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주운환이 수업을 마쳤을 때는 이미 점심이었다. 궁명헌 소청으로 걸어 들어가는 주운환의 뒤를 여한이 따랐는데, 그의 손에는 책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엽연채는 탁자 옆에 놓인 둥근 걸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었고, 혜연은 상 위에 음식을 차리고 있었다. 어젯밤과 같은 음식이었다.
“공자, 수업을 마치셨군요.”
추길이 쟁반을 들고 오며 인사를 올렸다. 여한의 손에 들린 책을 보니 오늘 아침 교 마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공자님, 오늘은 무엇을 배우셨습니까?”
주운환은 도포를 걷어 올리며 자리에 앉더니 무심한 눈길로 추길을 쓱 쳐다보곤 말했다.
“뭘 배웠는지 모르겠구나.”
추길은 말문이 막혔다.
“수업을 듣지 않으신 겁니까? 그렇게 하시면 과거 시험은 어떻게 보시려고요?”
그러자 주운환은 피식 웃더니 비꼬는 듯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주씨 가문 사람들이 과거 시험을 친다는 게 웃기지 않느냐?”
“그렇지만 공자님들께서는 공부를 하고 계시잖습니까…….”
“난 아버님께 대충 맞춰 드리는 것뿐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누가 이런 시시한 책을 들여다보겠느냐?”
그러면서 주운환은 하품을 했다. 추길은 이런 그를 보며 견딜 수가 없었다. 아가씨의 지아비가 이리도 형편없는 사람이니,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밥상이나 차리거라!”
이때 엽연채가 추길을 쏘아보며 말했다. 추길은 가슴이 답답해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조용히 쟁반을 내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청자로 만든 작은 그릇 두 개가 놓여 있었는데, 뚜껑을 열자 상쾌한 향기가 풍겼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진귀루陳貴樓의 야압탕野鴨湯(물오리탕)이 먹고 싶어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공자께서도 드셔 보세요.”
엽연채는 여윈 주운환을 보고 영양 보충을 제대로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명헌에는 주방이 따로 없었기에, 엽연채는 아침이 되자마자 경인에게 진귀루에 가서 야압탕 두 그릇을 사 오라고 분부했다.
경인이 행랑채 하인에게 동화 이삼십 냥을 건네자 그가 대신 다녀와 경인의 수고를 덜어 주었다. 게다가 하인은 경인을 위해 몰래 다녀온 일도 비밀로 하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마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면 수고비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주운환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는 그렇게 조용히 식사했다.
식사를 마친 주운환은 난죽거로 돌아갔다.
엽연채가 추길을 쏘아보며 말했다.
“방금 전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한 것이냐?”
“전… 그저 아가씨를 대신해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추길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장박원은 열세 살에 향시에 합격한 인재입니다. 유명한 수재였죠. 전 주 공자님이 가세와 신분에서 크게 밀리시지만, 그래도 공부를 시작한 이상 시험에 붙어 공명을 떨치시면 아가씨 체면이 조금은 살지 않을까 했어요. 그런데 공자님을 보세요. 진취적인 기상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잖아요.”
“됐다.”
엽연채는 그녀에게 눈을 흘겼다.
“난 그를 내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시집온 게 아니야. 공명이고 관직이고 다 필요 없다. 그냥 지금처럼 내 곁에서 함께 밥을 먹어 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엽연채는 아직까지도 어떻게 지내는 게 좋은 부부 관계인지 잘 몰랐다. 전생의 자신과 장박원처럼 서로를 미워해야 할까? 아니면 자신의 부모님처럼 한 사람은 마음속에 온통 다른 여인만 품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상대방을 그리워하기만 하는 그런 관계여야 할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의 조부모처럼 지내야 하나? 조부는 조모를 그럭저럭 잘 대해 주었고 조모는 그런 그의 의붓자식들과 그 손자손녀들을 무심하게 대했다.
사실 이 중 그 어떤 관계도 그녀가 꿈꾸는 관계는 아니었다. 어쩌면 지금처럼 그녀 곁에서 조용히 밥을 먹어 주고, 이후엔 각자 자기 생활을 하다가, 적당한 시기가 되면 분가해서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는 그런 관계를 원하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서로에게 좀 더 익숙해진 후에는 한 이불을 덮고 자며 아들딸 낳고 사는 것이다.
하지만 첩실을 들여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전생에서는 엽이채 그 첩실에게 한평생 수모를 당하고 살았다. 이번 생에서는 자신이 남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데, 평판에 연연하며 괜히 골칫거리를 만들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처럼 무능한 편이 훨씬 나았다. 자신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고 이편에 의지해 하루하루를 보내며 허튼짓을 할 생각은 감히 꿈도 못 꾸는 그런 남편 말이다. 자신이 남편을 먹여 살리고, 남편은 집에서 꽃처럼 아름답게 있는 그런 관계!
엽연채는 생각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아주 좋아!’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미래를 계획했다.
* * *
진씨와 비 이낭을 비롯해 어젯밤 매씨에게 혼쭐이 난 사람들은 감히 나서서 문제를 일으킬 수 없었다.
엽연채는 끼니때마다 경인을 통해 밖에서 좋은 재료를 구해 와 찬거리를 늘렸고, 반찬도 시시때때로 바꿨다. 그렇게 그녀는 가정생활에 날로 재미를 붙였다.
몸보신을 계속 해 주었더니, 과연 남편의 얼굴도 한층 혈색이 좋아지고 윤기가 흘렀다. 그 모습을 보며 엽연채는 커다란 성취감을 느꼈다. 그렇게 2주 정도가 흐른 어느 날, 추길이 꽃무늬가 그려진 서신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가씨, 친정에서 서신을 보내 왔습니다.”
