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그러면 되겠네.”
엽영교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이에 깜짝 놀란 묘씨가 엽영교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라고 했다. 엽이채가 곧 장씨 가문으로 시집을 가니 묘씨는 둘째 아들 내외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화가 난 엽영교는 이것저것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하고 싶은 말들을 우르르 쏟아냈다.
“전 큰 새언니 곁에서 집안일을 관리하는 법을 배웠어요. 그런데 작년에 큰 새언니가 아픈 바람에 저 혼자서 두 달가량 집안일을 관리했죠. 그 기간에 전 큰 새언니가 뒤로 뭔가를 빼돌린 흔적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고요. 그런데 둘째 새언니가 맡은 지 고작 2주 만에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오네요.”
그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른 손씨가 고개를 홱 돌렸다. 이제 장씨 가문에 시집가는 건 그녀의 딸이었다. 그래서 다들 저를 떠받드는데 이 아가씨가 감히 저런 말로 자신을 쏘아붙일 줄은 몰랐다. 손씨는 기가 차다는 듯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다 근거가 있어서 이리 말하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 장부에는 보름 전에 평국후부平國侯府의 차남인 영승이 오성병마사五城兵馬司 총지휘관으로 부임해 큰아주버님께서 이를 축하하고자 곳간에서 성교오채成窖五彩(푸른 물감으로 윤곽선을 그려 구운 후 채색하여 다시 굽는 방식) 자기병을 가져가 선물로 드렸다고 적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제가 어제 길에서 평국후부 차남의 아내를 만났는데 저희 정안후부에서 보낸 청화매병青花梅瓶이 대단히 진귀한 물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편이 아주 마음에 들어 하며 방 안에 놔두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니, 청화매병이 어디 성교오채에 비교가 되겠습니까! 전 귀중한 성교오채를 들고 나갔는데 어째서 그쪽에서 받은 건 값싼 청화매병인지 알고 싶을 뿐입니다. 어째서 그리된 것이죠? 설마 성교오채를 팔아 받은 천 냥가량의 은화로 다시 일이백 냥이나 하는 청화매병을 사서 선물로 준 건 아니겠죠? 하하!”
그 말을 들은 온씨의 낯빛이 변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온씨는 전혀 몰랐다. 화가 난 온씨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잘못이 그녀의 집안, 정확히 그녀의 남편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엽연채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대꾸했다.
“그럼 둘째 숙모께서는 저희 아버지와 이야기하시면 되겠네요! 집안에서 뭔가를 가져가고 지출한 것은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까요. 가져간 사람이 어떻게 했는지가 저희 어머니와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탓하려면 윗사람을 기만하고 아랫사람을 속인 사람을 탓해야죠. 만약 이 일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경조사비나 물건을 구입하는 일들은 아버지가 처리하지 않으면 되겠네요.”
“연채야……!”
깜짝 놀란 엽균이 그녀를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아무리 그래도 친아버지가 아닌가. 딸자식이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리다니!
아버지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버지는 돈을 써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 그의 한 달 용돈인 은화 열 냥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경조사비를 조금씩 유용해 오고 있었다.
당장 아버지의 첩실인 정랑의 식솔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 드는 비용만 해도 한 달에 은화 이십 냥 정도가 들었다. 남동생 허서는 국자감國子監에서 박사博士를 지낸, 도성에서 유명한 스승을 모시고 공부를 하기 때문에 수업료로 한 달에 은화 열 냥이 들었고, 그 스승에게 선물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또 정이가 평소 자질구레한 데 쓰는 비용도 적지 않았다.
허서는 정이와 그녀의 전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임에도 자신과는 친형제처럼 우애가 깊었다. 아버지도 정이가 본인에게 시집온 이상 허서는 친아들과 다름없으며, 자신에게도 친형제와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서는 자신처럼 세습 봉작을 계승할 수 있는 신분이 아니므로 과거 시험을 봐야만 했고, 당연히 공부에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다.
엽균의 초조한 표정을 본 엽연채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극렬한 분노를 느꼈다. 그의 얼굴을 바닥에 짓누른 다음 발로 밟아 짓이기고 싶었다.
‘팔이 바깥으로 굽는 빌어먹을 놈! 언젠가 반드시 땅바닥에 엎드려 울게 해 주마! 다시는 아버지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게 할 것이다!‘
“형님이 그런 큰 실수를 저지르셨으니 마땅히 그래야죠!”
손씨는 두 눈을 번뜩이며 한마디 했다. 집안에서 가장 이득이 많이 남는 일이었기에, 명문대가에서 경조사는 전부 사내가 처리하는 법이었다.
‘저걸 우리 남편에게 넘겨주면 우리가 한몫 제대로 챙길 수 있을 텐데.’
“맞는 말씀이세요.”
엽연채는 활짝 웃으며 동조했으나 속으로는 혀를 차고 있었다. 형편없는 자기 아버지가 이득이 많이 남는 이런 좋은 일을 놓쳤으니, 그 구역질 나는 첩실도 앞으로 풍족하게 살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그리고…….
엽연채의 시선이 흥분한 손씨의 얼굴로 향했다. 손씨는 이게 웬 횡재냐고 좋아하고 있겠지만, 오늘 이런 일이 드러났으니 할아버지가 이득이 많이 남는 이 일을 마음 푹 놓고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리가 없었다. 분명 사람을 시켜 철저히 감시할 것이었다.
“동서, 이따가 장부와 이전 책자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살펴보시게.”
