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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26화 (26/858)

제26화

호숫가를 따라 걷다 보니 엽연채는 어느새 영귀원에 도착해 있었다.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채 마마가 웃으며 발을 걷어 올렸다. 온씨는 남차간南次間에서 황리목黄梨木으로 만든 기다란 침상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딸을 본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왔구나. 그런데 어째서 이런 때에 온 것이냐?”

어제 엽이채와 장박원의 혼례식 날짜가 정해졌다. 그 소리를 들은 온씨는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그녀는 이 일을 딸에게 알리지 않기로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가장 마음 아파할 사람이 바로 자신의 딸일 것이었다.

엽연채는 건강해 보이는 어머니의 모습에 흡족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팔짱을 끼며 애교를 부렸다.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 이렇게 왔죠!”

“얘도 참!”

온씨는 엽연채의 이마를 퉁겼다. 어찌 이런 우연이 있겠는가. 딸은 소식을 듣고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든 온씨가 딸의 안색을 살폈다. 그녀는 엽연채의 표정이 괜찮은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거기서는 지낼 만하느냐?”

엽연채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대수롭지 않은 일들만 골라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잠시 후, 채 마마가 안으로 들어왔다.

“마님, 주인마님께서 부르십니다.”

“알겠다.”

온씨가 고개를 돌려 딸을 쳐다보며 말했다.

“갔다 오마.”

“주인마님께서 큰아가씨를 본 지도 오래됐으니 함께 오시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하는 채 마마의 안색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엽연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알겠어요. 어머니, 가시죠!”

온씨는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어머님은 따뜻한 분이 아니시지! 어제 엽이채의 혼례식 날짜가 정해졌으니 분명 손씨가 또 일을 꾸미고 있는 게로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온씨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함께 문을 나선 모녀는 곧 관상용 물고기를 키우는 물가의 정자와 멀지 않은 곳에서 엽승강 부부와 마주쳤다. 온씨를 본 나씨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형님.”

그러고는 연민 어린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보았다.

“연채도 왔구나.”

“숙부, 숙모.”

엽연채는 개의치 않고 곰살맞게 인사했다.

“형님도 어머님을 뵈러 가시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온씨를 보며 나씨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로 부르시는 걸까요?”

“그걸 누가 알겠나.”

온씨가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담소를 나누며 걷던 두 여인은 어느새 안녕당 뜰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짙은 남색 비단 도포를 입은 잘생긴 소년이 사동에게 부축을 받으며 정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균아.”

절뚝거리는 엽균을 본 온씨가 빠른 걸음으로 그를 향해 다가갔다.

“어머니…….”

엽균이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하자 온씨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다리는 좀 괜찮아졌느냐?”

“예, 많이 좋아졌습니다. 하하.”

“이 녀석아!”

온씨가 한숨을 내쉬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평소 착실히 공부나 하고 있었으면 어디 이런 일이…….”

“오라버니!”

엽연채가 그를 향해 달려가다 그만 온씨와 부딪히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하하, 연채구나.”

여동생을 본 엽균의 얼굴은 치통을 앓는 사람처럼 더욱 일그러졌다.

‘어머니 한 사람도 상대하기 버거운데 누이동생까지 오다니, 이 집구석은 정말 있을 곳이 못 돼!’

그러나 엽균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다리만 절지 않았다면 벌써 줄행랑을 쳤거나 아예 할머니가 계신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전하러 왔던 손씨의 여종, 여설에 따르면 오지 않을 시 앞으로 용돈을 끊을 거라고 했다고 한다.

엽균은 귀를 쫑긋 세우고 죽음도 두렵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온씨와 엽연채의 잔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엽연채는 미소를 짓더니 그의 발을 만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오라버니, 발은 어쩌다 이리됐어요?”

“보름 전에 어찌 된 일인지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고 들어왔단다. 얼굴과 머리에 한매수정고를 잔뜩 묻히고 말이다. 그래서 떡 먹겠다고 싸우다가 저 꼴이 되어서 돌아왔다고 모두들 웃어 댔지.”

