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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20화 (20/858)

제20화

여한은 궁명헌 동쪽 회랑에 서서 주운환이 엽연채를 데리고 들어오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넋을 잃었다.

“여한아, 가서 차를 가져오너라.”

“예!”

여한은 주운환의 명에 답하고서는 서둘러 차를 가지러 갔다. 본채로 먼저 걸어간 주운환이 고개를 돌린 후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엽 소저, 안으로 드시지요.”

“감사합니다.”

엽연채는 싱긋 미소를 지은 후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깨끗하고 소박했다. 옻칠한 원탁이 소청 정중앙에 놓여 있었고, 탁자의 아치형 다리 주위로 작은 원형 걸상 몇 개가 자리했다.

엽연채는 자리에 앉지 않고 먼저 주운환을 향해 예를 갖췄다.

“어제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급히 치러진 혼사라 상황에 쫓겨 주씨 가문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공자를 욕보이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방금 전 주운환을 비웃던 여종들의 모습을 보니, 그가 자신 때문에 근거 없는 헛소리들로 곤욕을 치렀음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주운환은 따뜻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소저를 탓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혼사는 저희 아버지께서 응하신 것이니 소저 잘못이 아닙니다.”

이때 여한이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청자 찻잔 두 개가 낭랑한 소리를 내며 탁자 위에 놓였다. 차를 내려놓은 여한은 말없이 여양 곁으로 물러났다.

“엽 소저, 앉으시지요.”

주운환이 말했다.

“부끄럽지만 제 처소에는 사동 둘뿐입니다.”

“괜찮습니다.”

엽연채가 찻잔을 들고 찻잔 뚜껑을 열자, 맑고 투명한 황록색 철관음차鐵觀音茶(과일향이 나는 반발효차)의 상쾌한 향기가 풍겼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주운환이었다.

“소저께서는 오늘 아침 떠나신 것으로 아는데, 무슨 연유로 다시 돌아오신 것입니까?”

그의 말을 들은 엽연채는 방금 전에 들었던 수군거림을 떠올렸다. 주씨 가문에서는 정말로 자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제 가마에 오르는 순간 깨닫게 됐어요. 주씨 가문에 시집가는 이상, 저는 주씨 가문 며느리라는 사실을 말이죠. 저와 공자님이 인연인가 봐요.”

이 말에 주운환은 어안이 벙벙했다.

“진심으로 저에게 시집올 생각이신지요?”

“물론이죠.”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답하자 주운환의 눈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소저,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서자에 불과합니다. 소저와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에요. 방금 전 여종들이 떠드는 이야기도 들으셨겠지요. 전 이 집에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 능력도 없으니 소저를 지켜 드릴 수도 없어요.”

엽연채는 태연히 대꾸했다.

“그게 뭐 어때서요? 전 스스로를 지킬 수 있습니다. 겸사겸사 공자님도 지켜 드릴게요.”

‘날 지켜 준다고?’

그 말에 얼떨떨했던 주운환은 살짝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곧 엽연채가 가소롭게 느껴졌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고관대작의 따님께서 아직 자신의 신분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자신이 지금 어떤 처지가 됐는지 파악이 덜 된 모양이었다. 상황을 이리도 단순하게 보다니. 순진해도 너무 순진하구나.

주운환은 일단 화제를 바꾸었다.

“우선 이곳에서 지내세요. 전 옆에 있는 난죽거에서 지내겠습니다. 정리가 좀 되고 나면 다시 이야기하시죠.”

“네.”

“그럼 전 소저의 짐이 다 옮겨졌는지 보러 가겠습니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운환은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여양과 여한이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추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여기 하인들은 하나같이 상전 알기를 우습게 아네요. 셋째 공자님은 정말로 아가씨를 지켜 주지 못하실 것 같아요. 이곳에서의 생활이 쉽지 않겠어요.”

“정안후부에 남아 있으면 잘 지냈을 것 같니?”

