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다들 깜짝 놀라 온몸을 덜덜 떨었다. 노기충천했던 진씨의 얼굴 역시 새파랗게 질려 버렸고, 바닥에 엎드려 억지를 쓰고 있던 비 이낭도 황급히 눈물을 거두며 벌떡 일어났다. 주종과, 강심설, 그리고 두 아가씨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한쪽으로 물러났다.
이 사람은 바로 주 백야의 생모이자 가모家母(집안 여식솔 중 가장 큰어른)인 매씨였다. 매씨는 딸만 내리 넷을 낳다가 마흔이 되어서야 아들인 주 백야를 낳았기 때문에 지금은 팔십의 고령이었다.
“어, 어머니…….”
“변변치 못하기는!”
주 백야가 더듬거리자 매씨가 그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허리를 반쯤 굽히며 예를 올린 주 백야는 벌벌 떨며 고개를 숙인 채 매씨를 감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그를 지나친 매씨는 매서운 눈빛으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훑어본 후 진씨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이가 변변치 못하기는 하나 지금 집안 상황이 어떤지는 다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구차해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일단 굽혀야지. 그러지 않고 뭘 어찌할 수 있다는 말이냐? 어제 네가 정안후부에 있었다면 혼사를 저지할 수 있었을 것 같으냐? 네가 지금 왜 울화통이 터지는지 누군들 까닭을 모를 것 같으냐?”
‘셋째가 적출 소생인 적장녀와 혼인한 걸 용납할 수 없어서 저러는 것이겠지!’
그러나 매씨는 진씨의 체면을 봐서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진씨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지만 말문이 콱 막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매씨의 시선은 다시 비 이낭에게 향했다.
“한 번만 더 천박하게 날뛰면, 내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던 비 이낭은 그대로 까무러칠 뻔했다.
“우리 가문으로 시집온 이상, 엽씨 가문 큰아가씨는 이제 우리 집안 며느리다. 또다시 이런 못된 짓을 벌이면 내가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줄 것이야!”
매씨가 말을 마치자 두 여종이 그녀를 모시고 서재 밖으로 나갔다. 매씨가 떠난 자리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안색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주 백야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도화취가 든 옥병을 들고 잰걸음으로 밖을 나섰다.
* * *
저녁 어스름이 깔려오자 정국백부의 빛바랜 붉은 담과 녹색 기와 건물 위로 석양이 쏟아졌다.
궁명헌의 회랑과 본채도 금빛으로 물들었다. 엽연채는 옻나무로 만든 나한상 위에 옆으로 누워 있었다. 암홍색 치마는 여기저기 구겨졌고, 칠흑같이 까만 머리칼은 베개 위에 풀어 헤쳐져 있었다.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하품을 했다. 곧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이때, 추길이 안으로 들어와 엽연채 앞에 서서 고했다.
“아가씨, 그 사람들이 바깥뜰에 있는 서재로 가 주 백부 나리 앞에서 한바탕 난리를 쳤다고 합니다!”
엽연채는 그제야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피식 하고 조소를 날렸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서자가 부귀한 집안의 적녀를 아내로 맞이했으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었다.
“그 이야기는 누구를 통해 들은 것이냐?”
엽연채가 물었다.
“정원을 청소하는 향아라는 여종에게서 들었습니다. 주머니에 동화銅貨가 대여섯 개 있기에 그걸 주었더니 뛸 듯이 기뻐하더라고요.”
추길은 그 여종의 태도를 떠올렸는데 우스워서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정안후부에서 동화 대여섯 개는 땅에 떨어져 있어도 해당거의 3등三等 여종들조차 거들떠보지 않는 푼돈이었다. 그런데도 그리 좋아하다니. 기뻐 어쩔 줄 모르던 그 여종의 모습을 떠올리니 정국백부가 대체 얼마나 곤궁한 건가 싶었다.
