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던 엽이채와 손씨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더는 듣고 있기 힘들었다.
엽연채는 지금 가난에 찌들었다는 둥 몰락한 가문이라는 둥 그런 소리를 지껄이며 자기 혼수를 가져가면 액운이 낄지도 모른다고 지금 은근히 위협하는 것이었다. 거기다 말끝마다 ‘빼내 간다’라는 소리를 해 대니 귀에 심히 거슬렸다.
엽이채는 부끄러운 나머지 성을 내며 말했다.
“전, 전 언니 혼수가 필요하다는 말을 꺼낸 적이 없어요!”
“그래. 네가 남의 물건을 가로채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가로챘다’라고 쐐기를 박는 말에 엽이채는 정신을 차리기도 힘든 지경이 됐다. 땅에 고꾸라질 뻔한 그녀는 정말이지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못된 년, 내가 제 남편을 가로챘다고 또다시 조롱하다니!’
이 상황을 못 견뎌 하는 엽이채의 모습을 보며 엽연채는 속이 다 후련했다.
‘쯧쯧, 이 애송아, 눈치가 있으면 이 언니를 건드리지 말거라! 이 언니는 한번 화나면 정말 무서운 사람이란다.’
엽영교는 조롱 섞인 눈빛으로 곤경에 빠진 둘째 새언니 일가를 구경했고, 나씨 역시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는 척하며 올라간 입꼬리를 감추었다. 온씨는 그들을 가소롭게 여기면서도 부아가 치밀었으나, 눈빛에는 딸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손씨는 열이 머리끝까지 올라 미칠 지경이었다. 엽연채가 온 것을 보고 이 기회에 그녀의 혼수를 빼내 오려고 했는데,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엽연채는 지금 주씨 가문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을 테니, 당연히 친정과 이채에게 기대고 싶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이쪽을 벌하고 싶어도 자신이 도리어 큰 손해를 볼까 봐 그러지 못하고, 혼수를 ‘빌려 달라’고 하면 자신들에게 빌붙고 싶어서라도 감히 안 주고는 못 배길 거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사리 분별을 못하고 혼수를 내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집안 관리에 관해서도 도리어 자신을 몰아붙일 거라곤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했다.
“연채 네가 그리 못하겠다면 우리도 더는 부탁하지는 않으마.”
줄곧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엽승신이 갑자기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다만 이것만은 기억하거라. 앞으로 좋은 일이 있든 힘든 일이 있든 우리 이채는 네게 별 도움이 되진 못할 게다.”
엽승신의 이 말을 듣고, 분노에 이성을 잃었던 손씨와 이 자리에서 쓰러지고 싶은 마음뿐이었던 엽이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다. 의기소침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앞으로 자신들 쪽에 재물이 생길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 지금 자신들은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아첨할 기회를 베푸는 것이었다.
‘너같이 재수 없는 계집애는 필요 없어!’
이런 생각이 들자 엽이채는 미움과 분노가 섞인 눈빛으로 엽연채를 쓱 쳐다봤다.
‘사리 분별 못하는 계집애 같으니라고. 앞으로 내게 아첨하고 싶어져도 너한테는 그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거야!’
그 눈빛을 본 엽연채는 자신이 지금 혼수를 내어주면 곤경에 빠졌을 때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것처럼 말하는 그들의 태도에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엽학문은 싸늘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흘겨봤다. 그의 얼굴에는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온씨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엽이채가 득세를 한 건 사실이니 미워 죽겠어도 그녀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딸은 지금 장씨 가문과 친정 모두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다.
“지금 집안의 공동 재산을 얼마나 끌어모을 수 있느냐?”
엽학문이 말했다.
“혼례식 당일에 붉은 초롱불과 창문 장식에 사용하는 전지 같은 것들을 새로 마련해야 하고, 혼례복과 봉관 등도 새로 마련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제일 돈이 많이 들죠. 그래도 계산해 보니 은화 이천 냥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엽승신의 말에 손씨가 반대하고 나섰다.
“은화 이천 냥으로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 혼수는 은화를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가는 것이니, 설령 돈이 있다 하더라도 짧은 시일 안에 준비하기는 힘들어요.”
“생각해 놓은 방법이라도 있느냐?”
묘씨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생각해 보니, 현재 아가씨와 미채의 혼수가 준비되어 있더라고요.”
나머지 여식들은 아직 나이가 어려 혼수를 준비해 두지 않았다.
“나도 올해 말에 출가하는데 무슨 소리예요!”
엽영교가 크게 성을 내더니 찡그린 얼굴로 엽학문을 쳐다봤다.
“아버지, 둘째 새언니가 제 혼수를 빼내려고 해요!”
딸이 훌쩍훌쩍 우는 소리까지 내자 엽학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막내딸을 많이 아꼈지만, 지금은 대국을 중시해야 할 때였다.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딸을 달랬다.
“영교야, 네 혼사는 아직 반년이나 남았으니 우선 네 혼수를 연채에게 주자꾸나. 조금 있으면 토지세와 집세가 들어올 테니 그걸로 네 혼수를 다시 마련해 주마.”
엽학문이 이렇게 말을 꺼낸 이상 딸의 혼수를 건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묘씨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엽이채는 곧 장씨 가문 며느리가 될 것이니, 지금은 이 아이를 도와주는 게 실보다 득이 더 컸다. 묘씨는 엽학문에게 동조했다.