엽연채는 가볍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주씨 가문으로 시집가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에 이미 마음의 준비는 다 되었다. 공자께서 날 지켜 줄 수 없다면 내가 공자를 지켜 드리면 된다. 난 누군가에게 의지하겠다고 기대한 적 없어.”

“아가씨…….”

혜연의 얼굴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여인은 기댈 사람을 찾으려고 시집가는 게 아니란다. 다른 사람에게 기댈 바에야 다른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겠어.”

엽연채가 담담하고도 당당하게 말을 끝냈을 때, 밖에서 웬 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보니, 밖에서 여한이 큰 소리로 알려왔다. 그녀의 혼수가 전부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가씨, 아가씨께서 가져오신 혼수품은 우선 동쪽 곁채에 놔둘까 합니다. 괜찮을까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부탁 좀 하겠네. 추길아, 너도 가서 도와주거라.”

“예, 아가씨.”

추길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밖으로 나갔다.

혼수품이 다 정리된 후 엽연채는 추길에게 혼수품을 나른 사람을 모두 안으로 들이라고 했다. 혼수품을 나른 사람들은 전부 그녀가 정안후부에서 부리던 하인들이었다.

엽연채는 자신이 떠나고 온씨도 신경 써 주지 못하면 둘째 숙모 쪽 사람들에게 하인들이 핍박을 당할까 봐 염려되어 그들을 전부 데려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정국백부에 오니 이곳의 하인들이 원체 적어, 이렇게 자기 사람들이 많이 있으면 시선을 끌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되면 분명 이 집안 식구들의 불만을 사게 될 것이었다.

엽연채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은 경인만 남겨 놓기로 했다. 나머지 하인들에게는 우선 물건을 정리한 후 돌아가 있으면 이후에 다시 거취를 정해 주겠다고 말했다.

여한은 엽연채의 하인들을 배웅한 후 다시 난죽거로 돌아왔다. 주운환은 책상 앞에 앉아 글씨 연습을 하고 있었다. 글자는 고아하면서도 힘이 있어 마치 용과 봉황이 승천하는 듯한 형상이었다. 글자 연습이 더는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수준이었지만, 주운환은 고민거리가 있거나 깊은 생각에 잠길 때면 이렇게 글자를 쓰곤 했다.

“도련님, 엽씨 가문 큰아가씨의 하인들을 보내고 오는 길입니다.”

“보냈다고? 여기 남기지 않고?”

여한의 말을 들은 여양이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고관대작의 적녀이니 그녀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이 차고 넘쳤을 것이다. 이곳엔 하인이 얼마 없는데, 온실 속 화초처럼 귀하게 자란 아가씨께서 어찌 이곳 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하인들을 돌려보냈다니.

“예. 아가씨께서는 추길과 혜연, 그리고 심부름을 하는 영민해 보이는 사동 하나만 남겨 두셨습니다.”

여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에 여양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셋째 도련님, 이제… 그 엽씨 가문 큰아가씨를 어찌하실 생각이세요?”

“마님이라고 부르거라.”

주운환은 지적인 얼굴로 동요하지 않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분을 아내로 맞으시려는 겁니까?”

여양이 물었다.

“우선은 그렇게 부르거라. 굳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 필요는 없지 않더냐.”

수묵화 같은 주운환의 눈동자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빛이 스쳤다. 그는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았다.

하얀 선지 위에는 커다랗게 쓰여진 ‘고요할 정靜’ 한 글자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 * *

행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성문 밖, 푸른 덮개를 씌운 단출한 마차 한 대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생김새가 시원시원한 이십대 초반의 사내가 둥근 깃을 단 푸른 도포를 입고 큰 말을 몰고 있었다.

이 훤칠한 사내는 앞을 보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마차의 발은 걷어 올려진 상태였고 안에는 마흔 정도로 보이는 부인이 타고 있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자 마차 안에 있던 부인이 물었다.

“종과야, 왜 그러느냐?”