“그 아이를 조용히 불러오거라. 내 그 아이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엽연채는 기지개를 켜며 일렀다.
“아가씨, 뭘 물어보시려고요? 오늘 왔었던 그 사람들에 대해 물어보시려는 겁니까?”
추길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그건 제가 이미 물어봤습니다.”
“얘도 참.”
차를 들고 들어오던 혜연이 그녀의 이마를 톡 튕기며 말했다.
“얼른 말씀드려.”
추길은 수돈에 앉아 오늘 왔던 사람들이 누구인지 엽연채에게 말해 주었다. 엽연채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오늘 보았던 얼굴들과 하나하나 연결해 봤다.
“향아가 말하기를 오늘 서재에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해요. 안주인께서 주 백부 나리께 삿대질을 하며 셋째 공자님이 아가씨를 배필로 맞이해서는 안 된다고 했고, 비 이낭은 왜 아가씨가 둘째 공자님이 아닌 셋째 공자님에게 시집을 가냐며 불공평하다고 울부짖었답니다. 둘째 공자님의 혼인을 물리고 아가씨와 걸맞은 수준의 여인을 다시 찾아 며느리로 맞이해야 한다고 했대요.”
엽연채는 피식 실소를 터뜨리더니 이어 침상 위에서 배꼽이 빠져라 웃어 댔다.
‘비 이낭이라는 사람, 정말 물건이네!’
“망측한 건 주 백부 나리께서 그 사람들을 어쩌지 못했단 겁니다. 그렇게 난리를 치는데도 그저 내버려 두셨다고 해요. 결국 나리의 어머니께서 나타나신 후에야 잠잠해졌지 안 그랬으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죠.”
“나리의 어머니?”
배꼽을 잡고 웃던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곤 순간 멈칫했다.
“셋째 공자님의 할머님이요. 젊었을 때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고 해요. 응성 지역 장수 가문의 여걸이셨고, 돌아가신 노태야와 전장에도 나가셨다고 해요. 주씨 가문의 가세가 기울고 노태야께서 돌아가신 후로는 방 밖으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계신다고는 하지만요.
심지어 주씨 가문 세자가 혼례식을 올릴 때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오늘 공교롭게도 바람을 쐬러 나왔다가 그 소동이 벌어진 것을 들으신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길로 서재로 가 상황을 정리하셨던 거죠.”
엽연채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생각했다.
‘오늘 참 운이 좋았네. 바람을 쐬러 나온 할머님께서 마침 딱 그 장면을 목격했으니 말이야. 안 그랬다면 아버님은 유약한 분이시니 추길이가 말한 것처럼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지.’
엽연채는 다시금 하품하며 말했다.
“안에서 일어난 소동인데도 이리 분명하게 알려 준 걸 보니, 향아라는 아이가 엿듣기 고수로구나. 추길아, 앞으로 그 아이와 잘 지내렴. 저쪽의 사소한 움직임을 모두 알아낼 수 있겠어.”
추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누가 오고 있습니다!”
그때 혜연이 갑자기 창밖을 보며 말했다. 나한상에 기대 있던 엽연채가 몸을 일으켰다. 여종 둘과 함께 소청으로 가 보니, 양쪽으로 머리를 틀어 올린 거무칙칙하고 야윈 여종 둘이 커다란 찬합을 들고 걸어 오고 있었다.
엽연채를 본 여종은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주방에서 잡일을 하는 소초가 어제 셋째 마님이 추녀일 거라고 장담했었는데, 이런 미인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소초는 색이 바랜 붉은 조칠彫漆 찬합을 탁자에 내려놓은 후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말했다.
“셋째 마님, 저녁 식사입니다.”
이 말을 하고선 뒤돌아 나가려 하자 추길이 소초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언짢은 투로 말했다.
“무례하기 짝이 없구나.”
