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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24화 (24/858)

제24화

이른 아침, 햇살이 나뭇잎 사이를 파고들어 기와지붕과 구불구불 이어진 회랑 위로 떨어졌다. 궁명헌은 선연한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잠에서 덜 깬 엽연채가 게슴츠레 눈을 뜨는데 밖에 있는 소청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 보니 회색 옷을 입은 어멈과 혜연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교 마마였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다.

“아, 마마였군요?”

“셋째 마님,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엽연채를 본 교 마마가 활짝 웃으며 인사하자 엽연채는 부드럽게 사양했다.

“마마,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됩니다.”

교 마마는 상 위에 찬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마님께서 드실 아침 식사입니다.”

혼례식을 올린 당일 밤, 교 마마가 이곳으로 와서 도와주었기 때문에 엽연채는 그녀가 궁명헌에서 일하는 하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제 돌아온 후부터 지금까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의아해하던 참이었다. 엽연채는 교씨 몸에서 나는 기름 냄새와 연기 냄새를 맡고는 물었다.

“마마는 주방에서 일하나요?”

“예. 소인은 원래 셋째 도련님의 유모였으나, 셋째 도련님께서 장성하신 후로는 주방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주방은 궁명헌에서 아주 먼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주방 사람들은 이곳에 오는 것을 꺼려했다. 그래서 궁명헌으로 식사를 나르는 건 줄곧 교 마마의 일이었다. 그런데 어제는 주방에서 일하는 여종들이 엽연채를 슬쩍 훔쳐보려고 이곳에 왔던 것이다.

셋째 도련님께 아내가 생기자 교 마마는 뛸 듯이 기뻤다. 주방 사람들이 난처하게 굴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쁘기 그지없었다.

“추길아, 식사하게 가서 공자님을 모셔오너라.”

엽연채의 말이 떨어지자 교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셋째 도련님은 방에 안 계십니다. 도련님은 매일 묘시卯時(오전 5시~7시)에 서재에서 공부를 하셔요.”

“공부를 하신다고요?”

엽연채가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교 마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셋째 도련님뿐만이 아닙니다. 세자, 둘째 공자님, 세자의 아드님, 거기다 아가씨들도 공부를 하십니다. 저희 주인나리께서 정하신 규칙이지요. 주인나리께서는 다른 부분에선 유하신 분인데 공부와 과거 시험에 있어서는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마님도 나리의 이런 방침에 적극 동의하고 계시고요.”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주씨 가문은 무장 집안이 아니던가. 그런데 주 백야는 어째서 자식들 모두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고 있을까.

“그래서 무슨 성과가 있었나요?”

추길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교 마마가 안타깝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나리께서는 여전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밀어붙이고 계셔요.”

그때 무언가 떠오른 엽연채가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세자, 둘째 공자님, 셋째 공자님의 이름이 한 글자도 같지 않던데.”

교씨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비밀이라 할 것도 없습니다. 셋째 마님께서도 이곳에 계시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되실 겁니다. 주씨 가문은 장군 집안이고 대대로 명장을 배출했지만 나리 대에서는……. 나리께서는 병사들을 이끌고 전쟁을 지휘하는 데 그다지 소질이 없어서 과거 시험을 보고 싶어 하셨죠. 하지만 때를 놓쳐 어쩔 수 없이 군대를 통솔하셨답니다.

그래서 둘째 도련님께 ‘종과從科(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양명한다는 뜻)’라는 이름을 지어 주셨어요. 둘째 도련님이 과거 시험을 보기를 바라셨던 거죠. 하지만 노태야께서 이를 알고 나리께 매질을 하셨지요.

이후 셋째 도련님이 태어나셨고, 나리께서 이름을 지어 줄 엄두를 못 내셨습니다. 결국 노태야께서 이름을 지어 주셨죠. 그래서 이렇게 된 겁니다. 나리께서는 점점 과거에 더 마음을 쓰고 계셔요. 집안에서 수재가 나와 가문을 빛내는 꿈을 꾸신다니까요!”

엽연채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서 셋째 도련님은 날이 밝자마자 난죽거에서 아침을 드셨습니다. 밥과 찬이 식을까 염려되어 소인이 지금 마님께서 드실 식사를 들고 오는 길입니다.”

교씨의 말이 끝나자 혜연이 찬합을 열었다. 어제 저녁을 그렇게 먹은지라 아침밥에 대한 기대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데도 안에 든 음식을 보니 또다시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소가 없는 커다란 찐빵 세 개와 작은 그릇에 담긴 흰죽, 작은 종지에 담긴 장아찌가 세 사람이 먹을 아침이었다. 녹두 가루나 팥가루 따위를 섞어서 만든 국수가 아니라 찐빵을 줬으니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는 걸까?

교 마마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말했다.

“셋째 마님께서는 이런 식사가 익숙지 않으시겠지요……. 소인이 주방에서 일하고 있기는 하지만 힘이 없어서 별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이게 뭐 어때서요?”

엽연채는 살짝 입꼬리를 당겼다. 그 말을 들은 교 마마는 감격해 마지않았다.

‘셋째 도련님과 함께 고생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으실 줄이야!’

다른 가문 여식들과는 확실히 다른, 정말 좋은 아가씨였다.

* * *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엽연채는 추길과 혜연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다.

“어머님의 거처가 남쪽에 있느냐?”

“예, 그리고 두 아가씨의 거처도 그쪽에 있습니다. 제가 어제 향아에게 물어보니 그 아이가 절 데리고 다니며 길을 익히게 도와주었습니다.”

추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런데 마님께서는 아가씨를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 텐데요.”

“그건 어머님 사정이고, 난 내 도리를 다해야겠다.”