“어머니와 큰형님이 앞에 계시네요.”

주종과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 말에 비 이낭姨娘(첩실의 호칭)이 창문 밖으로 머리를 살짝 내밀자 과연 멀지 않은 곳에 마차 두 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마차 앞에는 스물다섯 정도로 보이는 청년이 타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주씨 가문의 적장자 주비양이었다. 이 일행은 바로 외출을 나갔다 돌아오는 정국백부 주씨 가문의 일가식솔들이었다.

어제 맑은 하늘 아래, 주씨 가문의 안주인인 진씨의 친정 조카도 혼례식을 치렀다. 진씨는 아들과 딸, 며느리를 데리고 친정인 민주에 가서 혼례식 축하연에 참석했다.

황성에서 민주까지는 두 시진이나 걸려, 진씨 일행은 민주에서 하룻밤을 자고 오늘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출발을 했는데도 지금에서야 도성에 도착한 참이었다.

어제는 예불을 드리기에도 좋은 날이었다. 그리하여 정국백부의 비 이낭과 백 이낭은 황성 근교에 위치한 서운사棲雲寺에 가서 향불을 피웠다. 더 머무르고 싶었던 백 이낭은 절에 남았으나, 비 이낭은 몸이 근질거려 절에서 하룻밤만 보내고 밥을 먹은 후 바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진씨 일행과 성문 밖에서 마주칠 줄이야.

비 이낭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진씨 일행과 알은체하고 싶지 않았고, 앞에 가는 진씨 일행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비 이낭이 화제를 돌렸다.

“반년 후면 옥아가 탈상脫喪을 하니 너희들의 혼사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에 주종과는 미소를 짓는가 싶더니 이내 낯빛을 바꾸어 탐탁지 않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제가 혼례를 치르면 셋째도 준비해야겠죠.”

현재 주씨 가문 자손은 아들 셋에 딸 둘이 전부였다. 주씨 가문도 한때는 번성했던 명문대가였지만, 주 백야의 아우들은 전부 전장에서 죽었고 현재는 백부 일가만 남아 있었다. 주씨 가문에 의지해 살아가던 방계 친족들은 주씨 가문이 몰락하는 모습을 보자 하나둘 그들 곁을 떠나갔다.

현재 주씨 가문의 아들로는 적장자 주비양, 차남이자 서자인 주종과, 삼남이며 역시 서자인 주운환이 있었다. 주비양은 이미 혼인을 했고 주종과와 주운환도 혼인을 약속한 상태였다.

자신의 혼사를 떠올리자 주종과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자신은 호부시랑户部侍郎 서제庶弟(서모庶母에게서 태어난 동생)의 서녀인 설옥인과 정혼했는데, 주운환은 정안후부 둘째 아들의 적녀인 엽이채와 정혼했기 때문이다. 가문의 세력과 출신을 놓고 보면 엽이채가 설옥인보다 훨씬 나았다.

“그때 엽씨 가문 큰어른께서 무슨 바람이 드셨는지!”

도량이 좁은 주종과는 투덜거리며 이 이야기를 수없이 들먹였다.

“당시 패전하는 바람에 저희 가문은 몰락하고, 엽씨 가문은 갑자기 위로 치고 올라오더니 저희 가문과 혼인을 맺자고 매달렸었죠.”

엽이채가 주운환과 혼인을 약속한 것은 정국백부가 몰락한 지 3년이 되던 해였다. 응성應城이 함락당하고 옥안관에서 패퇴한 주씨 가문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졌다. 거기다 주 노태야가 임종 전에 가산의 8할을 현금화해 전사한 병사들의 가족들에게 보상을 해 주면서 집안은 한순간에 급격히 기울었다.

무너지는 담은 뭇사람이 달려들어 넘어뜨리고, 나무가 넘어지면 원숭이도 흩어진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그 당시 주씨 가문이 얼마나 초라하고 힘겨웠는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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