그러자 엽연채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국백부 주씨 가문의 가세가 기울었다더니 위엄도 땅에 떨어져 규율도 지키는 둥 마는 둥 하나 보구나. 혜연아, 식사하게 가서 셋째 공자님을 모셔오거라.”
“예.”
혜연이 그녀의 말에 답하고 밖으로 나갔다.
* * *
그 시각, 주운환은 난죽거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여양이 급히 달려와 고했다.
“셋째 도련님, 마님께서 함께 식사하시자고 도련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답니다.”
주운환은 순간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내 책을 내려놓았다. 그는 아까 진씨 일행이 궁명헌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향했는데, 마침 진씨 일행이 식식거리며 그곳을 떠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아마 바깥뜰에 있는 서재로 가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난죽거로 돌아왔다. 엽연채가 당황한 모습으로 뛰어와 자신에게 그 이유를 물어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그녀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이제야 사람을 보내서 한다는 말이 고작 밥 먹으러 오라는 것이라니. 주운환은 그녀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주운환은 궁명헌에 도착했다. 회랑에 올라선 그는 그대로 정방을 향해 걸어갔다. 문 앞에 다다르자 계화상조 무늬로 오려진 전지剪紙가 꽃무늬가 새겨진 문 양쪽에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주운환은 멍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엽연채가 탁자 옆에 놓인 둥근 걸상에 앉아 있었다.
주운환은 자리에 앉은 후 그녀에게 물었다.
“방금 전 어머니와 큰형님 일행이 이곳에 왔다고 하던데, 어째서 내게 사람을 보내 알리지 않았습니까?”
“오시면 오시는 것이지요. 그게 뭐 별일이라고요.”
너무나도 태연자약한 대꾸에 주운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다른 규수들 같았으면 갑자기 이런 곳으로 시집을 온 데다 시어머니가 사람들을 데리고 서슬 퍼런 모습으로 들이닥쳤으니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몰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태연했다. 무신경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담이 크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때 곁에서 찬합을 열어본 혜연의 낯빛이 변했다. 그녀는 입술을 씰룩거리다가 안에 든 반찬을 하나씩 꺼내 상에 올렸다. 백채소육사白菜燒肉絲(배추, 돼지고기, 생강 등을 채 썰어 볶은 요리), 고기는 거의 들어 있지 않은 마파두부, 량반청과凉拌青瓜(오이무침) 그리고 달걀탕이 올려졌다.
반찬 세 개에 국 하나가 전부였다. 이를 본 추길은 실망감에 숨을 폭 내쉬었고, 상을 차리던 혜연은 음식을 올리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정안후부에서는 3등 여종들도 이렇게 먹지 않았다.
반면 주운환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반색했다.
“어, 찬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그 말에 혜연과 추길은 비틀거리다가 상 위로 넘어질 뻔했다. 엽연채도 입가를 씰룩이며 물었다.
“공자님은 평소에 어떻게 드십니까?”
주운환이 젓가락을 쥐더니 백채소육사와 달걀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과 이것을 먹습니다. 가끔 두부소육사豆腐燒肉絲(네모나게 썬 두부에 목이버섯, 원추리 등을 볶은 요리)로 바뀌기도 합니다. 집안 형편도 좋지 않고, 제가 서자인지라 줄곧 이렇게 먹어 왔습니다. 배만 채울 수 있으면 그걸로 족합니다.”
그러면서 백채소육사를 집어 엽연채의 그릇 위에 올려 주었다. 엽연채가 불쾌함과 억울함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그녀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주운환은 의아한 눈빛을 하며 참 이상한 아가씨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부는 조용히 밥을 먹었고, 식사를 마친 주운환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혜연이 찬합 밑에 들어 있는 백채소육사를 꺼내자 추길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이게 우리 저녁밥이야?”
“셋째 공자님과 아가씨도 이렇게 드셨는데 우리가 뭘 따지니?”
혜연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추길은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너무나도 고단했던 하루였기에 엽연채와 여종들은 식사를 마치고 목욕한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