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진씨는 머리가 다 어지러워졌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강심설이 얼른 부축했다.
“어머님!”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주종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가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여종을 불러 추궁했다.
“너, 이리 와 보거라! 어제 셋째가 정말로 장가를 들었단 말이냐?”
여종이 앞으로 다가와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 다들 주인나리께서 신부를 데려와 셋째 도련님의 부인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았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종과의 낯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정말 장씨 가문으로 시집가기로 했던 정안후부의 그 따님이라고?”
여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오늘 아침 정안후부 사람들이 셋째 마님을 모셔갔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분이 이곳에서 하룻밤 소낙비를 피하신 모양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정말 이 혼사에 응하실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죠.
그런데, 반 시진 전에 돌아오셨어요. 혼수품을 실은 마차를 세 대나 끌고 말이죠. 정말로 셋째 도련님에게 시집오시겠다는 뜻인 거죠. 정안후부에서는 엽씨 가문 큰아가씨는 원래 주씨 가문 셋째 공자님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다고 말을 퍼뜨렸고요.”
그 말을 들은 주종과는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 이런 행운이 있을 수 있지?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잖아! 근데 그 호박을 주운 사람이 내가 아닌 셋째라니!’
“난 믿을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지 내 직접 가서 봐야겠다!”
비 이낭이 날카롭게 소리를 지르더니 홱 돌아서서는 바람을 일으키며 냅다 뛰어갔다. 주종과는 어두운 낯빛으로 황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어머님, 저희도 가 봐요.”
강심설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렇게 말한 후 안고 있던 아들을 유모에게 건네주었다. 굳은 표정의 진씨 역시 이 소식에 적잖이 화가 치밀었다. 그녀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비 이낭의 뒤를 바짝 쫓아갔다.
그렇게 주씨 가문 사람들은 엄청난 기세로 궁명헌을 향했다.
“정말로 엽씨 가문 적장녀라면 신랑이 놀라서 도망갈 여인일 게다. 서자에게 몸을 의탁하려는 걸 보니 괜찮은 처자는 아닐 게야!”
비 이낭은 걸어가며 몹시 못마땅한 듯 상스러운 말을 퍼부어댔다.
“성품이 되먹지 못한 건 물론, 눈과 입이 삐뚤어진 못난이겠지! 그래, 분명 추녀일 게야.”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던 주종과는 그 말을 듣고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집안 곳곳을 눈 깜짝할 새에 지나쳤다. 그들은 숨을 헐떡거리며 궁명헌에 도착했다. 뜰 안으로 들어서니 낯선 여종 둘이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계단 앞에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인이 서 있었다. 까치발을 든 채 가늘고 매끈하고 흰 손으로 계화상조桂花祥鳥(계수나무 꽃가지에 새가 앉아 있는 길상吉祥 그림) 무늬로 오려진 전지剪紙(가위나 조각칼을 사용하여 종이를 오려 붙이는 공예 또는 그 공예품)를 문에 붙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는 세상의 모든 색채를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암홍색 비단 치마는 아름답고 멋스러운 자태를 드러냈고, 검은 머리카락은 가녀린 어깨 위로 늘어져 있어 그녀의 하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요염한 자태를 뽐내는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소녀는 나뭇가지에 걸린 불그스름한 복숭아나 자두처럼 탐스러웠으며, 가을 호수에 비친 꽃처럼 사랑스러웠다. 세상 모든 아름답고 귀한 빛깔을 전부 그녀가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낯선 소녀를 본 주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일제히 숨을 헉 하고 들이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특히 비 이낭이 큰 충격을 받았는데, 안으로 들어서기 전만 해도 분명 추녀일 거라는 말을 되뇌던 그녀는 실제로 엽연채의 모습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하마터면 혓바닥을 깨물 뻔했다. 그녀는 문턱에 걸려 비틀거리다가 주종과의 등에 부딪쳤다.
주종과는 더욱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엽연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자신의 눈을 그녀에게 붙여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절세가인!’
주종과의 머릿속에는 이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엽연채 역시 그들을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곱고 아름다운 눈으로 슬그머니 그들을 쓱 훑어봤고 이내 그들의 신분을 알아차렸다. 정안후부와 비교해 보면 주씨 가문의 가족 관계는 단순한 편이었다.
사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부인 둘이 서 있는데, 오른편 뾰족한 얼굴의 부인은 귤빛 배자를 입고 있었다. 표정이 경박하고 요염하게 치장한 것이, 딱 봐도 첩실인 듯했다.
왼쪽에 서 있는 부인은 아름다운 얼굴에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단정하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미루어 이 집안의 안주인임이 확실했다.
그 뒤로는 두 명의 젊은 사내와 묘령의 소녀,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부인이 있었다. 이들은 분명 주운환의 형제자매와 형수님일 터였다.
엽연채가 앞으로 다가서며 진씨에게 배례拜禮(정중히 절하는 예)를 행했다.
“어머님을 뵙습니다.”
진씨는 엽연채의 아리따운 외모와 바른 몸가짐이 눈에 몹시도 거슬렸다. 눈앞의 현실을 어떻게 해도 받아들일 수가 없어 분노에 찬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녀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 그저 입술을 삐죽거리기만 했다. 뭐라고 대꾸하면 이 사실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화가 난 진씨는 예의 같은 것은 신경 쓰지도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리께서는 어디에 계시냐?”