나씨가 웃으며 말했다.

“무슨 떡 하나 먹겠다고 싸워요. 어디서 갑자기 건달들이 나타나더니…….”

엽균은 하던 말을 멈추었다. 건달들에게 맞았다는 소리를 또 하면 어머니는 분명 저번에 했던 말을 쉴 새 없이 반복할 것이다. 하루 종일 밖으로 그렇게 나돌지 않았으면 왜 사람들과 시비가 붙어 두들겨 맞았겠냐고 말이다. 생각만 해도 지겨운 소리였다.

“아, 떡 가지고 싸우다가 그런 거군요.”

엽연채가 그의 곁에 서 있던 사동을 밀치며 깔깔거리고 웃더니, 오라버니의 팔뚝을 잡으며 자못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오라버니는 단 음식을 좋아하지 않잖아요. 분명 저와 어머니께 사다 주려고 한 거겠죠, 그렇죠?”

그 말을 들은 엽균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아버지의 첩실인 정랑에게 사다 주려고…….’

“오라버니께서 그래도 철이 드셨네요. 어머니와 저에게 떡을 사다 주려 했다니. 그런데 기억하실 게 있어요.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간식은 당증소락糖蒸酥酪(북경식 특제 요구르트로 우유를 찐 것)이랍니다.”

그 말을 들은 엽균은 부끄러우면서도 곤혹스러워 어물거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죄책감이 들었다. 여태껏 어머니가 좋아하는 간식이 당증소락이란 것을 몰랐고, 단 한 번도 어머니께 간식을 사다 드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늘 아버지의 첩실인 정랑에게만 무언가를 사다 주었던 것이다.

그날 아들이 자신에게 간식을 사다 주려다가 다쳤다는 걸 알게 된 온씨의 가슴에 감동이 밀려왔다. 당연히 그를 바라보는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다친 지 보름이 다 되어 간다면서 어째서 아직도 다리를 절어요?”

엽연채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그날 고용했던 건달들이 매질을 너무 심하게 했던 걸까?

엽연채의 말에 온씨는 다시 화가 치밀었다.

“며칠 전만 해도 다 낫는가 싶었는데, 글쎄, 이 녀석이 급히 밖으로 나가다가 계단에서 넘어져 다시 도진 게지. 균아, 이 녀석아…….”

“어머니, 할머니께서 부르시잖아요. 어서 안으로 들어가요.”

엽연채는 얼른 온씨를 잡아끌며 방 안으로 그녀를 데리고 들어갔고, 문 앞에 나와 있던 여종이 발을 걷어 올렸다.

엽연채 일행은 안녕당의 동차간으로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와서 앉아 있었다. 기다란 상 위에는 묘씨와 엽학문이 좌우로 살짝 거리를 두고 앉아 있었고, 엽영교는 묘씨 옆에 찰싹 붙어 복숭아꽃 무늬 덮개를 씌운 수돈에 앉아 있었다.

그 아래 양쪽으로 권의圈椅(둥근 등받이에 팔걸이가 연결된 의자)가 놓여 있었는데, 손씨와 엽승신, 엽이채는 좌측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 말석에는 암화暗花 무늬가 들어간 흰색 면 치마를 입은 열두 살쯤 되어 보이는 고운 소녀가 앉아 있었다. 엽미채였다. 그녀의 거처는 이곳에서 가까워, 아무래도 오갈 때 걸리는 시간이 짧았다. 엽연채 모녀를 본 엽미채는 얼른 일어나며 인사했다.

“큰어머니, 큰언니.”

“앉으렴.”

엽연채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침 일찍 관아에 간 엽승덕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둘째네의 서녀 두 명, 셋째네의 여식은 모두 열 살이 채 안 된 어린아이들이니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둘째네 적자인 엽영은 열세 살이지만 며칠 전 고뿔에 걸려 오지 못했다. 그들을 제하고 와야 할 사람들은 모두 참석한 것이다.

