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주비양과 혼인을 약속했던 한 군주郡主(친왕의 딸 등이 받는 봉작으로 공주 아래의 직위임)는 낌새를 알아채고 줄행랑을 친 후 구실을 찾아 혼사를 물렸다. 그런데 그때 정안후부에서 혼인을 맺자고 달려든 것이었다.
당시 엽씨 가문을 이끌던 사람은 엽학문의 아버지, 즉 엽연채의 증조부였다. 이 엽가 노태야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평소 엽가 노태야는 주씨 가문과 어떠한 친분도 없었다. 더군다나 주씨 가문이 몰락하자 다른 이들은 모두 그들을 멀리하는 와중에, 엽씨 가문 노태야는 되레 주씨 가문 사내들은 하나같이 영웅이라 늘 흠모해 왔다고 호의를 보였다.
또한 지금이야 어찌 됐든 간에 주씨 가문 선조들은 전부 좋은 분들이었으니 실수 한 번으로 이 지경으로 무너져서는 안 된다고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 도움을 줄 뾰족한 수가 없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생각해 낸 것이 주씨 가문과 혼사를 맺는 것이라고 했다.
주씨 가문 노태야는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준 정안후부에 감격했다. 당시 엽씨 가문 노태야는 엽연채와 주씨 가문 적자를 맺어 주려고 했다. 하지만 온씨가 이미 엽연채를 장씨 가문에 시집보내기로 결정했던지라 차선책으로 엽이채를 주씨 가문과 맺어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엽이채는 서출인 둘째 아들의 여식이었다. 엽 노태야는 주씨 가문의 적자를 욕보이는 건 아닐까 염려되어 눈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주종과와 주운환은 나이가 비슷하니 혼인을 맺으려면 당연히 형인 주종과와 맺어야 했다. 그러나 그와 엽이채는 사주팔자가 맞지 않는 바람에 결국 주운환과 혼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걘 좋은 사주팔자를 타고났나 봐요?”
주종과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팔자가 좋기는!”
비 이낭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못 들었나 보구나. 나도 저번 달에 들었는데 글쎄, 그 손씨가 남몰래 사람을 시켜 엽이채의 혼인 상대를 물색했다고 하더구나!”
“그 말이 사실입니까?”
주종과가 기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뭐 하러 너에게 거짓말을 하겠느냐?”
비 이낭은 혀를 차며 말을 이어 갔다.
“양가의 혼사가 맺어졌을 때 그 손씨가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그런데도 결국 그 늙은이를 어찌하지 못했어! 그러나 그 늙은이는 이미 3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 혼사를 강요하던 사람도 사라진 셈이고 탈상도 했으니 손씨가 제 딸을 위해 활로를 찾는 게지.”
주종과는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내 표정이 밝아졌다.
“지금의 엽가 노후야는 돌아가신 선대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얼마나 박정하고 모진 사람인데. 네 아버지는 성정이 물렁물렁해 혼인을 무르고 싶어도 못 하실 테지. 그래도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려 보거라. 네가 혼례식을 올리고 나면 조급해진 손씨가 분명 우리 가문을 찾아와서 혼인을 무르겠다고 할 게다.”
비 이낭이 무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시 혼약을 맺을 땐 그래도 주씨 가문이 아직 위세가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인정하기는 싫지만 지금의 주씨 가문은 말 그대로 기가 꺾일 때로 꺾인 상태로, 사람들이 말하는 ‘몰락한 집안’이라는 말에 딱 들어맞았다.
“그 아이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나기는 했어도, 어떤 수를 써도 기녀 출신이라는 딱지는 뗄 수 없을 게다. 어디 어떤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지 한번 지켜보자꾸나. 그러니 너도 그 아이한테 심술부릴 필요 없다.”
비 이낭은 손수건을 털고는 주종과를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언제 그 녀석한테 심술을 부렸다고요?”
주종과는 금세 기분이 좋아져 하하 웃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형제들과 경쟁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적자인 형에게도 맞섰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형보다 못나지 않았으니 세자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지금도 언젠가는 적자인 형을 끌어내릴 생각을 품고 있었다. 몰락한 집안의 세자라도 세자는 세자였다. 게다가 이 집안에 남아 있는 것 중 가치 있는 것이라곤 그 작위뿐이었다.
그리고 주종과가 서제인 셋째와 경쟁하는 건 서제가 형제들 중 가장 외모가 뛰어났고, 또한 여러모로 자신보다 나은 게 없었음에도 자신보다 좋은 집안과 혼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런 주운환에게 혼약을 맺은 집안에서 퇴짜를 놓아, 그가 다른 혼처를 구하지 못할 걸 생각하니 기분이 절로 유쾌해졌다.
모자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마차는 어느새 정국백부가 위치한 장승가에 다다랐다. 앞서가고 있던 주비양 일행은 이미 모퉁이를 돌아 동쪽 측문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반나절 동안 말을 탄 주종과는 피곤함이 몰려왔다. 이에 하품을 하며 말의 배를 살짝 건드리자 마차를 끌던 말이 속도를 높였다.
두 일행이 잇따라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수화문에서 멈춰 서자, 하인들이 부산을 떨며 등받이가 없는 네모난 작은 걸상을 내려놓고 마차의 발을 걷어 올렸다.
말에서 내린 주종과는 스물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 쪽으로 걸어갔다. 이 사내는 바로 정국백부의 적장자 주비양이었다.
“큰형님.”
주종과는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주비양은 싸늘한 얼굴로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해서 그의 기분이 나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안면 마비를 앓아 표정이 거의 없었다.
