쪽 측문으로 나가자 멀지 않은 곳에 마차 두 대가 앞뒤로 세워져 있었는데, 그중 한 마차의 창문에 엽영교가 얼굴을 대고 밖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고모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다.
“왜, 난 오면 안 되니?”
엽영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집에 더는 못 있겠어. 그래서 이리 나왔지!”
그러자 엽영교의 여종 옥패가 말을 덧붙였다.
“큰마님께서 예불을 드리러 외출하신다는 말씀을 들으시고는 아가씨께서도 바람 쐬러 나가고 싶다고 하시는 거예요. 주인마님께서 붙잡아 두려고 하셨지만 씨알도 안 먹혔죠!”
이 말을 들은 엽연채는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성 밖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한 시진쯤 지나 법화사에 도착했다. 모두 마차에서 내려 먼저 거처에 가져온 짐을 푼 다음 대웅보전으로 이동했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면 법화사의 주지스님이 대웅보전에서 경전을 설법했고 신도들은 부들방석 위에 앉아 선법禪法(경론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부처님의 심인을 전해 주는 방법)과 경전 강의를 들었다. 꼬박 한 시진을 들으니 오전에 읽는 경문經文이 마무리되었고, 사람들은 제각각 거처로 돌아가 공양을 드렸다.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있었던 엽연채와 엽영교가 일어나지 못하자 여종들이 그녀들을 부축해 보전 밖으로 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법화사에 오지 말걸 그랬네.”
엽영교는 절뚝절뚝 계단을 내려가며 작은 목소리로 불평했다.
“법화사에서 경전 강론을 한 시진이나 할 줄이야. 서운사는 반 시진 하면 쉬는데.”
“법화사가 더 영험해서 그렇겠죠. 명성도 더 높고요.”
엽연채의 이 말에 엽영교는 놀란 듯 물었다.
“너 정말 그 이야기를 믿어?”
“왜 안 믿겠어요?”
예전에는 엽연채도 이런 오묘한 것은 믿지 않았다. 하지만 환생을 한 후로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 오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건하고 성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이리 오래도록 꿇어앉아 있을 인내심 따윈 없었을 것이다.
“둘이 뭘 그리 속닥거리는 거예요?”
앞에서 걸어가던 온씨가 고개를 돌려 물었다.
“설마 대사大師님을 흉본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요!”
딱 걸린 엽영교가 얼른 온씨의 말을 부정했다.
“저희는 이곳 풍경이 점점 아름다워진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새언니도 참…….”
엽연채는 엽영교가 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하품을 했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 사이로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그 호리호리한 뒷모습의 주인은 뜻밖에도 주운환이었다. 엽연채는 어안이 벙벙했다.
‘어째서 저 사람이 여기 있는 거지? 오늘 분명 시간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엽영교를 보고 온씨와 여종들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들은 엽연채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엽연채의 시선은 멀어져 가는 주운환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그 뒷모습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