“다 우리 가문 식구이니 이만 자리에 앉거라.”

다들 자리에 앉자 여종은 차를 내온 후 다시 밖으로 물러갔다.

엽학문이 찻잔을 들며 물었다.

“둘째야, 이채의 혼례식 날짜가 정해져 중요하게 상의할 일이 있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냐?”

“아버님, 혼례식을 올리니… 당연히 혼수품을 준비해야겠죠.”

손씨는 조소를 띠며 답했다. 나씨는 손수건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경멸과 조롱의 눈길로 손씨를 쓱 쳐다봤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이런 지저분한 혼사에는 혼수든 혼인 문제든 조용히 처리하고 넘어가길 간절히 바랄 텐데, 이 손윗동서는 숨기고 가리기는커녕 온 집안사람들을 불러놓고 함께 의논하자고 했다. 낯짝이 참 두꺼웠다.

혼수라는 두 글자를 들은 엽학문은 눈꺼풀이 떨리더니 저도 모르게 엽연채를 흘겨봤다. 하지만 화를 내지는 않고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야, 이제 집안일은 네가 관장하니 곳간에서 꺼내다 쓰면 된다.”

말을 마친 엽학문은 아까워서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손씨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님, 공동 재산이 남아 있었으면 가져다 쓴 후에 혼수 단자도 함께 작성해 보냈겠죠. 이렇게 사람들을 부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남은 게 별로 없으니 문제인 겁니다!”

손씨는 그 말을 하며 온씨를 비웃듯 쳐다봤다.

“형님께서 대체 집안일을 어떻게 처리하신 건지 모르겠네요. 형님이 쥐고 계셨던 정안후부의 그 많은 재산이 도대체 다 어디로 갔을까요? 항상 수입보다 지출이 많고, 부족하면 돌려 막았더라고요.”

이는 온씨가 재산을 빼돌렸다는 의미였다.

“뭐라?”

엽학문이 깜짝 놀라 말했다.

“동서, 그게 무슨 말인가?”

온씨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정안후부는 본래 수입보다 지출이 많았다. 엽학문과 묘씨가 겉치레를 좋아하는 데다, 생활하는 데 필요한 물품들이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불같이 화를 내기 때문에 도무지 절약을 할 수가 없는 탓이었다.

그래도 온씨는 뭐든지 잘해 내려는 적극적인 성격이라 어떻게든 살림을 꾸려 올 수 있었다. 집안 관리를 제대로 못 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책망할까 걱정되어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변통해서 채우고, 여러 번 계산해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춰온 것이다.

온씨는 화가 난 목소리로 반박했다.

“장부에 분명히 기록해 놓았는데 동서가 제대로 못 본 것 아닌가?”

“장부는 형님이 쓰셨으니 임의로 수정하셨을지도 모르죠?”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나?”

온씨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집안에서 혼수조차도 마련하지 못하는 게 그 증거죠.”

온씨가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자 엽연채가 그녀의 손을 꽉 잡더니 차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째 숙모께서 하시는 말씀을 가만 들어 보니 좀 이상하네요. 분기마다 소작인 우두머리가 바치는 물건들, 각지에서 보내는 집세와 토지세 등 굵직굵직한 장부상의 항목들은 다 할아버지의 손을 거치지 않나요? 지난 몇 년 동안 집안 살림의 수입과 지출은 할아버지가 제일 잘 아실 거예요.

그리고 호화스러운 집안 행사도 있었죠. 저번에 할아버지 생신 때는 은화를 몇 천 냥이나 썼어요. 숙모, 의심이 든다면 집안에서 쓰는 장부와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장부를 비교해 보며 지난 몇 년 동안 적자가 있었는지 확인해 보면 어떨까요?”

그 말은 들은 엽학문은 몹시 난처했다. 요 몇 년 동안의 수입은 그전에 훨씬 못 미쳐 절반가량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달 전 자기 생일 땐 삼천에서 사천 냥가량의 은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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