“서재에 계십니다!”
밖에 있던 한 여종이 대답했다.
진씨는 옷소매를 탁 흔들곤 돌아서서 가 버렸다. 비 이낭과 주종과도 그 뒤를 따라 황급히 문밖을 나섰고, 그들은 곧장 서재를 향해 달려갔다.
궁명헌을 나선 주비양은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버드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의 그림자는 이내 낮게 드리워진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사라졌다. 강심설은 무덤덤한 눈빛으로 남편의 그림자를 쳐다보다가 돌아서서 진씨의 뒤를 쫓아갔다.
* * *
그 시각, 바깥뜰에 위치한 서재.
주 백야는 널찍한 서재에 있었다. 옻칠한 긴 책상은 곳곳에 흠집이 나 본래 어떤 목재로 만들었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고, 그 위에는 복숭아꽃이 새겨진 정교한 옥병玉甁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작은 옥병을 들고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병 안에 든 도화취桃花醉는 그의 선친이 직접 빚어 놓은 술로, 평소 주 백야가 무척이나 아꼈으나 친한 벗의 집에 선물로 가져가야 해 어제 어쩔 수 없이 꺼내 둔 것이었다.
어제 벌어진 황당한 혼사 때문에 그는 집에서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래서 오랜 친구의 집에 가서 며칠 묵을 생각이었다. 친구는 그러라고 하면서 선친께서 빚어 놓은 도화취를 꼭 가져오라고 덧붙였다. 가져오지 않으면 집으로 들여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친구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서재에 술을 놓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에는 사동에게 가져오라고 분부했으나, 어리석은 사동이 술을 찾지 못했기에 결국 그가 직접 가서 가지러 오는 수밖에 없었다. 주 백야가 술을 들고 문을 막 나서려 하는데 사동이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나리, 마님과 비 이낭 일행이 돌아오셨습니다!”
주 백야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도화취가 담긴 옥병을 깨뜨릴 뻔했으나, 다행히도 재빨리 품 안에 감싸 안는 데 성공했다.
“어디로 갔느냐?”
“이리로 오시는 것 같습니다!”
“에이, 너도 참,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느냐! 미리 알려 주지 않고.”
그는 초조하고 괴로웠다. 선친께서 묻어 두셨던 술까지 꺼낸 건 외출해서 며칠간 저들을 피하기 위해서이거늘, 떠나기도 전에 부인과 첩실이 돌아오다니.
“소인이 방금 전 용변을 보러 갔었습니다. 측간에서 막 나가려 하는데 멀리서 마님, 큰며느님, 둘째 도련님, 비 이낭께서 협문에 도착하신 모습을 보았고요!”
“뭐라?”
아니나 다를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밖에서 우르르 몰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주 백야는 옥병을 든 채 이대로 줄행랑을 쳐야 할지, 아니면 병을 탁자에 내려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러다가 결국 황급히 술을 내려놓고는 탁자 앞에 앉았다. 어차피 도망치려 해도 도망칠 수 없게 된 판국에 자신이 그들을 껄끄러워하는 것을 드러내 무엇 하겠는가. 공연히 일을 키울 뿐이었다.
“나리!”
진씨는 암문暗紋이 들어간 갈색 치맛자락을 탁 놓으며 노기충천한 모습으로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셋째가 엽씨 가문 큰아가씨와 혼인하다니요. 이건 정안후부가 대놓고 저희 가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 아닙니까? 대체 저희 정국백부를 무엇으로 본 겐지! 그리하면 저희 가문은 도성 내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골머리가 아파 온 주 백야는 얼굴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됐으니 그리 아시오! 왜 이리 소란을 피우는 거요!”
“나리!”
비 이낭이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엽씨 가문 큰아가씨께서 정말로 저희 가문에 시집을 오는 거라면 당연히 둘째 공자이신 종과 도련님께 시집을 와야죠! 어째서 종과 도련님을 건너뛰고 셋째에게 시집을 갑니까?”
그 말을 들은 주종과는 두 눈을 번뜩였다. 그러곤 그 말에 동의한다는 눈빛으로 주 백야를 쳐다봤다.
“새신랑과 도망친 게 셋째의 정혼녀가 아니더냐!”
주 백야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소리를 꽥 질렀다.
“그래도 불공평합니다! 어째서 셋째 도련님께서 엽씨 가문 적출 소생 적장녀와 혼인을 하신단 말입니까? 종과 도련님은 4품관四品官 서제의 서녀와 혼인하는데 말입니다!”
“아니… 자네도 둘째가 설씨 가문 아가씨와 혼인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미 혼약을 맺어 놓았고.”
그는 벽창호를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만 물러가게나!”
그래도 비 이낭은 눈물을 흘리며 계속해서 치근거렸다.
“같은 형제이며 같은 서자인데, 어찌 이리 편애하시는 겁니까! 종과 도련님도 셋째 도련님께서 혼인하는 여인과 비슷한 수준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을 들은 주 백야는 곤혹스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그는 어서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만하거라!”
그때 난데없이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활간滑竿(댓조각이나 새끼줄을 두 개의 긴 대나무 막대기 중간에 얽고 그 위에 요를 깔아 사람을 태우는, 가마와 비슷한 이동수단)을 타고 있는 백발이 성성한 노마님이 보였다. 두 여종이 그 노마님이 탄 활간을 매고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