마차에 타고 있던 다른 식솔들도 하나둘 마차에서 내렸다. 주씨 가문의 안주인 진씨, 주비양의 처 강심설, 적장녀인 주묘서, 차녀이자 서녀인 주묘화가 함께 상주常州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비 이낭이 손수건을 흔들며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큰마님, 돌아오셨군요!”
그런데 이때 회색 옷을 입은 여종 하나가 다급히 뛰어왔다. 그녀는 진씨가 부리는 여종으로 이름은 녹지였다. 그녀가 어두운 낯빛으로 고했다.
“마님, 그… 셋째 도련님께서 어제 장가를 드셨습니다!”
아직 진씨가 입을 열지도 않았는데 비 이낭이 하하 웃으며 끼어들었다.
“너, 혹 넘어져서 머리라도 다친 거니?”
진씨는 차가운 눈빛으로 비 이낭을 쏘아본 후에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녹지야, 그게 무슨 소리냐?”
“소인이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옵니다.”
녹지는 쭈뼛쭈뼛하며 상전을 한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셋째 도련님의 처가인 정안후부에서 딸을 시집보내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비 이낭이 손수건을 흔들며 대화에 또 끼어들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시집을 간 건 정안후부의 적장녀 아니냐. 쯧쯧. 정안후부에서 가장 귀하신 따님이지. 그리고 그 상대 또한 귀하디귀하신 대리시경의 적장손이다. 셋째 도련님께 든든한 동서가 생긴 게지!”
마지막 말을 내뱉을 때 그녀의 표정은 음흉했다. 작게 콧방귀를 뀌는 진씨의 눈에도 조롱이 담겨 있었다. 그녀도 셋째의 예비 장모가 자기 딸을 위해 남몰래 다른 혼처를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었다.
그 생각이 들자 진씨는 저도 모르게 며느리 강심설을 흘끗 쳐다봤다. 출신을 놓고 이야기하자면, 그녀의 며느리는 서강백부西康伯府의 적출 소생 차녀이니 듣기에는 그럴싸했지만, 실상 서강백부는 주씨 가문만도 못한 형편이니 그 집안 적출 소생 차녀는 당연히 엽이채만 못했다.
진씨는 서자인 셋째의 아내가 자기 친아들의 며느리보다 조건이 나은 걸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엽이채가 주씨 가문에 붙들려 있을 리 없었고, 조만간 혼인을 물릴 거라 예상했기에 여태 크게 개의치 않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말하는 게 어찌 밑도 끝도 없느냐?”
듣다가 지겨워진 비 이낭은 얼른 방으로 돌아가 쉬고 싶었다. 이에 녹지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엽씨 가문 큰아가씨는 장씨 가문에서 신부를 맞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어요. 그런데 큰일이 벌어지고 만 겁니다. 처제 될 사람이 새신랑과 함께 도망을 가버린 거예요. 그 처제 될 사람이 바로 셋째 도련님의 정혼녀인 엽이채 아가씨이고요.”
“뭐라?”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깜짝 놀라 외쳤다.
“풉! 셋째 도련님의 정혼자가 형부랑 도망갔다고?”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비 이낭이었다. 그녀는 배꼽을 잡고 웃어댔다.
“그게 정말이니? 아이고, 우스워 죽겠네!”
“어머니, 괜찮으세요?”
주종과도 꺽꺽 소리를 내며 자지러지게 한바탕 웃더니 그제야 웃음을 참아 보려고 애를 썼다.
“내가 안 괜찮을 게 뭐가 있니? 안 괜찮은 건 셋째 도련님이지! 쯧쯧쯧, 가엽기도 해라.”
비 이낭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 사람이었다.
“전 셋째 도련님의 혼사가 최악으로 치달아 봤자 엽이채에게 퇴짜를 맞는 게 전부겠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하하, 그 아가씨가… 형부를 꼬셔 달아나는 방법으로 이쪽을 정리할 줄이야.
아이고, 어떡하지! 웃다가 배가 찢어져 죽겠어요! 진작에 알았다면 어제 예불을 드리러 가는 게 아닌데. 여종으로 변장을 해서라도 나리께 데려가 달라고 하는 건데. 이건 뭐 가극보다 훨씬 재미있는데요!”
그녀는 정신없이 웃다가 하마터면 땅바닥에 넘어져 구를 뻔했다. 진씨는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지만 조롱 섞인 눈빛마저 가릴 수는 없었다. 강심설은 안고 있던 네 살배기 아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나 주비양의 싸늘한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그러나 녹지의 얼굴에선 상전을 즐겁게 만들었다는 의기양양함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되레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흐렸다.
“그게…….”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말해라. 뭐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 것이냐? 어서 말해 보거라!”
비 이낭의 말엔 어서 듣고 싶어 애가 타는 마음과 기대감이 가득했다. 이에 녹지는 이를 꽉 물고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랑이 처제와 도망을 가 버리자 신부는… 혼인할 상대가 사라져 버린 거지요. 그런데 그 댁 주인나리께서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신 건지, 엽씨 가문 큰아가씨를 저희 주씨 가문으로 보내 셋째 도련님과 맺어 주셨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녹지는 가슴에 머리를 파묻었다. 비 이낭의 웃음소리가 순간 뚝 끊겼다. 사람들도 다들 깜짝 놀라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얼굴에서는 아직 웃음기가 다 사라지기도 전이었다.
진씨가 두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어떻게 그리된 것이냐? 그게 정말 사실이야?”
“정말입니다!”
채근하는 눈빛에 녹지는 울상을 지었다.
“지금 그 셋째 마님께서는… 궁명헌에 계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