엽연채는 뜰 밖을 나서서 가로수 길을 따라 걸어갔다. 가는 길에 보인 정자들은 대부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스산한 모습이었고, 사람들이 자주 걸어 다니는 큰길을 제외하고는 곳곳에 잡초가 무성했다. 안뜰의 협문 안으로 들어서니 그제야 정원과 나무들이 깔끔하게 잘 가꿔져 있어 주변 분위기가 조금씩 산뜻했다.

“아가씨, 이쪽이 바로 마님의 거처입니다.”

추길이 작은 목소리로 알렸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건물에는 ‘일상원溢祥院’이라는 세 글자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고, 주위를 둘러보니 외벽은 새하얗게 칠해져 있었다.

혜연이 문을 두드리자 여종 하나가 문을 열며 물었다.

“누구세요? 셋, 셋째 마님……!”

엽연채를 본 녹지는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어제는 그저 멀리서 지켜본 게 다였는데, 지금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아름다운 꽃이 달콤한 향을 풍기는 것만 같았다.

오늘 엽연채의 차림은 화려했던 어제와는 달리 아주 수수했다. 그녀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담청색 비단 상의와 연분홍빛 실로 촘촘히 수놓은 해당화 무늬 치마를 입고 있었다. 쪽 진 머리에는 붉은 산호를 상감한 백옥 화승華勝(빗처럼 생긴 머리 장신구)을 하나 꽂았을 뿐인데도 그녀는 더없이 근사한 모습이었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님께 며느리가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다고 전해 주게.”

멍해 있던 녹지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잠… 잠시만 기다리세요.”

녹지는 안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더니 잠시 후 뛰어나와 말했다.

“마님께서 어제 민주에서 돌아와 여로에 지치신 상태입니다. 오늘 아침 일어나신 후로 줄곧 몸이 개운치 않아 지금은 볼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고 합니다.”

“그럼 나 대신 어머님께 인사를 좀 전해 주길 바라네.”

말을 마친 엽연채는 돌아서서 발걸음을 옮겼다.

녹지는 문을 닫고는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상운祥雲이 수놓인 비단 발을 걷어 올리자 기다란 상에 앉아 있는 진씨가 보였고, 그 옆엔 며느리 강심설이 앉아 있었다.

강심설이 말했다.

“갔느냐?”

“예.”

녹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진씨의 고운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수건을 감고 있던 손으로 옆에 있는 항탁炕桌을 냅다 내려치며 말했다.

“제까짓 게 뭐라고! 서자의 아내 주제에!”

강심설이 녹지에게 물었다.

“어젯밤 궁명헌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궁명헌 그 재수 없는 곳은 평소 신경 쓰기도 귀찮은 곳이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비위를 잘 맞추는 강심설은 엽연채가 등장하자 여종 두 명을 보내 그쪽 상황을 지켜보게 했다.

“없었습니다.”

녹지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저녁 식사를 가져갔을 때도 없었느냐?”

강심설은 조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이상한 행동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 여종이 셋째 도련님께 달려가 식사하시라고 전하는 모습은 봤습니다.”

강심설과 진씨는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 주운환이 어떻게 식사하는지는 그들이 제일 잘 알았다. 정안후부 적장녀인 엽연채는 평소 자신들보다 먹을 것, 입을 것에 훨씬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그런데 주운환의 식사를 보고도 소란을 떨지 않다니, 이 또한 이상한 일이었다.

“꽤나 만족스러운 모양이구나.”

진씨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전에 서출의 여식인 엽이채가 들어온다 했을 때도 배가 아팠는데,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한 엽연채가 셋째의 배필로 들어오다니. 자신의 큰아들도 맞이할 수 없는 지체 높은 가문의 여인을 비천한 서자가 아내로 맞이할 줄은 몰랐다.

그러하니 지금 진씨의 심정은, 그 어떤 말로도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늘 주종과와 비 이낭, 아직 젊은 백 이낭을 경계했다. 하지만 제 분수를 가장 잘 아는 주운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못 했다.

“마님, 셋째 마님께서 이곳에 오실 때 혼수를 실은 마차를 세 대나 들여오셨어요. 그 안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을까요?”

녹지가 눈알을 굴리며 물었다. 그러자 강심설은 붉어진 두 눈을 부릅뜨더니 손에 든 비단 손수건을 꽉 움켜쥐며 말했다.

“버려진 적녀가 혼수를 가져와 봤자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질투가 짙게 배여 있었다. 동서 간에는 본디 서로 경쟁하기 마련이었다. 출신과 용모 모두 손아래 동서에게 밀리는데, 혼수에서도 밀리게 된다면 그녀가 정국백부에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겠는가.

“밖에서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안후부와 장씨 가문에서 엽연채를 이용해 그 일을 덮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이제 지체 높은 장씨 가문으로 시집가는 것은 엽이채이니, 좋은 것은 다 그쪽에 넘겨준다고 들었어요. 엽연채는 되는 대로 해서 보냈겠죠!”

진씨는 말없이 강심설의 말에 수긍했다.

사람은 때로 이렇게 냉정하고 잔인했다. 과거에 아무리 귀하디귀하게 자랐어도 가치를 잃고 진창에 빠지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자신만 봐도 그랬다. 자신 역시 집안에서 귀하게 자라 명문가 정국백부로 시집간 자랑스러운 딸이었다. 친정에 방문할 때마다 하인들의 호위를 받았으며, 계모도 굽실거리며 저를 맞이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짓밟히고 업신여김당하기 일쑤였다.

“앞으로 그 아이가 눈물 흘리는 일이 생겨도 우린 관여하지 말자꾸나.”

진씨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녀는 어젯밤 시어머니 매씨가 자신을 꾸짖던 일이 떠올랐다. 엽연채를 못살게 굴고 싶긴 하지만 지금 건드렸다간 재수 없는 일을 당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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