서신을 받아 든 엽연채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모께서 보낸 서신이구나.”
“뭐라고 쓰여 있나요?”
혜연과 추길이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자 엽연채가 빠른 속도로 서신을 읽어 내려가며 입을 뗐다.
“장씨 가문에서 어제 정안후부를 방문해 엽이채의 혼례식 날짜를 정하고 갔는데, 어머니께선 편안한 모습이었다고 적혀 있어.”
엽영교 덕에 소식을 전해 들은 엽연채는 어머니가 한층 더 보고 싶었다. 게다가 오늘 엽이채의 혼례식 날짜가 정해졌으니 조만간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혜연아, 내일 어머니께 병문안을 간다고 회신하거라.”
엽연채가 말했다.
“그런데… 지금 둘째 마님께서 집안일을 관장하고 계시니, 일부러 저희를 곤란하게 하려고 저희를 맞이할 겨를이 없다고 하시면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면 어쩌죠?”
추길이 말하자 엽연채가 비웃는 듯한 눈빛을 하고는 말했다.
“걱정 말거라. 숙모는 우리를 기쁘게 맞이할 거다. 우린 그냥 마음 놓고 가면 된다.”
손씨의 성정을 떠올린 추길은 낯빛이 변했지만, 분명 아가씨에게 좋은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 * *
정국백부는 출입 통제가 심하지 않아, 상전들은 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엽연채는 이른 아침부터 준비하여 혜연과 일찍이 문밖을 나섰다. 추길은 남아서 집을 보기로 했다.
엽연채는 진씨와 다른 사람들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아 집안의 마차를 사용하지 않고 경인을 시켜 밖에서 푸른 덮개를 쓴 평범한 마차 한 대를 빌려 왔다.
정안후부 측문으로 들어간 엽연채와 혜연은 수화문에 당도하여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곧장 영귀원으로 향했다. 호숫가를 지나던 두 사람은 손씨와 엽이채가 팔각정八角亭을 돌아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엽이채는 흐릿한 매화꽃 무늬가 들어간 치마를 나부끼며 걸어왔다. 머리에는 살구꽃 장신구를 달고 있었다. 여성스러운 계란형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고 한껏 치켜올린 눈과 눈썹에서는 의기양양함이 느껴졌다. 손씨 또한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허리를 곧게 편 채 우쭐거리고 있었다.
그들 모녀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엽연채를 보자 한층 더 우쭐대며 무슨 보기 어려운 사람이라도 오랜만에 본 것처럼 냉큼 다가왔다.
“난 또 누구라고. 주씨 가문으로 시집간 우리 주 부인 아니냐!”
손씨는 엽연채의 손을 잡고 시집간 친딸을 본 사람처럼 반색하며 대단히 살갑게 굴었다.
“큰, 큰언니.”
엽이채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그러곤 가녀린 모습으로 몸을 움츠리며 손씨의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금색 실로 백합을 수놓은 비단 손수건을 쥐고서는 한 포기 난초를 연상시키는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가볍게 입술을 매만졌다.
엽이채는 곱고 가냘픈 모습으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득의양양한 감정을 다 감추지 못하고 눈썹을 치켜세운 채 엽연채를 훑어봤다.
한동안 엽이채는 언니의 신랑을 빼앗는 파렴치한 짓을 벌였으니 얼굴을 들고 사람들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인들이 그녀를 비웃기는커녕 치켜세우고 아첨하니 엽이채는 기뻐서 우쭐거리기 시작했고, 더 이상 부끄러움도 들지 않게 되었다.
오늘은 엽연채와 마주치자 처음엔 무서워서 움찔했지만 요즘 여종들이 자신을 떠받들고 엽연채를 깎아내리고 있으니 그녀 앞에서 뽐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부인, 이채와 박원 공자님의 혼례식이 사월 열사흘로 정해졌습니다. 부인께서도 늦지 말고 오셔야 돼요! 사정이 생겨 못 오신다고 하면 안 됩니다!”
손씨는 엽연채가 안 올까 봐 먼저 선수를 쳤다. 손씨는 그 말을 들은 엽연채가 분명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곤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둘째 숙모도 참. 제가 오지 않는 걸 걱정하기 전에 이채의 혼수를 어떻게 마련할지부터 걱정하셔야죠!”
이 말에 웃고 있던 손씨와 엽이채의 얼굴이 싹 굳어지더니 안색이 퍼렇게 질렸다. 엽연채가 국화 무늬로 장식한 반투명한 둥글부채로 붉은 입술을 살짝 가리자, 웃음기로 가득한 요염하면서도 아름다운 커다란 두 눈만 보였다.
“장씨 가문 며느리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혼수를 제대로 못 해 가면 도성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웃지 않겠어요!”
화가 난 손씨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고, 엽이채의 조그만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제대로 한 방 먹은 그들의 모습에 엽연채는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했다. 그녀는 깔깔 웃고 부채를 흔들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엽이채가 손씨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라. 네 혼수는 반드시 제대로 준비할 테니까.”
손씨는 그렇게 말하며 싸늘한 눈빛으로 엽연채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엽연채가 어떤 인물인지 잠시 간과하고 있었다. 지금 엽연채가 제 발로 이곳에 찾아왔으니 자신도 이젠 봐줄 생각이 없었다.
“저 계집애가 떠나기 전에 얼른 네 할머니를 찾아가 저 계집애를 불러오게 해야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