온씨가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자 손씨는 입을 삐죽거렸다. 얼마 전 손씨는 온씨에게서 가사관리권을 빼앗아 오면, 엽이채에게 제대로 된 혼수를 마련해 주고 큰돈도 만져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곧 일이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정안후부는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돈이 부족할 때마다 변통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항목마다 장부에 꼼꼼하게 기재하니 제대로 된 혼수를 준비할 수 없었고, 따로 빼돌리는 돈도 미미해 얼마 긁어모을 수가 없었다.
이에 손씨는 엽이채가 좋은 곳으로 시집가 신분이 상승할 예정이라는 점과 그 덕에 사람들이 자신들을 떠받들어 준다는 점을 이용해 사실을 왜곡하고, 온씨에게 그녀 때문에 적자가 났다는 누명을 씌워 불만을 해소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얼떨결에 자기 남편 엽승신이 이득이 많이 남는 경조사비와 구매 관련 일을 맡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아져 온씨를 물어뜯는 데 흥미를 잃어버렸다. 우선 이 중요한 일부터 마무리하고 나중에 다시 시도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손씨는 헛기침을 해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형님을 트집 잡으려던 게 아니에요. 지금 정안후부의 공동 재산으로는 제대로 된 혼수를 마련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알려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사실 마련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은화 삼사천 냥가량의 혼수는 마련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이 정도면 엽이채에게는 충분한 혼수였지만, 이제 그녀는 장씨 가문에 시집가는 몸이니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다.
엽학문의 얼굴이 볼썽사나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이 혼사는 제대로 격식을 갖춰 치러야 했다. 엽이채가 혼수를 많이 준비해 떵떵거리며 시집을 가야 장씨 가문에서 그녀를 중히 여길 것이며, 그래야 엽씨 가문에도 더 많은 이익을 가져올 것이었다.
“집안 공동 재산에서는 꺼내 쓸 수가 없으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서 조금씩 보태 주세요.”
손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입으로는 도와 달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아쉬운 사람의 굽신거림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빌리는 것으로 하죠. 나중에 우리 이채가 잘되면 여러분의 도움은 잊지 않을게요.”
그 말을 들은 나씨의 낯빛은 몹시 어두워졌고, 묘씨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시선을 아래로 내려뜨렸다.
“연채야.”
그 말을 듣고 엽학문이 제일 먼저 쳐다본 사람은 엽연채였다.
“네가 혼수를 많이 가지고 갔으니 우선 네 것을 이채에게 주거라. 너희들은 피가 이어진 자매가 아니더냐? 자매간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지.”
손씨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눈썹을 치켜세우며 끼어들었다.
“그래! 연채야, 좀 도와주거라. 지금 시댁에서의 삶도 그다지 평탄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앞으로도 서운한 일들을 많이 겪을 테니 친정과 자매간의 우애에 기대야 하지 않겠어? 이채와 잘 지내면 앞으로 시댁에서도 너를 중요하게 생각할 게다.”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하고 있네! 저걸 말이라고 한단 말인가? 무슨 낯짝으로 저런 말을 내뱉는 거지?’
엽연채는 이 후안무치한 여인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고 말았다.
‘나를 이 지경에 빠트린 사람이 대체 누군데!’
엽연채는 기가 차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손에 든 청자 찻잔을 옆에 탁 내려놓고는 손씨를 쳐다보며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러죠, 뭐! 그런데 주는 거야 문제가 없지만 이채가 그걸 받아 갈 수 있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니?”
손씨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혼수는 제가 시집갈 때 이미 한 번 가지고 갔던 거잖아요! 그런데 다시 꺼내면 두 번째로 가지고 가는 셈이죠!”
엽연채는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손씨와 엽승신의 안색이 한순간에 싹 변했고 그들보다 더욱 깜짝 놀란 엽이채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외쳤다.
“피, 필요 없어요!”
혼례식 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이겠는가? 바로 ‘새것’이며 그것에 담긴 ‘첫 번째’라는 의미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러니 엽이채는 엽연채 것을 가져다 쓰는 재수 없는 짓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장박원과 한평생 화목하게 백년해로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미 썼던 것을 다시 가져간다는 말인가.
그 말을 들은 손씨도 가슴이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냉소를 지으며 받아쳤다.
“연채야, 무슨 그런 웃기지도 않은 농을 하느냐? 네 혼수는 대부분 형님께서 주신 것이니 아직 사용한 물건들이 아니지 않니.”
“어머니가 딸에게 주는 건 물려준다고 하죠! 웃어른께서 하사하신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출가한 지 얼마 안 된 언니의 혼수를 다시 빼내 간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네요.”
화가 난 손씨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빼내 간다니? 네 말은 이치에 맞지 않다!”
“둘째 숙모, 어머니가 물려준 혼례복을 딸이 입는 경우는 있죠. 하지만 어머니가 입었던 것 말고 다른 사람들이 입었던 혼례복을 입었다는 말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 물론 궁중 귀인들이 하사한 것을 입는 경우는 있죠. 그건 정말 커다란 복이며 은혜로운 일이지요! 하지만 전 은혜와 복을 하사할 만한 궁중 귀인이 아니잖습니까. 우리 주씨 가문처럼 가난에 찌든 가문의 혼수라도 굳이 빼내 가서 장씨 가문으로 가져가겠다면 뭐…….
다른 집 새신부들은 혹여 친정의 복을 가져갈까 봐 집 밖을 나설 때 땅도 밟지 않는다던데. 하긴, 몰락한 저희 주씨 가문에 가져갈 복이나 있겠어요?”
엽연채는 그렇게 말하며 차를 마셨다. 이야기하는 동안 얼마나 신이 나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