“사실 저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채의 혼수를 준비해야 하는데 지금 집안 상황으론 어림없죠. 그러니 모두 힘을 합쳐 도와야죠. 하지만 영교는 반년 후면 출가를 해야 하니 전부 내어 줄 수는 없고, 절반만 내어 주는 걸로 합시다. 미채는 아직 어리니 일단 전부 내어 준 후 다시 메꿔 주는 걸로 하죠. 첫째야, 괜찮겠느냐?”
그 말을 들은 온씨는 가슴이 답답했다. 손씨 일가를 씹어 먹지 못해 한스러운 지경인데 어디 혼수를 내어주고 싶겠는가? 하지만 저들이 지금 득세를 했고, 딸인 엽연채는 그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상태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판국에 시어머니는 이쪽 서녀의 혼수를 일단 내어 주라고 하니, 별로 아까울 것은 없으나 전혀 달갑지 않았다. 온씨는 이를 갈며 대답했다.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 말에 낯빛이 창백해진 엽미채는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아직 한참 부족합니다!”
엽미채의 혼수는 얼마 되지 않으니 그걸 더한다고 충분할 리가 없었다. 손씨의 시선이 나씨에게로 향했다. 나씨는 속으로는 욕을 퍼부으면서도 겉으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어머니 묘씨와 큰형님도 혼수를 내어놓는 마당에 자기만 내놓지 않으면 손씨에게 밉보이게 될 터였다.
그녀의 딸은 이제 겨우 열세 살이었기 때문에 규율상 아직 집안 공동 재산으로 마련한 혼수는 없었지만, 사실 혼수가 조금 있기는 했다. 보통 모친이 자기 혼수를 딸에게 물려주기 때문에 딸에게는 어느 정도 준비된 혼수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감히 손씨 일가에게 밉보일 수 없었던 나씨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 드릴 참이었어요. 일단 저희 것도 좀 가져다 쓰시지요!”
그녀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이 말도 덧붙였다.
“다음 분기에 들어오는 토지세로 갚아 주시면 되죠.”
이렇게 말한 건 집안 공동 재산에서가 아니라 개인의 혼수에서 내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히 갚아 줘야 마땅했다.
‘아니면 나중에 우리 딸에게 혼수품을 좀 마련해 주고서는 다 갚았다고 말할 테니까.’
엽승신 부부와 엽이채는 자신들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손씨는 전반적으로 만족해하면서도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다.
“시집갈 때 주시는 마을은요? 그것도 주셔야죠! 아버님, 이채에게 마을 두 개는 주실 거죠?”
귀족이나 돈 있는 집안에서 딸을 시집보낼 땐 대부분 전지田地나 마을 같은 부동산을 내어 주었다. 하지만 모든 딸이 이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정안후부에서는 적장녀인 엽연채만 시집갈 때 마을을 받고, 엽이채와 나머지 아가씨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하지만 엽이채는 이제 장씨 가문에 시집을 가니 적장녀 못지않게 귀한 여식이 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엽학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정안후부의 수입은 열한두 개의 마을에서 나오는데, 현재 수입은 과거에 훨씬 못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시집가는 손녀에게 주고 싶겠는가? 잠시 생각을 하던 엽학문이 이렇게 말했다.
“마을 같은 건 실물이 아니니 나중에 장씨 가문에 마을 두 개를 받았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설마 장씨 가문에서 그걸 확인하겠느냐? 나중에 토지세를 받으면 이채에게 건네주마!”
그 말을 들은 손씨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렸다. 자신은 서자에게 시집오는 바람에 엽이채에게 물려줄 전지와 장원莊園 같은 게 일절 없었다.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은 이천 냥의 은화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엽연채에게 전부 빼앗겼다.
그래서 그녀는 마을이나 전지처럼 수입이 생기는 재산을 손에 쥘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엽학문이 주지 않겠다고 딱 자를 줄은 몰랐다. 배알이 뒤틀린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버님, 안 받은 것을 어찌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채가 시집가고 나서 시어머니와 아가씨들이 이채의 마을에 가 보자고 하면, 이 아이가 어떻게 거절한단 말입니까. 자꾸 캐묻다 보면 결국 탄로 나겠죠. 그리되면 장씨 가문에서 업신여김당하는 건 물론이고 저희 정안후부도 함께 조롱당할 것입니다.”
엽학문은 체면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체면 깎이는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엽이채도 장씨 가문 사람들에게 절대로 우습게 보여서는 안 되니, 엽학문은 이를 악물고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다. 가서 적당한 곳을 하나 고른 다음에 내게 이야기하거라.”
그 말을 들은 손씨는 뛸 듯이 기뻐하며 인사했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엽학문은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엽균을 쓱 쳐다보고는 다시 손씨의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영이는 어찌 오지 않은 것이냐?”
손씨가 말했다.
“요 며칠 고뿔에 걸렸습니다.”
“…오후에 의원을 부르거라.”
손씨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알겠다고 답했다. 그녀는 기쁜 마음에 우쭐거렸으나 온씨와 나씨 그리고 엽승강은 안색이 싹 변했다.
현재 정안후부에 사내아이라고는 엽균과 엽영뿐이었는데, 엽균도 못났지만 엽영은 추한 지경이었다. 못난 것들 중 그나마 더 나은 것을 고르라 하면 호의호식하는 한량에 불과한 엽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 종일 멍청한 표정이나 짓고 콧물도 제 손으로 못 닦는 엽영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엽학문도 마찬가지였다. 엽균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엽영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엽이채가 지체 높은 가문으로 시집가고 엽연채는 쓸모없는 패가 되어 버렸으니, 두 손자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